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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연설문, 정말 최순실 개입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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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연설문, 정말 최순실 개입 없었나?

[기자의 눈] 2013년과 2016년 광복절 연설문 속 실수, 왜 생겼나

최순실 씨(최서원으로 개명)는 과연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쳤나. 청와대는 아니라고 하지만, 미덥지 않다. 박 대통령의 연설문은, 그동안 확실히 이상했다.

2016년 광복절 연설문의 착오


박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연설문에서 황당한 실수를 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뤼순이 아닌 하얼빈이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 하얼빈이다. 하얼빈은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당시엔 러시아 조차지였다. 안 의사는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이후 뤼순 감옥으로 이송됐다. 거기서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았다.

뤼순은 원래 청나라 북양함대가 주둔하던 전략적 요충지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점령했다. 그러나 주변 열강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의 결과로, 뤼순은 러시아 조차지가 된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자신이 점령한 땅을 강대국의 간섭으로 도로 토해냈던 일본은 악에 받쳤다. 뤼순은 처절한 전쟁터가 된다. 결국 뤼순은 일본 점령지가 된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본은 군국주의로 폭주한다. 뤼순 공방전이 20세기 역사를 바꿨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안 의사가 수감 생활을 한 뤼순은 제국주의 열강이 무력으로 서로 빼앗던 곳이다. 안 의사는 거기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다 사형 당했다. 전쟁의 땅에서 평화를 구상한 것이다. 법정에서, 그리고 <동양평화론>에서 '만국공법의 준수'를 주장했던 안 의사는 이런 상징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뤼순의 역사를 조금 길게 적었다. 다시 박 대통령의 연설문으로 돌아가자. 뤼순과 하얼빈을 헷갈린 건, 가벼운 숫자 착오 또는 오탈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20세기 역사에게 관심이 있다면, 쉽게 잡아낼 수 있는 실수다. 실제로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연설문이 발표되자마자, 누리꾼들이 착오를 지적했다.

"연설 직전에 문구 집어 넣은 듯"

이런 실수가 왜 나왔을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연설문을 담당했던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은 당시 <한겨레>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 직전에 다급하게 그 문구를 집어넣은 경우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선) 광복절 경축사 같은 중요한 연설의 경우,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독회가 10여 차례 열렸다. 그런 독회에는 모든 수석비서관이 참석한다. 독회 전에 수석비서관에게 연설문 초안이 돌고 수석비서관은 다시 같이 일하는 비서관들에게 내려 보내 연설문의 문제점이나 개선안을 내놓으라고 지시한다. 각 수석비서관이 그걸 취합해서 독회에 나와 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연설문을 미리 보는 사람이 수십 명이고 그걸 10여 차례 거듭하니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어긋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써준 대로 읽는 느낌"외부 개입 가능성


정권이 바뀌었지만, 업무 방식은 비슷할 게다. 따라서 뤼순과 하얼빈을 헷갈린 문구가 연설문 초안에 있었다면, 수십 명이 읽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교정됐을 게다. 그러니까 연설 직전에 다급하게 문구를 넣었다는 말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직접 원고를 손질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개입한 걸까.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인 강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문에 대해 "본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냥 써준 대로 읽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를 참고하면, 전자(前者)는 가능성이 낮다. 그렇다면, 청와대 외부 인사가 연설문을 손질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2013년 광복절 연설문, '위서' 인용

수상쩍은 구석은 계속 나온다. 이번엔 박 대통령 취임 첫 해인 지난 2013년 광복절 연설문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환단고기>의 한 대목이다. 우리 민족이 인류 문명사의 새벽을 열었으며, 유라시아를 사실상 지배했었다는 내용을 담은 상고사 서적이 <환단고기>다. 역사학자들은 이 책이 20세기에 쓰여진 '위서(僞書)'라고 본다. '남녀평권(男女平權)' 등 근대적인 용어가 책 안에 있다는 점이 주요 근거다.

취임 첫 해의 광복절 연설문. 당연히 전문가의 검토를 거쳤을 게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위서'로 규정한 책에 있는 문구를 그대로 옮긴 대목이 있다. 왜 그랬을까. 역시 외부 인사 개입을 의심하게 된다. 연설문 발표 직전에, 누군가가 연설문을 손질했을 가능성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가 단순한 실수라고 보지 않는다. 현 정부 들어, 이른바 '유사 역사학' 진영의 목소리가 유독 높아졌다. 정부 정책에 영향을 준다. 사실(史實, 역사적인 사실(事實))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을 담은 걸 '유사 역사학'이라고 한다. <환단고기> 류의 책이 대표적이다.

"<환단고기> 식 역사관, 권력과 연결되는 조짐"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가 최근 공동으로 '고고학·역사학협의회 제1차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도 그래서다. 지난 8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하일식 연세대학교 교수는 "'위대한 상고사' 주장 등 유사 역사학이 권력과 연결되는 조짐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교육부의 연구비 지원,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 특위'의 활동 등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유사 역사학에 공적 지위를 부여해 왔다는 게다. 또 2008년부터 45억여 원을 들여 추진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이 최근 무산된 배경에도 유사 역사학 진영의 활동이 있다고 했다.

