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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해상비경, 거문도·백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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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최고의 해상비경, 거문도·백도 기행

2016년 11월 섬학교

포트 해밀턴, 영국이 부르던 여수 거문도의 옛 이름입니다. 이 땅에서 당구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은 거문도입니다. 당구 2000을 치는 할머니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합니다. 테니스가 처음 시작된 곳도 거문도지요.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까지 2년 남짓 거문도를 점령했던 영 제국주의 군대가 남기고 간 흔적들입니다. 거문도 장촌 해변에서는 기원전부터 사용된 중국 한나라 때 화폐 오수전이 다량 발견되기도 했었지요. 거문도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국제 해상세력이 탐내던 요충지였다는 증거들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53강은 11월 5(토)∼6(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여수의 섬 거문도로 떠납니다. 거문도 부근에는 또 한국에서 가장 빼어난 해상절경 중 하나인 백도가 있습니다. 신이 빚은 조각공원 같은 백도의 기암괴석들은 유람객들의 넋을 빼놓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거문도에 갔어도 백도를 보지 못했다면 거문도 여행은 안 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청보석처럼 푸른 거문도 바다Ⓒ섬학교

거문도의 가을은 또 은빛 갈치가 풍년입니다. 같은 갈치지만 제주보다 저렴하고 싱싱한 은갈치를 어판장에서 직접 사올 수도 있습니다. 90년 전에 일본인 여자 무역상이 지었다는 다다미방 민박집 창문으로 오가는 어선들을 바라보며 외세의 침탈과 함께한 거문도의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도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성급한 녀석들은 10월 말에 이미 개화를 시작하는 동백꽃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도 거문도입니다. 이쯤이면 늦가을 거문도에 가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환상처럼 펼쳐지는 해상비경 백도Ⓒ여수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인 <한국 최고의 해상비경 거문도·백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셋이면서 하나인 섬

여수에서 114킬로, 먼 바다로 나왔지만 거문도 내항 바다는 잔잔하다. 서도와 동도, 고도, 세 섬이 팔을 벌리고 서로를 품어 내해를 이루었다. 여객선은 고도 거문항에서 닻을 내린다. 고도의 거문항은 천연 방파제의 보호를 받는 천혜의 항구다. 거문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다. 동도와 서도, 고도 세 섬이 모여 거문도를 이룬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세 섬은 어깨 걸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낸다. 세 섬은 오로지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한 몸의 섬이다. 거문도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다.

거문도처럼 두세 개의 섬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제주의 추자도는 상추자·하추자, 통영의 사량도는 상도·하도, 두 개의 섬이 하나의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거문도는 서도가 그 중 크고 동도, 고도 순이다. 고도와 서도는 진즉에 다리로 이어졌고 서도와 동도는 2015년 다리로 연결됐다. 이제 하나로 연결된 진짜 한 몸통이 된 것이다. 거문도의 행정과 상업 중심지는 가장 작은 섬, 고도다. 고도리에 대부분의 민박, 횟집, 식당을 비롯해 면사무소와 파출소, 농·수협 등의 관공서가 몰려 있다.

작은 섬 고도가 거문도의 중심지가 된 것은 외세의 영향이 크다. 1885년부터 2년간 영국 군대의 거문도 무단 점령 때 영국군은 군대의 주둔을 위해 고도에 항만을 개발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행정의 중심이었던 고도는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이자 물류 중심지가 됐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거문도항에 내린 단체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서둘러 유람선으로 이동한다. 백도 유람을 목적으로 거문도를 찾은 관광객들. 여행사를 통해 온 단체 관광객들은 유람선을 타고 두 시간 남짓 39개의 바위섬, 백도를 구경한 뒤 거문리 포구로 돌아온다. 관광객들은 민박집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이면 거문도산 갈치와 학꽁치, 돌미역 등을 사들고 떠난다. 거문도는 백도 관광의 중간 기항지로 성업 중이다.

"도미는 양식은 색이 검고 자연산은 빨갛지"

거문도는 손죽도, 초도 등과 함께 112개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 섬이다. 삼산면의 인구 대부분이 거문도에 산다. 한때는 거문도에만 1만 3천의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삼산면 전체에 2,400여 명만 남았다.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사철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광업의 은덕이 거문도 전체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 땅 어디나 그렇다. 관광객이 몰려도 혜택은 일부 상업지역에 국한된다. 거문도 관광산업의 이익은 고스란히 여객선과 유람선 업자, 거문리 상인들 몫이다. 섬뿐이랴. 온 나라가 개발의 광풍에 휩싸여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개발 이익은 결국 소수의 것이다.

