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담보로 한 협박에 넘어가 결국 일가족, 아니 두 집안 식구가 하루아침에 몽땅 간첩이 되어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 씨, 진 씨 두 가족의 기막힌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30년, '조작 간첩' 인생의 기록
(전편에 이어서)
김태룡 씨와 진창식 씨는 체포된 지 19년 2개월 만인 1998년에야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으로 복역한 이들 가운데 사형당한 두 명을 제외하면 마지막 출소자들이었습니다.
기약 없는 무기수에서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들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냥 '나왔나 보다' 했어요. 거처랄 것도 없고, 집안은 쑥대밭이 돼 의지할 곳도 없으니 그저 비참하고 처량할 뿐이었습니다. 해방이 되면 만세라도 부르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텐데, 저는 그런 심정이 아니었습니다."
무기수에 간첩 낙인이 찍혔으니 취직이 쉬울 리 없었습니다. 태룡 씨는 예전엔 돈도 꽤 잘 벌어 1970년대 후반에 부자들만 산다는 서울 아파트 분양권까지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거 이야기였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용직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뿐이었습니다. 오토바이 택배, 건설 현장 막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했습니다.
가족 간 불화도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살아온 세월을 들어보니 어마어마하게 고생을 했더라고요. '간첩 아내'라니까 친정에선 호적 파라고 난리고,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스트레스로 원형탈모도 오고. 그래도 어린 아들 키우려고 아등바등 살아왔더라고요. 그 사람은 예전에 내가 능력이 있었으니, 출소하면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나왔는데 예전 같은 능력이 없다 보니까 아내 입장에선 실망이 엄청난 겁니다."
먹고살 길이 없는 태룡 씨 내외는 하는 수 없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기로 했습니다. 부양의무자가 있을 경우 수급 대상자 대상이 될 수 없어 결국 합의 이혼까지 했습니다.
창식 씨네 가정도 멀쩡할 리 없었습니다. 창식 씨가 끌려간 후부터 그의 아내는 식모살이, 파출부부터 한복집, 수선집 운영까지 두 아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형기가 8, 9개월밖에 안 남았을 때였는데 차장검사라는 사람이 와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 사회에 나가서 착실히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면 빨리 내보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거의 20년 만기 채워서 나오는데 왜 서약서까지 써야 하나 해서 안 쓰려다가, 아이들 얼굴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썼어요."
불행한 이들 인생에도 한 가지 낙이 있었습니다. 체포 당시 어린 아이였던 태룡 씨의 외동아들과 창식 씨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오랜 복역에도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준 것입니다.
"아들이 저를 불신하지 않는 것, 그 이상 고마운 게 없어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틴 건 나를 믿어주는 우리 아들 덕분입니다."
간첩 누명은 여전히 시시때때로 그들을 옥죕니다. 이들은 정부의 관찰 보호 대상자입니다. 어딜 가든, 누구와 이야기하든 국가는 이들의 행적을 좇습니다. 태룡 씨는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왔을 뿐"이라며 "지금 삶도 저에겐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누명을 쓰는 과정에서 당한 고문은 신체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태룡 씨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던 중 방망이로 귀를 맞은 탓에 한쪽 귀를 쓸 수 없게 됐습니다.
"삼척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사람들이 우리 동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러더라고요. '여기 간첩 마을'이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정말 가슴이 찢어지더라고요."
금전적 피해도 적지 않습니다. 창식 씨는 과거 전력으로 인해 국가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해 수술비 지원을 받지 못 했습니다.
"한 5년 전쯤 어장에 나갔는데 식은땀이 나고 숨이 차더라고요. 베트남 파병 갔다 온 사람이 나이 먹어서 고엽제 관련 질병에 걸리면 소위 말해 국가유공자가 되는 걸 알고 있어서 혹시나 해서 병원에 갔습니다. 진료를 해보니 고엽제 질병인 어혈성 심장 질환이고, 심장에 들어가는 피가 90%가 막힌다고 하더라고요. 보통은 60%가 넘으면 국가유공자가 되는데 난 90%였으니 아주 중증인 셈이죠. 그래서 진단서를 들고 국가보훈처에 갔는데 저는 탈락이라고 하는 겁니다. 보훈처 보상법 가운데 실형 3년 이상 산 사람은 해당 사항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는 거죠.고엽제 피해에 대한 지원이랑 제 간첩 전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진창식은 간첩"이라던 지인의 실토 "수사관이 쓰라고 해서..."