하 교수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같은 지적을 했었다. '위대한 상고사' 등을 강조하는 논리는, 그저 '사실(史實)'과 다르다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과거 군사정부는 <환단고기> 유행 등을 종종 악용했다. 하 교수는 199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다물민족연구소를 예로 들었다. 이 연구소는 대기업 사원 연수를 종종 진행했는데, 애국주의 선동으로 일체감을 조성하곤 했다. 과거의 영광을 찬양할 뿐, 현실의 모순에는 눈을 감게 하는 효과가 있다.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강조했던 독일 나치의 행태와도 닮았다. 과거의 영광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넓은 영토 및 강한 군사력을 내세우는 논리는, '강자 숭배'와도 통한다. 기득권 세력에게 복무하는 입장이다.

<환단고기>를 인용한 박 대통령의 2013년 광복절 연설문이 중요한 징후였다는 게 하 교수의 지적이다.

누가 대통령 연설문에 개입했을까

대통령은 생각하고 말하는 게 일이다. 아무도 대통령에게 농사를 지으라거나 기계를 고치라고 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오로지 말로 설득하고, 위로하고, 논박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말이, 하필 가장 상징성 깊은 광복절 연설문이 연거푸 이상했다.

왜 그럴까. 누가 대통령의 연설문에 개입하는 걸까. 근현대사에는 무지하고, 고대사에 대해선 '유사 역사학' 논리를 신봉하는 개인 또는 세력일 수 있다. 2013년과 2016년 광복절 연설문을 보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박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문에도 흔적을 남긴 '유사 역사학'은 나름의 뿌리가 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안호상 박사의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 박사는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 나치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제안한 '일민주의', '학도 호국단' 등에도 그 흔적이 있다. 그는 기존 역사학자들을 비난하면서 '한민족의 영광'을 강조했다.

유신, 역사 교과서 국정화, 역사 파시즘

<역사비평> 2016년 봄호에서 기경량 강원대학교 강사는 "안호상이 왜 197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게 1972년이다. 이듬해인 1973년, 박정희 정부는 검인정 방식이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에도 역사학자들이 격렬히 반대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 안호상 박사가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기존 역사학자들을 격렬히 비판했다. 예컨대 당시 출간된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단군 왕검은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안 박사는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자 숭배해야 할 존재"라면서 교과서를 저술한 역사학자들을 비난했다.

기 강사가 보기에,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면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박정희 정부의 조치는 안 박사에게 일종의 신호가 됐다. 파시스트의 세계관을 전달해도 된다는 신호 말이다.

5.16 쿠데타 주역과 <환단고기>

이런 흐름은 다양하게 변주됐고, 1980년대 들어 폭발적인 유행을 낳는다. <환단고기>가 처음 세상에 소개된 게 1979년이다. 이후 일본의 극우 저술가인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어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임승국 씨 등이 그걸 다시 한국어로 옮겨서 출간했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전두환 정부도 힘을 보탰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재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일만 년 새 역사, 웅비하는 한민족>이라는 제목이다. 다물민족연구소를 설립한 강기준 씨도 전두환 정부 시절 보안사령부 정보처에서 근무했었다. <환단고기>와 일본 극우 저술가가 관련이 있다는 게 얼핏 이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만들어진 한국사> 저자인 이문영 씨는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연장선으로 설명했다.

<환단고기> 유행에 불을 지핀 또 다른 인물이 박창암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의 활동 가운데 하나는 조선인 독립군 토벌이었다. 박창암은 해방 이후 육군 장교가 됐고, 한국전쟁 당시엔 대북 심리전에 참가했다.

역시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주도한 5.16 쿠데타에 박창암은 적극 가담했다. 쿠데타 직후엔 혁명 검찰부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쿠데타 세력 내부 갈등으로 권력에서 밀려난다. 그 뒤, 유사 역사학에 관심을 뒀다. <신동아> 2007년 10월호에 따르면, <환단고기>를 가지마 노보루에게 소개한 사람도 박창암이다. 이후 그는 <자유> 등을 발행하면서 극단적인 국수주의 논리를 전파한다.

아울러 이런 유사 역사학 논리는 1970~80년대에 생겨난 신흥 종교 및 정신 수련 단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이런 단체에 가면, <환단고기>와 비슷한 주장을 듣는다.

최태민의 딸은 대통령의 말에 어떤 영향 미쳤나

2013년 광복절 연설문은, 이런 흐름이 박 대통령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리고 최태민 목사의 딸인 최순실 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유사 역사학 논리와 대통령을 잇는 고리가 최 씨였던 걸까. 그가 대통령의 생각과 말에 남긴 흔적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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