거문도는 갈치잡이의 메카다. 같은 바다에서 잡히는 갈치들이 거문도로 들어오면 거문도 갈치가 되고 제주로 가면 제주 갈치가 된다. 맛은 같다. 4월 중순이면 갈치 배들이 출항을 시작한다. 그때는 주로 제주 해역에서 갈치를 잡는다. 6월이면 갈치들이 거문도 해역으로 몰려드는데 더러는 선창가에서도 갈치를 낚을 수 있다. 갈치잡이는 10월에서 11월말까지 절정에 이르렀다 12월 초면 파장이다. 겨울부터 봄까지 판매되는 갈치는 가을에 잡아다 냉동 저장했던 것들이다. 생갈치 외에도 선창가에서 잘 팔리는 상품은 뼈를 발라 말린 풀치(갈치새끼)와 학꽁치포 등이다.

거문도 내해에는 가두리 양식장이 많다. 서도와 동도가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덕분에 양식이 가능하다. 가두리에서는 돔과 우럭, 문어, 전복 등이 길러진다. 횟집마다 자연산 회를 판매한다고 붙여 놓았지만 양식 물고기와 구별은 쉽지 않다. 거문리 포구 작은 슈퍼 앞 평상에 노인 두 분이 앉아 있다.

요즈음은 주민들도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기가 쉽지 않다 한다.
"고기가 옛날하고 틀려갖고. 옛날에는 더러 낚아다 묵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어장 배들이 싹쓸이 해빙께 낚어 묵도 못하요."

그렇다면 자연산만 판다는 거문리 횟집의 물고기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도미나 우럭 같은 것은 거의 다 양식이지. 자연산도 있지만 많진 않고. 그래도 여그 물이 워낙 깨끗하니까 싱싱하고 괜찮아요. 양식이라도."

노인은 양식과 자연산의 구별법을 알려준다.
"도미도 양식장에서 나온 건 깜장 색이 많고, 자연산은 암만해도 빨간색이 많이 돌지. 멍게같은 건 양식은 쓰디 써. 자연산은 달디단디."

노인은 공무원으로 일하다 10여 년 전에 퇴직했다. 며느리가 국수를 삶아놨다고 노인을 부른다. 노인은 배가 안 고프다며 나중에 먹겠다 한다. 며느리는 국수가 퍼질 것이 걱정이지만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국제해상교통의 요충지인 거문도등대Ⓒ섬학교

"그물로는 일체 고기를 못 잡게 해야 해"

거문리에 한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직후부터다. 일본인들이 살다 떠난 집들을 적산 불하받았다. 일본인들은 "얼마 있다가 곧 올 테니 잘 관리하고 있으라." 당부하고 떠났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거문리에는 아직도 일본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겉모양은 바뀌었어도 골조는 그대로다. <고도민박> 건물 또한 일식 목조건물이다. 건물은 나까끼지라는 일본 여인이 주인이었다. 그는 거문도의 어패류를 수집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중개상이었다.

"한 십 년 전만 해도 나까끼지 아주머니가 여길 찾아오곤 했는데, 자손들 데리고. 요즘엔 발 딱 끊어버렸네. 죽어 부렀는가 어쩐가."

거문리 부둣가에는 제법 큰 어선들이 수 십 척 정박해 있다. 어로를 준비하는 그물 손질이 바쁘다. 하지만 큰 어선들은 대부분 거문도 배가 아니다.

"저 배들은 거의 여수 같은 타지 배들이고 여기 배는 몇 척 안 되요. 사실은 요거이 새우 조망이라고 고대구리 저인망 단속을 심하게 하니까 새우조망 허가를 받아서 나오는 것인디. 허가 기간이라 해야 불과 이삼 개월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불법 조업이지. 다들 단속 대상이에요. 어떤 섬들은 주민들이 단합해 갖고 그물로는 일체 고기를 못 잡게 하고 낚시만 하게 한다든데. 그래야 어장도 살리고 바다도 보호되고 그럴 텐데 그게 잘 안 돼요."

