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뜻 이어받아,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20분이 지나 1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의 허리를 향해, 1500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중앙극장 방면과 대한극장 방면, 그리고 스카라 극장 삼거리 길의 모든 방면에서 페퍼포그(pepper fog, 시위 진압용 가스 분사기)를 앞세운 채 10분 남짓 한 시간 동안 946발의 최루탄을 쏘며 포위해 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삼거리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당황한 시위대는 다섯 개밖에 없는 충무로의 좁은 골목들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한극장 건너편 진양상가 아랫길, 중간에서 서 있던 봉고차에 걸려 도망가던 시위대가 쓰러졌고, 이어 200여 명의 사람들이 줄줄이 넘어졌습니다. 골목의 퇴로를 가로막고 있던 백골단이 넘어진 시위대를 U자로 포위하고 넘어진 사람들의 머리 위로 최루탄과 사과탄을 던지면서 방패와 곤봉으로 마구잡이로 가격했습니다.
"살려 달라"는 비명이 몇 겹으로 쓰러져 있던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습니다. 이에 전혀 아랑곳함이 없는 백골단 몇몇이 넘어진 사람들 위를 군홧발로 뛰어다니며, 새어나오던 비명마저 진압봉으로 틀어막았습니다. 머리 위로, 등 위로 휘둘러지는 진압봉을 피하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는 시위대의 옷에 묻어 있던 최루탄 가루가 풀풀 날리며 숨 쉴 공간조차 박했던 사람들 사이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면서 질식할 것 같던 사람 더미를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투쟁가인 '참교육의 함성으로'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한 고 3학생이었던 권혜진은 사경을 경험하고 난 뒤, 전경들의 방패 앞에 멍하니 주저앉아 멍하니 아수라(阿修羅) 같은 장면을 바라봤습니다. 이 장면이 '현장인물 1'이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그는 전경이 진압봉으로 머리를 가격하는데도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말로 사진 밖에서 그가 느꼈던 충격들을 돌이켜 주었습니다.
당시 서강대 신입생이었던 채수진은 최루탄에 오른쪽 목 부위를 맞아 피를 흘리며 달리다가, 사람들에 깔려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나 보다' 하는 평온한 마음이 드는 순간 피가 티셔츠에 묻어서였는지, 동기 남학생들이 깔렸던 그녀의 어깻죽지를 끌어 훅하고 빼내 주었습니다. 그녀는 을지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기던 순간 다른 학교의 여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만 살았구나.' 그녀는 아직도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을 가면 공포감에 사로잡힙니다. 다음 날 찾아온 대책위 편에, 그녀가 쓰러졌던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여학생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대생 김귀정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증언하기를, 한 여학생의 울부짖음이 쓰러진 사람들의 무더기를 찢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김귀정 씨의 목소리였는지는 아무도 확인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추스르기에도 버거웠던 상황에서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만이 그곳에 있었던 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을 터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간 거리에 반듯이 누워 있었고, 근처에서 구한 널빤지에 옮겨 <한겨레> 취재 차량의 힘을 빌려 백병원으로 향했지만, 그날로 숨을 거두었다 했습니다.
그날은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희생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2명의 대학생이 공권력의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잃었고, 한 명의 노동자가 의문사를 당했으며, 8명의 젊은이들이 살의 가득한 공권력에 저항하며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김귀정 씨는 그 시간 동안 목숨을 잃은 11번째 젊은이였습니다.
제가 만들고 있는 다큐멘터리 <강기훈 말고 강기타>는 1991년, 악몽 같던 그 시간에 살아남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날들의 기억들을 잊지 않고 있던 작가들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김귀정 씨가 죽던 날에 대한 기록만 해도, 작고한 소설가 김소진 씨가 백병원에서 김 씨의 차갑게 식은 몸을 지키는 사람들의 하룻밤 이야기로 써 내려갔던바 있습니다(소설 <열린사회와 그 적들>(문학동네 펴냄)). 과격한 시위와 언행만을 일삼는 '밥풀떼기'와 그들을 점잖은 소리로 계도하고 싶은 민주화 운동 세력 사이의 틈으로 파고들어 간 영민하고 우직한 글이었습니다.
