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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산, 핵발전소도 몰락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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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의 유산, 핵발전소도 몰락하나?

[초록發光] 탈핵의 시작, 핵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

경주 지역 지진을 계기로 핵발전소(원전)의 안전성을 비롯한 핵 위험의 문제가 지속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목소리와 함께 탈핵운동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지난 한달 여를 되돌아보면, 상황은 분명하다.

핵발전소 주변의 활성단층 존재 여부가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고, 신고리 5, 6호기 건설 허가 문제가 다시금 부상했다. 지진과 태풍은 다중호기로 밀집된 핵 발전 단지의 중대 사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고, 방사선용 요오드 배포 등 사고 대응책이 허술하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되었다.

한편, 월성 1호기가 월성 2~4호기의 설계도면으로 수명 연장이 이뤄졌다는 점이 새롭게 조명 받았고, 이주 대책을 요구하는 월성 핵발전소 인근 나아리 주민의 농성은 2년을 넘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 처분 부지를 직권 결정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한 반면 핵시설이 위치한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은 반대 의사를 밝혀 험난한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렸다.

하루 이틀만 지나도 새로운 이슈로 뒤덮이는 사회에서 탈핵 운동가마저 따라가기 벅찰 만큼 다양한 핵 위험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핵 위험으로부터 대단히 취약하다는 사실은 이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듯도 싶다. 덕분에 핵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졌다. 핵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지만 여기서 탈핵의 길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선 핵발전소 사고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재난 상황에서 핵발전소의 가동을 긴급 정지할 수 있는 규제 기관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거나 긴급 정지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시민들에게도 주어져야한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경주 지진이 발생한 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핵발전소 가동에는 영향이 없다고 발표했다가 3시간여가 지난 뒤 월성 핵발전소를 수동 정지했다. 뒤늦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월성 핵발전소는 수동 정지 기준을 넘겼다고 한다. 재난 상황에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를 신속하게 취하는 것은 안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운영 당사자는 적극적인 조치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만큼 보완책이 필요하다.

둘째, 핵 위험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도 시급히 확대되어야 한다.

일례로, 오래 전부터 활성단층 논란이 있었지만 정부와 한수원은 관련 정보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단적으로 2012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활성단층 지도 및 지진 위험 지도 제작' 연구를 수행했으나 사회적 파장을 이유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이 국정 감사 기간에 '발굴'되었다. 심지어 2000년에 같은 기관에서 유사한 연구를 수행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1992년 일본 연구자가 양산단층의 활성단층 가능성을 제기한 이래 간헐적으로 논란이 일었지만 정부와 한수원은 애써 무시했다. 그 결과 활성단층 주변으로 세계 최대의 핵 발전 단지가 건설되었다.

'의도하지 않게' 핵 위험과 관련된 정보가 공개된 뒤에도 알 권리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사용 후 핵연료 1699봉을 20년 넘게 반입해온 사실이 공개된 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시민 단체와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으나 국가 기밀과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정보 공개가 제한되고 있다.

셋째, 정보에 대한 접근권은 시민들이 독립적으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권리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지난 한 달간 규제 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형식적으로 독립했으나 여전히 진흥 기관에 엮여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전문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산업통상자원부와 미래창조과학부, 한국수력원자력 등으로부터 거액의 용역을 수주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갑'인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을'인 이들이 규제를 강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핵 위험 관련된 지식이 비대칭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위험성을 확인하고 싶어도 관련된 연구와 조사가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의 근거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활성단층과 관련된 연구 결과가 알려졌다면, 규제 기관이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조사, 규제할 수 있었다면, 나아가 시민 주도로 위험성을 조사할 수 있었다면 신고리 5, 6호기의 건설허가나 월성 1호기 수명 연장이 가능했을까?

넷째, 핵 위험과 관련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사회적 합의를 요구할 권리도 보장되어야한다.

의견 수렴과 시민 참여는 정책 추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정책 결정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절차에 관한 법률'의 입법 과정을 보면, 실질적인 참여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9월 초 경주시와 기장군, 영광군, 울주군, 울진군 등 핵 시설이 입지한 지방자치단체들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 계획 확정에 대한 공동 건의서'를 제출하며 정부의 정책 추진이 주민 의견을 수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주민 반대로 각 지역에서의 설명회도 잇달아 무산되었다. 그러나 산업통상자원부는 신청 지역이 없을 경우 직권으로 후보 부지를 선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입법안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민과 시민이 참여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길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다섯째, 핵 위험의 직, 간접적 피해자들의 권리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2년 넘게 천막 농성을 하고 있는 나아리 주민들이 생생한 사례이다. 실질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박탈되고 삼중수소 피폭에 따른 피해의 가능성이 제기된 상황에서 주민들이 요구하는 이주 대책이 국회에서 공론화되기까지 2년 넘게 걸렸다. 구체적인 제도 개선과 이주 방안이 제시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이 제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피해자들의 안전할 권리가 실현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안전한 상황에 대해 시민들이 비판하고 반발하는 것은 저항의 권리로 인정되어야한다. 하지만 정부나 한수원은 시민들의 비판과 저항을 무마시킬 방안만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논란이 된 한수원 보고서 <원자력 정책의 포퓰리즘화 가능성과 대응 방안>, 그 안에는 다른 목소리를 경청할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고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저항의 권리를 인정하는 에너지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핵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침해받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사실이 있다면, 탈핵 운동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한달 사이 '신고리 5, 6호기 백지화 부산시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잘 가라 핵발전소 100만인 서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매주 한차례씩 영광 핵발전소(한빛원전)에서 진행된 '생명 평화 탈핵 순례'는 200회를 넘겼다.

정부와 한수원은 인정하지 않지만, 이미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은 저항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기실 모든 권리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다. 핵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 역시 저항하고 연대할 때 쟁취하고 지킬 수 있다. 핵 위험의 불안감을 느낀다면, 안전할 권리를 요구해야한다.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최소한의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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