해경이 단속을 하지만 어린 물고기까지 싹쓸이 하는 저인망 불법 어업의 근절은 쉽지가 않다.

"적발 돼봐야 몇 백 만원 벌금 내빌고 또 잡으면 금방 벌어 빌제. 그라이 고대구리가가 근절이 안 돼. 그러니 고기가 씨가 마르재."

어초를 심어 어장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도 있지만 노인은 성과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문도 어초 사업은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물속에 안 들어가 봤으니 알 수가 있나. 백 개를 넣는다고 해놓고 백 갤 넣는지 열 갤 넣는지. 거기다 어초 넣는 것도 순 엉터리야. 어디가 뻘 구석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우에서 쌔려 넣어버려. 거기가 고기가 살 만한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집어넣기만 하지."

어초를 넣어 물고기를 키워도 불법 조업을 하는 고대구리 배들이 어초 주위를 그물로 둘러싸서 싹쓸이 해가는 통에 남아나지 않는다. 게다가 찢겨진 그물이 어초에 쌓이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정부나 어민들만이 아니다. 노인은 낚시꾼들도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낚시꾼들이 쓰는 밑밥이 바다 속 백화 현상의 또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밑밥에 파우더 같은 걸 섞어 뿌리니 그게 방부제라 밑밥이 썩지도 않아. 해초가 없으면 고기는 살아진당가."

그렇다고 낚시꾼들이 찾아오는 것을 말릴 수도 없어 주민들끼리 밑밥 규제 논의가 있었다가 낚시 배 주인들의 반대로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즈그도 묵고 살라고 그라는디 어쩔 것이여. 한동안 대립이 되가지고 인심만 나빠지고."

어족이 고갈되면서 요즈음은 거문도를 찾는 낚시꾼들의 수도 많이 줄었다. 낚시꾼들은 가까운 바다가 죽으면 더 먼 무인도와 여 등을 찾아 나선다. 물고기가 떠난 바다는 적막하다. 죽어가는 바다를 보며 노인은 깊이 탄식한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밑밥을 안 넣어도 고기가 많이 물렸는데 요새는 밑밥을 주고 홀케도 고기가 없어. 나 살자고 후손의 바다 죽이는 일이요."

영국군 수병 묘지에서

거문도 파출소 뒤 해안 길을 따라 6백 여 미터를 가면 영국군 수병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화강암 비석과 나무 십자가, 두 개의 묘비가 서 있다. 이곳에 영국군 수병 셋이 누웠다. 화강암 묘비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인 1886년 6월 11일 폭탄 사고로 죽은 수병 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 십자가는 영국군이 물러간 후에 묻힌 영국군 병사의 묘다. 나무 십자가 묘지의 주인은 1903년 10월에 사망한 군함 알미욘 호의 수병 알렉스 우드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떠난 후에도 1930년대까지 항해 도중 이 섬을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1885년 4월,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핑계로 영국 내각은 중국 주둔 함대사령관 윌리암 도드웰 해군제독에게 거문도 점령 명령을 내렸다. 거문도 내해는 수심이 깊어 큰 군함의 정박이 가능하고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대피항이다. 게다가 대마도와 제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은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거문도는 오랫동안 영국과 러시아 두 제국이 눈독을 들였다.

