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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남기에 사망 선언한 레지던트 K 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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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남기에 사망 선언한 레지던트 K 님께

[민교협의 정치시평] 두 개의 존엄

궁금했어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유족들에게 굳이 남긴 이유가 뭘까? '제 이름으로 진단서가 나가지만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저에게 권한이 없습니다. 부원장과 주치의가 협의한 대로 써야 합니다.'

더 궁금했어요. '잠수'를 타기로 마음먹고 남긴 메모에 '진실만을 깨달으려 하세요.'라고 적은 이유가 뭘까? 아무 말 없이 사라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당신은 굳이 흔적을 남겼더군요.

어쩌면 317일 동안 당신도 백남기 어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의 사투를 지켜보았을 거고, 눈물 흘리는 가족들에게 말없이 응원의 눈길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진실만을 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는 당신이 남긴 흔적을 보며 존엄성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하나의 존엄성은 다른 분들이 많이 애도하는 고(故) 백남기 어른과 그 가족들의 존엄성입니다. 존엄성이란 게 정의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 도리어 각각의 상황을 갖고 생각하는 게 좀 더 나을 거 같군요. 알다시피 지금 백남기 어른과 가족의 존엄성은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고이 보내드리고 싶어합니다. 잠시만 상상해 봐도, 그 동안 백남기 어른의 부인이 어떻게 병상을 지켰을지, 두 딸 도라지와 민주화 씨는 어땠을지. 당신은 가까이에서 직접 보았겠지요? 무탈하게 농사짓던 사람이 물대포를 맞고 순식간에 죽음의 몸으로 바뀌었을 때, 그분의 부인과 자식들이 어떤 마음으로 몇 백 개의 밤과 낮을 보냈는지. 의식 없는 아버지의 손을 주무르고, 젖은 수건으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고는, 이내 어두운 병실 복도 구석으로 물러나와 초점 잃고 앉아있었을 딸들을요. 기자회견장 말구요, 집회 현장의 단상 말구요. 아버지를 잃었는데도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로 조롱당할 때에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눈물로 타이르는 모습을요. 당신이 어디에 있건 이 분들의 짓밟힌 존엄성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당신의 존엄성입니다. 지금 당신은 어딘가에 몸과 마음을 내동댕이쳐 놓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누군가에게서 '괜한 소리를 해서 문제를 꼬이게 만들었다'고 타박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이 모래알 같을 거고 넘기는 물이 독약 같겠지요. 온통 검게 변한 미래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난 몇 주가 악몽처럼 느껴지겠지요. 모든 일이 후회가 되고, 시시때때로 화가 치밀어 오를 겁니다. 술 없이는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겠지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내일이 두려울 겁니다.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을 테지요. 살면서 내 뜻과 정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내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걸 배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외과 의사들에겐 환자에게 처음 메스를 댈 때가 아니라, 유가족에게 첫 사망선고를 내릴 때가 가장 두렵다면서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의사에게만 있다더군요. 제일 먼저 달려온 소방관도 경찰관도 검사도 가족도 아닌, 오직 의사만이 한 생명의 숨이 멎었음을 선언할 수 있다면서요. 그게 얼마나 두려운 일일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망 선언을 자주 한다고 해도 하나의 우주가 사라졌다는 걸 확인시킨다는 게, 내 선언으로 가족이 주저앉아 버린다는 게 자연인으로서 어찌 감당하기 쉬운 일이겠어요. 엄숙한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때 당신은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갈등했을 겁니다. 조직의 명령 앞에 힘없는 개인으로 흔들렸을 겁니다. '이 분의 죽음은 외인사인데 병사로 쓰라는 명령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명령을 지킬 건가, 의사의 양심을 지킬 건가. 엄격한 조직 안에 있는 사람이 명령을 어겼을 때 예상되는 상황은 비슷하죠. 엄청난 질타와 배제, 권리 박탈!