가장 모멸스러운 시간을 살아 견뎌야 했던 한 사람인 강기훈 씨는 당시 '죽은 사람들의 배후'라는 오명으로 24년을 살았습니다. 분신자살을 한 동료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신 써 줬다는 혐의는 1년 전 재심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비로소 삶을 되찾는 시작이었을 그 순간 그의 몸에는 암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위해 곁을 내주었던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를 위해 기타를 연주했습니다. 원래 극영화였던 이 프로젝트가 다큐멘터리로 변한 이유는 동네 밥집에서 열렸던, 그 소박한 첫 연주회를 기록했던 이가 저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어떻게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들을 받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날들로 인해 제 삶은 답이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차 버렸기 때문이라고, 투덜거리고말고 싶은 충동이 스멀거렸습니다. 그저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의 실체를 마주하면, 그 어두운 질문들에 내린 마음의 닻줄을 끊어 버릴 수는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을 뿐이라고 답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는지, 그날 죽은 사람들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이 모든 비극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며 '절대 악'처럼 비치는 소시오패스의 카르텔을 벌할 수만 있다면 반복을 멈출지. 약자를 향한 노골적인 혐오와 배제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횡행하는 것은 사람 그 자체의 존재적 한계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허언들을 여전히 믿고 살아야 하는지.
그중에서도 이 모든 질문들 너머 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 영화를 시작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지난겨울 물대포에 쓰러져 고인이 된 백남기 농민의 아내 박경숙 씨가 청문회(9월 12일)에서 '그저 인명에 대한 존중을 바랄 뿐'이라며, 미안함 없는 경찰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표하는 장면을 인터넷의 동영상으로 흘깃거렸습니다.
이런 현실에 나동그라지면, 그렇게 쓰러진 내 몸의 무게에 또 누군가 눌리지는 않을까. 살려고 발버둥치다 무심코 밟아 버린 또 누군가가 삶을 잃게 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미 나는 그런 삶을 충분히 살아온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저 이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들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전업 작가가 아니라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쉬이 밥벌이를 놓을 용기는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보니 촬영감독과 프로듀서 그리고 편집감독님까지 많은 도움을 받으며 제작 과정을 버텨 나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미래가 막막하게 느껴지던 지난봄, 저는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에 연재 글을 올렸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10통의 편지글처럼 연재했습니다. 그저 서툰 작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이야기가 묻혀 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91일간 1200명이 넘는 후원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쇄도했습니다. <한겨레>, <민중의 소리>, <노컷뉴스> 그리고 부천영화제가 이 보잘것없는 영화의 제작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제 확인한 통장에는 세금을 포함한 이런저런 경비를 제외한 3300여만 원의 후원금이 들어와 있습니다.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바라는 시민모임'과 서울영상위로 받았던 지원금을 합한다면 독립 다큐로는 결코 적은 제작비라고 할 수 없지만, 단관 개봉만 해도 대박이라는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같은 독립영화의 운명을 피해 가기 쉽지 않음은 여전한 현실입니다.(☞ 바로 가기)
그 돈으로 시간을 사서 더 단단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올여름에 마무리하고자 했던 것을 내년 2월까지로 늘렸습니다. 그저 아침까지는 얼지 않고 맺혀 있기를…. 너무 센 낮의 햇볕이 말라 버리지 않기를…. 목마른 누군가의 목을 축일 수 있기만을 바라면서 말이죠.
2년 전 벚꽃 피던 4월 다큐 제작을 결정하고 촬영을 시작한 첫날은 그가 무죄를 받을 때까지 곁을 내주었던 사람들에게 두 번째로 기타 연주를 들려주려던 날이었고, 또 그날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다음 날이었습니다. 협연을 준비하던 다른 연주자들과 이 연주회를 진행해야 하는 것인지를 깊이 논의하던 그의 결정은 그래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강기훈 씨는 알프스를 넘고 있습니다. 2시간 이상의 비행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는데, 건강한 사람도 지키기 힘든 그의 버킷리스트 목록은 불가능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는 듯 하나씩 하나씩 지워지고 있습니다.
김귀정 씨가 자주 다녔다는 성균관대 앞 '논장서점'과 지하 카페 '메카'는 사라졌지만, 저는 그 모든 기억이 스며든 지금 이곳에서의 의미는 그의 기타 연주라는 실로 잇기 위해 서툰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 벚꽃 피는 계절에 많은 분을 찾아가겠습니다. 제작이 끝날 때까지 함께 애써 주시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이메일 주소는 etoilenoir@daum.ne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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