1885년 4월 15일, 영국 군함과 수송선은 거문도를 점령한다. 영국제국주의 해군은 1887년 2월까지 거문도에 주둔한다. 이른바 '거문도사건'이다. 영 제국주의는 러시아 견제를 핑계로 거문도를 점령했지만 조선 영토를 식민화하려는 야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거문도가 점령당한 사실을 20여 일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40여 년 전에 이미 해군함정 사마랑호를 동원해 제주에서 거문도까지 해역을 한 달 여에 걸쳐 정밀 탐사한 바 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이었던 해밀턴의 이름을 따 거문도를 해밀턴항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거문도 점령 후 영국군대는 사람이 적게 살던 고도에 군대 막사를 짓고 항만 공사를 했다. 테니스 코트와 당구장 등도 이때 처음 거문도에 생겼다. 2년 동안 거문도 주민과 영국 점령군은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치료약을 공급하고 노임을 지불해 가며 공사 일을 시켰다. 섬 주민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 영국군의 유화 전략이었겠지만 조선 왕조 하에서 강제 부역에만 종사했던 섬 주민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겼다. 섬 주민들은 영국군과 협상 차 거문도에 온 조선 정부의 대표 엄세영에게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노임 받고 일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 왕조 지배 세력의 섬에 대한 수탈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재빠른 일본 상인들은 서도에 유곽을 만들었다. 구전에는 영국 수병들이 밤중에 헤엄을 쳐서 유곽으로 가다 빠져 죽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해변의 묘지에 묻힌 수병들은 어떻게 죽어 갔을까. 군사 훈련 중 폭발 사고로 죽은 것인지 거문리 마을 노인의 말처럼 "영국 놈들이 밤에 몰래 술 먹을라고 헤엄쳐오다 빠져 죽었.."는지 오늘의 우리가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은 없다. 병사들의 죽음이란 대체로 신비와 용맹의 이름으로 미화되어 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이없는 죽음도 군대의 명예를 위해 조작되기도 한다. 이 묘지의 주인들이라고 다를까.

제국주의 침략의 말단 하수인이었던 어린 수병들, 그들은 고향을 떠나올 때 이역만리 외로운 섬에 묻히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묘지 주변의 유채는 이미 만개했다. 길가 밭에 심어진 외콩 꽃도 환하게 피었다. 동백꽃은 한참 절정을 향해 타오른다. 떨어진 동백꽃들로 숲은 핏빛이다. 꽃 시절이 오는가 싶더니 꽃 시절이 간다. 한 나무 가지에서도 어떤 꽃은 피어나고 어떤 꽃은 시든다. 꽃들에게도 꽃 시절은 짧다. 나그네의 고향에서 뻘뚝이라 부르던 보리수 열매는 주황빛으로 익어간다. 뻘뚝을 한 움큼 따서 입에 넣는다. 달고, 시고, 쓰고, 떫은 즙이 입 안 가득 고인다.

▲끝내 귀향하지 못하고 이국 땅에 묻힌 영군 군인의 묘Ⓒ섬학교

외래 신의 거문도 '완전정복'

고도 거문리 선착장에서 동도 행 통학선을 탄다. 고도와 동도 서도까지 다리가 놓였지만 섬내에는 시내버스가 없어서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다. 학생들뿐 아니다. 섬들 사이는 아직도 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나그네는 동도 유촌마을에서 하선한다. 요 근년 거문도에서는 쑥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약쑥으로 이름이 나 농가 소득에 큰 보탬을 준다. 암 환자가 거문도 쑥을 먹고 완치됐다는 소문이 퍼진 뒤 거문도 쑥의 주가가 부쩍 올랐다. '쑥대밭'이라는 한탄은 옛말이다. 쑥은 이제 밭에서도 한 자리 크게 차지했다. 해풍에 강한 쑥이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면 잎이 바짝 마른다. 해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검은 비닐을 덮어 재배한다.

동도의 유촌마을에는 조선 말기 유학자 귤은(橘隱) 김류(金瀏)의 사당이 있다. 귤은은 퇴계, 율곡 등과 함께 조선성리학의 6대가로 추앙되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밑에서 수학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고향 거문도와 청산도 등지에서 제자를 길러내며 야인으로 살았다. 1854년 4월,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다. 그 때 귤은은 만회(晩悔) 김양록(金陽錄)과 러시아의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누고 <해상기문(海上奇聞)>을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은 귤은 등에게 통상 문서를 건네며 조선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문서는 전달될 수 없었다. 귤은은 <귤은재집(橘隱齋集)> 속의 <해상기문>에 러시아의 문서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의 비서관 곤차로프도 거문도 기항 후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거문도를 "마치 물속에 떠 있는 상자 같은 섬"으로 묘사했다. 곤차로프에 따르면 러시아는 섬사람들을 배로 초대해 필담을 나누고 홍차와 빵, 비스켓, 럼주까지 대접했으며 주민들은 답례로 생선과 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거문도 사람들이 러시아 함선에서 대접을 받고 생선 등을 전해 준 사실은 <해상기문>이나 조선 측 기록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쇄국정책에 반하여 이양선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이 알려지면 처벌받을 것을 염려한 주민들이 이를 숨긴 때문일 것이다. 거문도 사람들이 외국 군함에 우호적으로 대응한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뿐이었을까. 거문도는 오랜 세월 국제 항로에 위치해 외국인들과 접촉 경험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거문도 사람들은 폐쇄적인 조선정부에 비해 더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귤은의 사당은 교회 건물 뒤편에 있다. 거문도에는 교회가 7개나 된다. 교회의 그늘에 가려진 사당은 기독교의 위세에 눌린 전통문화의 상징 같다. 그래도 사당은 대접을 받는 편이다. 섬을 오랫동안 지켜온 토착신앙은 흔적도 없다. 섬의 당산과 당집은 더 이상 돌보는 이 없이 산 속에 버려져 있다. 외래 신의 완벽한 승리. 영국이나 러시아가 군사력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거문도 '완전정복'의 꿈을 그들의 신이 이루어냈다.

