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 일컬어졌던 여당 대표의 단식 농성은 7일 만에 끝났다. 청와대 정무수석이 두 번씩이나 방문해 대통령의 걱정을 전했고, 동료 의원은 동조 단식까지 하며 대표의 건강과 의지에 대한 격한 공감을 표했다. 현대 한국 정치사에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이 워낙 많았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역시 "국회의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나는 죽을 것"이라 소리 높여 공언했기에 그의 단식을 걱정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이 대표는 단식 시작 며칠 만에 극심한 복통을 호소했고, 휠체어 없인 이동조차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가 느끼는 단식의 고통은 그 이전 어떤 단식 투쟁의 경우보다 극심한 듯 보였다. 대표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이 하필 국정 감사 기간 동안 이뤄졌기에, 새누리당 의원은 국정 감사에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감 기관에 대한 날카로운 질의와 준열한 호통, 집요한 문제 제기와 구체적 대안 제시를 통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선량으로서의 역량을 뽐낼 것을 기대할 게재가 아니었다. 언론 보도를 활용해 국감 자료를 적당히 풀어내는 정도는 괜찮지만, 국감장에 홀로 앉는 것은 '당론 위배'이자 '동료 배신'으로 격렬히 지탄받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국정 감사 기간에는 '당'보다 '방'이 우선한다. 당론에 메여 국회의원이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꺾는 경우가 워낙 잦다 보니 우리나라 정당의 규율이 강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의원은 자신의 재(차당)선에 모든 것을 건다. 보좌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국정 감사는 의원에 대한 평가 기간이며, 의원에 의한 평가 기간이기도 하다.
국정 감사 시작 대략 일주일 전부터 의원실은 국감 관련 보도 자료를 경쟁적으로 내기 시작한다. 국감이 시작되면 하루 수백 개씩 보도 자료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국감장에서 이뤄지는 증인 심문은 국회의원이 대중, 특히 지역구 유권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다. 말 그대로 '국감 스타'가 탄생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상임위 소속 의원은, 설령 같은 당이라 하더라도 '협력'보다 '경쟁'의 관계가 되기 일쑤다. 국감 직후 냉엄한 평가와 냉정한 처분을 기다리는 보좌진들은 더욱 그렇다(지금까지 국감 최고의 스타는 새누리당 이은재 의원이다. 언론의 주목과 국민적 관심을 그 정도로 독점하기란 쉽지 않다. 국감 최고 스타가 된 이은재 의원이 자신의 보좌진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국감 직전 보좌진은 상임위원회별 부처 업무 보고를 받는다. 공무원은 이를 귀찮아하기도 하지만, 보좌진이 관심을 갖는 사안이나 국감에 임하는 분위기를 파악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다. 보좌진은 국감 전에 미리 상임위별 공동 전략을 짜기도 하고, 자료 요구에 관한 정보도 공유한다. 하지만 '얕은 협력' 이상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의원실 사이의 '깊은 협력'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번 국감 최대 쟁점인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의혹, 백남기 선생 사망과 부검, 우병우 민정수석 수사, 사드 배치, 지진 대처, 조선·해운업 부실 등도 의원실 간 전략적 협력보다는 의원실별 개별적 노력에 의해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국감에서 다루는 사안 중에 개별 의원실이나 상임위원회에서 다뤄서는 불충분한 것도 많다. 그런 경우엔 여러 의원실과 상임위원회에서 자료 요구와 문제 제기, 증인 심문과 대안 제시를 함께 해야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깊은 협력'은 쉽게 엄두내기 어려운 게 의원회관의 현실이다. 더욱이 '최순실'과 '차은택' 등이 등장하는 권력형 사건이 국정 감사 직전에 터지면 관련 상임위원회와 의원실은 다른 데 돌아볼 여유 없이 거기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원회관에서는 '깊은 협력'의 사례가 하나씩 만들어져 가고 있다.
지난 9월 5일, 국회 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는 피감 기관 업무 보고도 아닌데 40명가량의 보좌진이 모였다. 국감 직전의 바쁜 일정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 장면이었다. 그것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준비한 '2016년 국정 감사 공동 대응 워크숍' 때문이었다. 공공 기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공동 대응 주제로 결정되었지만, 각자 알아서 열심히 하자는 정도로는 모자란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회의실에선 을지로위원회 담당이거나 관련 주제를 다루는 보좌진들을 대상으로 한 베테랑 보좌관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주제 선정의 이유는 무엇인지, 자료 요구는 어느 기관에, 어떻게 할 것인지, 제출받은 자료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 당 사무국과 의원실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국감 시작 직전 9월 20일, 이번에는 국회의원이 모였다. 57명의 을지로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기자 회견을 열고 이번 국감에서의 공동 대응 계획과 포부를 밝혔다. '깊은 협력'의 시작이 선포된 것이다. 10월 7일 하루에만도 농협 비정규직 차별 대우(농해수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비정규직 감축 미흡(정무위), 경북대병원 비정규직 해고 사태와 고용노동부 취업 성공 패키지 사업 문제점(환노위) 등이 한꺼번에 다뤄졌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공동 대응'의 성과인 셈이다.
국정 감사에서 다뤄지는 사안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20대 첫 국감에서 을지로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공동 대응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 기관 비정규직 문제라는 의제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이은재 의원처럼 '혼자' 빛나는 국감 스타도 좋지만 상임위원회와 의원실을 넘나들며 '함께' 노력한 공동의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 '국정 감사의 진화'이다. 정당과 의원실, 그리고 의원실 사이의 '깊은 협력'은 입법부의 위상을 높이는 소중한 집단적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반대로 국민적 의혹 해소와 국가적 중대사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증인 출석마저 거부하는 여당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감 시작 때는 '목숨을 건 대표의 단식'을 이유로 국회의원의 국감 참석이 불허되었다. 막상 국감 재개 후에는 안건 조정 심의 신청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어 최순실, 차은택, 최경희 등 주요 증인의 국감 출석이 불가하게 되었다. 피감 기관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태도는 당연한 결과이다. 이는 분명 '국정 감사의 퇴화'이며 입법부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서 을지로위원회가 내건 '을을 위한 정치'에 주목하는 다른 계기는 역설적으로 새누리당이 제공했다. 김재수 농림부장관 해임 건의안 처리와 국감 파행 과정에서 새누리당 지도부는 "정치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장관들에게 저녁 먹을 시간 주지 않는다며, 이를 '의회 독재'라 소리 높여 비난했던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절규를 잊을 수 없다.
그간 을지로위원회 역시 "정치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일관되게 주창해 왔다. 현장과 아래로 향하는 '을을 위한 정치'는 언제나 절실했지만, 정치적 주목과 위상은 절실함만큼 높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선 정치의 본질에 대한 여야 간의 '의외의 공감'이 만들어졌다. 그 최선두에 이정현 대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표는 단식을 시작하며 "의회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했다. 단식을 마친 후에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민생 국감에 최선을 다하라"고 요청했고,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링거를 맞으며 민생 행보를 재개했다. 20대 국회 첫 국감에서 다뤄야 하는 '사람의 목숨(民生)'에 관한 이슈는 다른 어떤 국감 때보다 많다. 그런데 아직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링거 투혼을 불사하는 이 대표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결국 새누리당 의원들이 당대표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이건 그래서는 안 된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맹성(猛省)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정현 대표가 국감 거부와 연계했던 '자기 목숨을 건 정치'는 일주일 만에 허망하게 끝났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국감 복귀 일성으로 내놓은 '사람 목숨(民生)에 관한 정치'에 대한 약속은 진정으로 지켜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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