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대목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부패가 김영란법과 같은 법제도가 없어서 생긴 것일까요? 정말로 김영란법 같은 법제도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부패 없는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이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고 있는 책이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유종성 호주 국립 대학교 교수의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김재중 옮김, 동아시아 펴냄)입니다. 이 책은 한국, 타이완, 필리핀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불평등과 부패의 관계를 추적한 역작으로 일찌감치 해외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저자 유종성 교수의 개인사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질 법합니다. 유종성 교수는 1990년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 이끌며 금융 실명제를 비롯한 한국 경제 민주화를 이끌었던 1세대 시민운동가입니다. 뒤늦게 학계에 투신해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호주 국립 대학교 등에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했죠.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은 유종성 교수의 여러 연구 성과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은 것입니다.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새삼 한국 사회의 부패 문제에 관심이 높아진 시점에 이 책의 저자 유종성 교수와 만났습니다. 유 교수가 국내에서 책 출간을 준비 중이던 지난 6월 현장 인터뷰를 진행되고 나서, 이메일을 통해서 추가로 보완했습니다.
김영란법, 깨끗한 대한민국 만들까?
프레시안 : 9월 28일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되어서 한국은 난리법석입니다. 부패 문제를 해결하고자 1990년대부터 시민단체에서 여러 노력을 해왔던 입장에서 이 법을 둘러싼 풍경이 어떻습니까?
유종성 : 사실 시민 단체의 지속적인 운동의 성과로 2001년 제정된 부패 방지법에 따라 공직자 행동 강령을 제정해서 부정 청탁과 금품 향응 제공 등을 금지하고 위반자를 징계하도록 했습니다. 공직자 행동 강령이 직무 관련자만을 대상으로 한 것에 비해, 김영란법은 직무 관련성이 없는 금품 향응도 규제하고, 그 기준을 구체화하고, 위반 시 형사 처벌 대상으로 강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패 방지법의 원래 취지대로 공직자 행동 강령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정하고 엄격하게 집행을 해왔더라면 굳이 김영란법과 같은 특별 형사법까지 제정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프레시안 : 일각의 기대처럼 정말로 김영란법이 한국의 부패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유종성 : 상당한 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과거 부패 방지법과 공직자 행동 강령 제정 시에 비해 사회적 관심과 파장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실제적인 영향력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특히 기업들이 고위 공직자나 영향력 있는 인사에게 골프, 룸살롱 등 뇌물성 접대를 하는 관행이 사라진다면 우리 사회가 한층 더 맑아지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비리를 다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프레시안 : 김영란법 같은 법제도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종성 : 거대 재벌에 의한 국가 포획과 정경유착, 대통령 측근 비리 같은 것은 김영란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또,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것과 같이 규제 기관이 규제 대상 산업에 의해 포획되는 규제 포획도 김영란법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고요.
한편, 김영란법의 부작용으로 지나친 검찰 국가화의 경향성을 심화시키고, 특히 정치 검찰에게 비판적인 정치인, 공직자, 언론인을 선별적으로 위협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점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불평등이 부패를 낳는다
프레시안 :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헤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핵심 주장('불평등이 부패를 심화한다')은 세간의 상식과는 정반대입니다. 학계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 다수는 '부패가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생각하지, '불평등이 부패를 심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종성 : 맞습니다. 부패가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는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연구에 뛰어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불평등은 부패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유의미한 요인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힌 연구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2006년 하버드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부패, 불평등, 사회적 신뢰의 비교 연구>)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부패와 사회적 신뢰에 미치는 영향을 입증하는 계량적 연구를 했습니다. 지도 교수였던 로버트 퍼트남 교수가 이 문제를 실제 사례 연구를 통해 좀 더 파헤쳐보기를 권해 한국, 타이완, 필리핀 세 나라의 불평등과 부패를 비교하는 한 장을 추가했어요. 그 때는 2차 자료만을 가지고 3국의 불평등과 부패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만, 이후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3국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상세한 비교 분석을 통해 인과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는지까지 밝혀내서 이를 책으로 낸 것입니다.