"지붕이 날아갈까 봐서 무섭소."


해안도로를 따라 유촌에서 죽촌으로 넘어간다. 죽촌마을 앞길은 물고기 양식장 사료로 쓸 냉동물고기 하역작업이 한창이다. 사료 창고에서는 물고기를 자르는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해안가 낡은 오두막집 마당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생선을 손질하고 앉았다.

"말렸다가 반찬 하실려구요?"
"아닙니다. 냉동실에 넣어 뒀다가 아이들 오면 먹일라고 그럽니다. 칵칵 씻처갔고 배를 뜹니다. 이거 이리 좋다요. 한데 좀 빈내가 납니다."

할머니는 선한 인상처럼 말씀도 참 곱다. 학꽁치가 맛있기는 한데 날것으로 먹으면 조금 비린내가 난다는 말씀이다. 학꽁치는 할머니가 잡은 것이 아니다. 거문리에 사는 할머니의 조카가 가두리양식장 바지에서 뜰채로 뜬 것이다. 이 땅의 어머니 누가 아니랴. 할머니도 자식들을 키워서 모두들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사신다.

"자식들 있어도 다 객지가 사요. 큰 아들은 서울서 살고. 나는 이라고 삽니다. 이게 편합니다. 시골사람은 시골 사는 게 좋습니다."

▲갈치가 풍년이다. 은갈치가 산처럼 쌓인 거문도 위판장Ⓒ섬학교

몸은 편찮아도 혼자 사는 것이 마음은 편타

"그렇잖아도 자식들은 집을 폴라고 합니다. 이리 헐었어도 바닷가라 폴라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뭐 하러 집을 폴아야' 그랬습니다. 나가 살았응께, '죽을 때 까정은 여그서 살란다' 그랍니다. 그런데 여기는 뭐하러 오셨소?"
"구경 삼아 왔습니다."
"나는 뭐 폴로 다닌 줄 알았습니다."

배낭을 맨 허름한 입성의 나그네가 장돌뱅이처럼 보이셨나 보다.

"저그 방파제 가면 참 좋습니다. 사람이 여름 되면 넘칩니다. 발에 걸립니다. 쪼깐 안즈꺼인디 그라요. 다리 아픈데 서 있고 그라요. 고기 하나는 거문도가 흔하요."

자식들의 부양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자식이 있다는 '죄' 하나로 혼자 사는 많은 극빈층 노인들이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한다. 팔순의 할머니도 오랜 세월 자식이나 국가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오셨다.

"자식들 사정도 에럽고. 아들네 있다고 돈 한 닙도 못 타 묵고, 도회지는 똥도 돈 아닙디야. 그래도 올부터는 달달이 빠딱 8만4천 원씩, 두 번 얻어먹었습니다. 근디 거문리로 가서 타야 하니 나룻배 성게만 오고가고 4천 원씩이나 나갑니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기초노령연금을 타게 된 것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된다.

"그래도 살기는 여가 좋습니다. 어지간하면 여기는 살아요. 바닷가 가서 찬거리 해다 묵고. 일해 주고 얻어 묵기도 하고. 내 보지런 하면 삽니다. 께을러서 못하께 그러제라."

거문도에서 나고 자라 거문도로 시집온 할머니. 선원생활하며 늘 바깥으로만 떠돌던 남편은 이제 집에 정주하는가 싶더니 바로 세상을 떴다. 그때 남편의 나이 쉰다섯.