ⓒ프레시안(최형락)

저는 공부를 하면서 '왜?'라는 질문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참 어렵기 때문이죠. 답의 폭을 좁힐 뿐더러, 한계 있는 인간이 답할 수 있는 여지도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비겁한 타협입니다만, '어떻게?' 정도의 질문을 하게 되었죠. 연인과 헤어진 친구에게 '왜 헤어졌어?'라고 물으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딴 사람이 생겨서'처럼 뻔한 답만 돌아오죠. 그런데 '어떻게?'란 질문을 하면 시간의 두께를 묻게 되더군요. '어쩌다 그렇게 됐어?'란 질문이랑 비슷하잖아요. '어쩌다 헤어졌어?', 이러면 한 시간도, 아니 밤이 새도록 얘기하게 되잖아요. 시간의 두께에 쌓인 일들이, 회한들이 줄줄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당신은 어쩌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게 됐나요? 딴 사람들은 당신의 말에 '면피용이다', '자기 알리바이 때문이다'라 얘기하겠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길고양이도 알 수 있을 외인사를 병사라고 쓰게 되었을 때, 그 사이에 있을 많은 말들, 사건들, 압박들, 번민들이 그저 면피용이나 알리바이 때문이라니요. 알리바이는 당신이 그냥 말없이 '병사'라고 써도 충분히 성립하거든요. 소리 없이 연락두절이 되어도 충분하거든요. 설마 당신의 선생 주치의가 당신한테 모든 걸 떠넘기진 않았을 테니까요. 기자회견장이나 국감에 나온 당신의 주치의가 보인 태도를 보니, 당신이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어도 '당당히'(아, 이 말이 그분께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네요.) 당신을 방어해줬을 거예요. 아마 그분은 모처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고민과 계산을 했겠지만, 당신의 고민은 매우 단순했을 거예요.

저는 지금 당신이 존엄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봅니다. 의사라는 '삶의 방식'에 따라 타인의 삶(/죽음)에 개입하여 정직하게 죽음을 선언하는 게 당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잖아요. 그것이 가족에게도 삶(/죽음)의 존엄성을 지켜드리고 당신의 존엄성도 지키는 일인데, 그것을 타인이 박탈해 버렸습니다.

어느 책에서 저자가 이런 경험을 적었더군요.

여행을 하다가 어느 장터에 들르게 된 나는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라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힘센 사내가 난쟁이를 들어 올리더니 온 힘을 다해 힘껏 던져 물렁물렁한 매트리스 위에 패대기를 치는 것이었다. 난쟁이는 패드와 손잡이가 달린 보호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모여든 군중은 난쟁이가 던져질 때마다 매번 즐겁게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그날의 기록은 4미터였다. 나는 그 난쟁이가 난쟁이 멀리 던지기 세계 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람을 멀리 던지는 세계 대회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집에 돌아온 나는 최고법원 차원에서 이 경기를 다룬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대법원은 난쟁이 던지기 대회를 금지시켰고 유엔에서는 항소심을 기각했다. 사유는 두 기관 모두가 같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피터 비에리(2014), <삶의 격>, 27쪽.)

저자는 이런 해설을 붙입니다. '난쟁이 던지기는 투포환 경기나 망치 멀리 던지기 같은 것이다. 사람이 뭔가를 던지기 위해서는 쇠공이나 망치처럼 부피와 무게를 지닌 물건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난쟁이를 던질 때도 다르지 않다. 난쟁이는 더도 덜도 아닌 덩어리, 즉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사람을 던질 때 그 사람에게서 존엄성이 박탈되는 이유는 그도 하나의 주체라는 점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물체, 물건으로 격하되고 이러한 인격의 물화(物化)에 바로 존엄성의 상실이 있는 것이다.'

당신도 원치 않았듯이, 모든 사람은 타인에게 단순히 '이용당하는' 존재가 되길 원치 않습니다. 누구든 타인이 정해놓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물건)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어둠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용당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누군가가 당신을 난쟁이 취급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빼앗긴 존엄성을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존엄성을 가진 인간은 언제나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은 자책이나 너무 많은 걱정 하지 마세요. 어느 시인의 말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아, 세상의 모든 눈을 다 맞을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살 수는 없다
(황인숙, <세상의 모든 아침> 중에서)

다른 거 생각 말고, 당신의 눈을 맞으세요. 당신의 시간을 사세요. 그러기 위해 어디서 용기를 얻어야 할지는 당신이 스스로 찾아야 할 거 같네요. 그게 삶이므로.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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