간첩 누명은 평생 짊어질 짐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에게 명예 회복의 기회가 왔습니다. 노무현 정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조작 간첩 사건 연루자들이 과거의 억울함을 소명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영롱하리라는 생각을 못 해서, 처음엔 그런 걸 신청할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이 처음 찾아가서 재심을 신청했는데 기각당했습니다. 다시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번엔 또 서류를 누락시키는 바람에 기간이 지나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이의 신청을 해서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증언이 나왔습니다. 당시 이들을 조사했던 대공분실 수사관이 직접 입을 연 것입니다.
신모 수사관은 이들을 구금한 과정에 관해 "당시 체포 영장이나 구속 영장을 발부받은 바 없다. 당시에는 국가보안법 혐의자에 대해서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검거하였다. 약 20일 정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오랫동안 구금한 이유는 한마디로 실적을 올리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조모 수사관 역시 "당시 국가보안법 혐의자에 대해서는 관행적으로 체포영장이나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검거했다"며 "조사가 길었던 것은 기억하는데 정확한 날짜는 잘 모르겠으나 약 한 달 반 정도 여관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과거 이들이 북한을 찬양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지인들도 과거사위 조사에서 뒤늦게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수사관의 강요에 의해 허위로 진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창식 씨의 지인 권모 씨는 과거, 수사관에게 "진창식이 '북한은 트랙터로 농사를 짓고 병원도 무료로 치료해주고 남한보다 살기가 좋다'고 말해 은밀히 북괴를 선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사위 조사에서 그는 "당시 경찰에서 조사를 받게 되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에 수사관이 그렇게 쓰라고 하여 쓴 것이고 법원 출석 역시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었는데, 검찰이나 공판 전 수사관이 '경찰에서 진술한 대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공판에서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고 사실대로 말하면 나에게 불이익이 생길 것 같아 사실이 아닌 진술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외 여러 증인들 또한 허위 진술한 사실을 밝혔습니다.
위원회는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을 재심 대상 판결로 판단했고, 이를 기초로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은 재심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2013년 4월, 태룡 씨의 누이 김순자 씨, 태룡 씨의 어머니 고(故) 김경옥, 창식 씨의 형수이자 진항식 씨의 아내인 윤정자에 대한 재심이 시작됐다. 법원은 이들이 압수, 수색 영장 없이 장기간 구금돼 가혹 행위 등으로 허위 진술을 강요받은 점에 주목했습니다.
"가혹 행위, 협박, 회유 등으로 인해 경찰 진술뿐만 아니라 검찰 및 원심 법정에서의 진술까지도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추단된다고 할 것인데, 그러한 임의성에 대한 의문점을 없애는 검사의 적극적인 입증이 없으므로 (중략)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 할 것이다."
2, 3심 모두 결과는 같았습니다. 무죄였습니다. 무려 34년 만에야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것이었습니다.
"피고인들이 과거 오래전 있었던 판결로 신체적·심적 어려움을 겪었던 시간들에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하며, 피고인과 가족들을 위로합니다."
재판장은 눈물짓는 피고인들을 향해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2014년 겨울, 태룡 씨와 창식 씨도 다시 재판장에 섰습니다. 이번 재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찰이 내놓은 태룡 씨와 창식 씨의 허위 자백은 법정에서 증거로서 힘을 잃었습니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저희 재판 1심에선 판사 세 분이 다 일어나 우리한테 '그동안 겪은 고통에 대해서 위로한다'고 절까지 하더라고요. 2심 재판부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이 판결로 마음의 안식을 찾기를 간곡히 기원한다'고 말했고요.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이 나고 찡했죠."
"사법부가 과거엔 비록 잔악무도한 일을 묵인한 채 검찰 공소 내용 그대로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지금이라도 과거 잘못된 부분에 대해 사과하는 걸 보고 감복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재판부가 존경스럽고, 아주 고마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법원 판결뿐입니다. 1, 2심에서 모두 무죄가 나왔지만, 대법원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완전히 누명을 벗은 게 아니라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3일, 김태룡 씨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습니다. 대법원 판결 날짜가 잡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인 23일입니다. 태룡 씨와 창식 씨의 두 가족은 그토록 고대하던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봅니다. 대법원에서 부디 인간의 양심을, 사실을 밝혀주리라 기대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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