"아범도 청춘에 가버리고. 혈압이 높아서 그만 밥 잣다가 넘어가 버립디다. 자식들 키우고
입때껏 혼자 사요. 살았을 찍에도 2년마다 한번 옵디다. 고깃배 타고 외국 댕기느라고."

"할머니, 참 고우세요."
"무슨 다 늙어가 여망 꽃까정 핏는 걸요."

할머니는 살풋 웃는다.

"뭐 할라고 여망 꽃은 피능가 모르겄소. 젊어서는 이삐단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나이 팔십에도 예쁘단 소리가 듣기 싫지 않으신 할머니, 천상 여인이다. 할머니의 집은 초가집을 지붕만 스레트로 바꿨다. 그도 세월이 지나니 낡을 대로 낡아 집은 곧 허물어질듯 위태롭다. 할머니는 지금도 해변에 떠밀려온 나무를 주어다 불을 때고 산다.

"바람이 불 때 그중 깝깝하요. 혼자 사께 태풍이 오면 그중 무섭소. 집이 허께, 지붕이 날아갈까 봐서 무섭소."

할머니는 손놀림을 쉬지 않지만 바구니에는 아직도 학꽁치가 가득하다. 나그네는 나룻배 시간에 맞춰 일어선다.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오래 살아 뭐 하꺼시오. 늙으면 가야제라. 말이라도 고맙소만."

말을 그렇게 하셔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나그네가 잠깐 말벗이라도 되어 드렸던 것일까.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 하신다.

"고맙소, 왔다 가니라고 고맙소. 갑시다잉."

▲희귀한 분홍빛 섞인 흰동백이 새색시 볼처럼 발그레하다.Ⓒ섬학교

등대로 가는 길

거문리에서 삼호교를 건너 왼쪽 길을 따라 걷는다. 거문도등대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수월산에서 '무넹이'를 건넌다. 등대가 있는 수월산은 '무넹이'로 서도와 이어졌다. '무넹이는' 좁고, 낮고, 위태롭다. 태풍이나 해일 때면 바닷물이 넘나든다 해서 '무넹이'다. 물넘이. 여기서 거문도등대까지 가는 상록수 숲은 거문도 도보여행의 백미다. 해풍에 강한 상록수 터널이 등대까지 가는 나그네를 보호한다. 길가에는 후박나무, 가마귀쪽나무, 자금우, 생달나무,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다. 거문도등대는 1905년에 4월부터 100년 세월 동안 매일 15초마다 한 번씩 불빛을 밝혀왔다. 등대는 처음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점령의 앞길을 밝히는 식민의 등대로 건립됐지만 이제는 거문도 바닷길의 안전을 지키는 생명의 등대다.

등대를 돌아보고 나와 장촌 가는 길, 섬사람 하나 낚싯줄을 부지런히 바다로 던지고 있다. 수제비 뜨는 폼으로 낚시를 날리는 것은 숭어를 잡기 위해서다. 숭어는 일반 낚시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은 그물로 잡지만 간혹 이런 홀치기 낚시로도 잡는다. 해안 가까이 떼로 몰려다니는 숭어를 잡아채는 것이다. 홀치기 꾼에게도 오늘은 별무 소득이다. 한두 마리 드물게 다니는 숭어를 나꿔채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장촌마을에는 거문도뱃노래전수관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장촌유물전시관이 있다. 마을 단위의 유물관이 있다는 것은 희귀하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전시관 모두 문을 걸어 두었다. 여름철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때만 여는 것일까.

거문도의 미녀 인어(人魚), 신지끼

거문도에도 남해안의 다른 섬들처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1976년 장촌 마을의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거문도가 한반도의 고대부터 국제해상무역의 주요 항로였다는 증거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오랜 세월 거문도 사람들을 지켜준 것은 '백도'에 대한 신앙심이다. 주민들은 백도 근해에서는 사람이 빠져죽은 적이 없다고 믿어왔다. '백도'라는 수호신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백도와 함께 거문도 신앙의 또 한 축은 '신지끼'라는 인어였다. 장촌 해변은 신지끼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거문도 전역에서 신지끼 목격담이 전해졌다. 서양과는 달리 한국에서 인어의 전설은 드물다. 인천의 장봉도에도 인어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목격담이다. 장봉도의 인어는 신지끼처럼 섬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다.

신지끼는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얀 살결의 길고 검은 생머리 인어 신지끼가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큰 풍랑이 몰려 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지끼의 저주로 풍랑이 오는 것이라 여겨 신지끼를 기피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차츰 그것을 달리 해석하기 시작했다. 신지끼의 출현을 저주가 아니라 풍랑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악마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악마가 될 뻔한 신지끼를 섬의 수호신으로 만든 것은 섬사람들의 지혜였다.

장촌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잡은 초등학교 옆길을 돌아 녹산등대로 간다. 등대가 있는 녹산과 동도 사이의 좁은 해협은 거문도 내해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등대로 가는 해변에는 묘지들이 많다. 이 섬의 공동묘지일까. 유채꽃밭에 누운 두 기의 무덤이 발길을 붙든다. 봄볕 아래 꽃무덤이라니! 하나는 봉분이 크고 또 하나는 작다. 나란하지 않고 무덤이 위 아래로 자리잡은 것은 망자의 항렬이 동격이 아니란 증거다. 무덤의 주인은 부부가 아닐 것이다. 혹 큰 봉분은 합장한 부부 묘고 작은 봉분은 홀몸으로 살다간 자식의 무덤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누구의 무덤인들 어떠랴. 대다수 섬사람들처럼 저 유택의 주인 또한 살아생전 풍요로운 삶 따위는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섬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쳤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마침내 고단한 섬살이의 보상을 받았다. 생의 시절, 대궐 근처에는 가보지 못했을 그가 오늘은 꽃대궐의 주인으로 누웠다.

<천혜의 비경 백도>

한국 섬의 3대 해상 절경을 손꼽으라면 신안 홍도, 옹진 백령도, 그리고 여수의 백도(白島)를 꼽을 수 있다. 모두들 바다의 금강산이라 할 만큼 기암괴석이 빼어난 절경들이다. 여수의 백도는 거문도를 거처야만 갈 수 있다. 거문도 여행객의 대다수는 백도 유람이 최종 목적이다. 그래서 거문도를 가고도 백도를 못 봤다면 거문도에 안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도는 거문도 여행의 백미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km 해상에 있다.

백도는 섬들이 온통 하얗게 보인다 해서 혹은 100개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99개이기에 백도란 이름을 얻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실제 섬 숫자는 39개다. 백도는 상백도와 하백도로 구분되는데 상백도 수리섬 등대는 1938년 세워져 지금까지 백도 해상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신선들이 다녀갔다는 신선바위와 옥황상제의 신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도끼를 가지고 왔다는 도끼여, 각시바위, 서방바위, 병풍바위, 곰바위 등 저마다의 사연과 전설을 간직한 바위섬들이 감동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 백도는 1987년 명승 7호로 지정되어 일반인들의 입도는 불가하다.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휘파람새, 팔색조 등 30여 종의 조류와 눈향나무, 석곡, 소엽풍란 353종의 아열대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다.

11월 <한국 최고의 해상비경, 거문도·백도 기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5일(토)>
11월 4일(금) 24:00(자정/11월 5일 0시)
서울 출발(11월 4일(금) 23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3강 여는 모임
05:00 여수 도착
06:00-07:00 아침식사(아구탕/삼치구이)
07:40 여수 출항
10:00 거문도 도착
10:30-13:00 백도 유람(당일 상황 따라 오후 1시로 변경될 수도 있음)
13:00-14:00 점심식사(갈치조림)
14:00-15:30 거문도 등대 트레킹
고도→덕촌리→목넘어→거문도등대→등대선착장
16:00-16:30 배편으로 장촌마을 이동
16:30-17:30 녹산등대 트레킹
17:30-18:00 배편 이동
18:0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쑥막걸리)
20:00- 자유시간 및 취침(<고도민박>. 다인실)

<11월 6일(일)>
06:00 기상. 산책
07:00-08:00 아침식사(한가쿠갈칫국)
08:00-09:00 영국군 수병묘지 및 고도마을 탐방
면사무소-거문초교-해밀턴 테니스장-영군군묘지
09:00-10:00 장보기 및 자유시간
10:30 거문도 출항
13:00 여수 도착
13:00-14:00 점심식사(장어탕>
14:00 서울 향발. 제53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53강 <거문도> 답사로 Ⓒ섬학교

▲섬학교 제53강 <백도 선상유람>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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