프레시안 : 그럼, 박사 학위 논문의 한 장이 이런 중요한 연구 성과로 이어진 셈이군요. 2015년 초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책이 나오고 나서 학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유종성 : 불평등이 부패를 증가시킨다는 것을 국가 간 양적 연구로 입증한 논문을 2005년 <미국사회학회지(American Sociological Review)>에 게재하고 나서, 수많은 후속 연구에 인용되었죠. 그리고 꼭 10년 만에 한국, 타이완, 필리핀 세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비교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 책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이 부패를 증가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을 통계 분석으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 불평등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정치 부패, 관료 부패, 기업 부패 등 온갖 부패를 낳게 되었는지 그 과정, 달리 말하면 인과 관계 메커니즘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좀 자랑을 한다면, 지금까지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 네 곳에서 학자들의 서평을 실었는데 모두가 저의 이론적, 경험적, 방법론적 기여를 높게 평가해주고 있습니다. 또, 지난 9월 초 미국정치학회에서는 제 책에 대한 라운드테이블을 열어 세계의 유수학자 30여 명이 열띤 토론을 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프레시안 : 여기서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부패를 낳게 되었나요?
유종성 : 필리핀의 예를 통해서 살펴보면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은 토지 개혁의 거듭된 실패로 대지주 가문(토지 자본)이 산업, 금융 자본까지 지배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부를 장악한 소수의 가문이 정치에 침투해서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표를 사는 방식으로 정계에 진출합니다(정치 부패). 가진 것이 없는 다수의 서민은 이런 후견주의적 선거를 용인하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들 부유한 소수가 돈과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관직을 사고 후견주의적 정치인은 지지자에게 관직을 알선할 수도 있습니다. 엽관주의 관료제가 만연한 것이죠(관료 부패). 이렇게 의회나 정부가 부를 가진 소수에 의해서 장악되면, 국가가 강력한 사적 이익에 '포획(capture)'됩니다. 이 결과 정부는 부를 가진 소수의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기업 부패, 정치 부패의 고리가 또 만들어지죠.
프레시안 : 후견주의적 선거, 엽관주의 관료제, 경제 권력에 의한 국가 포획의 과정을 통해서 경제적 불평등이 부패를 낳는다고 정리하면 될까요?
유종성 : 단순하게 정리하면 그렇습니다. 제 연구에서 중요한 대목은 필리핀을 한국(남한), 타이완과 비교 연구한 대목이죠.
프레시안 : 필리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토지 개혁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한국, 타이완은 조금 달랐다는 거군요.
유종성 : 그렇습니다. 세 나라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 당시에는 모두 가난하고 불평등하고 부패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나마 필리핀이 한국이나 타이완에 비해서는 1인당 국민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는 정반대가 되죠.
저는 그 원인을 토지 개혁의 성패에서 찾았습니다. 한국과 타이완은 성공적인 토지 개혁을 통해서 지주 계급을 해체하고 소득과 부의 분배가 비교적 평등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실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 하의 토지 개혁으로서는 한국과 타이완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큰 개혁을 한 것입니다.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엽관주의 관료제가 아닌 능력주의 관료제가 발전하고, 후견주의 선거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경제, 산업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죠. 그 결과 특히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전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레시안 : 그러니까, 결국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면 부패가 덜해지는 데다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거군요.
유종성 : 그렇습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한국이나 타이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나았던 필리핀이 몰락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 불평등은 부패를 심화시켜서 결국 경제 성장도 저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부패가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현상 뒤에는 불평등 심화가 있습니다.
박정희, 한국 사회 부패의 또 다른 원인
프레시안 : 이런 교수님의 주장을 놓고서 불만족스러워하는 한국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한국이 경제적 불평등이 나아졌는가? 이런 의문을 품는 분들은 특히요.
유종성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은 필리핀보다는 훨씬 덜 부패하지만 타이완보다는 좀 더 부패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일까요? 타이완이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화를 추진한 것과는 달리, 한국은 재벌 위주의 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다시 경제력(자본, 토지 등)이 소수의 대기업에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 이 과정에서 관료를 비롯한 국가가 재벌에 의해서 다시 포획되면서 소위 비자금이나 불법 정치 자금으로 상징되는 정치 부패, 기업 부패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제 성장 과정의 불평등 심화가 타이완보다 더한 부패를 낳았고, 그것이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지금 한국 부패의 책임의 상당 부분은 재벌 중심의 성장 정책에 올인(all-in)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있다고 봐도 될까요?
유종성 : 그렇습니다. 그간 국내외의 많은 이들은 한국의 발전 국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이라는 '신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6장(관료제, 엽관주의와 관료 부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경쟁적인 시험을 통한 능력주의 관료 임용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진전을 이루었고, 특히 4.19 학생 혁명 이후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전에는 토지 개혁으로 인해서 한국 사회에 평등주의가 만연하면서 교육의 급격한 팽창이 이뤄진 배경이 있었습니다. 토지 개혁으로 사람들이 '공평한 성장'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높은 교육열로 나타났죠. 또 그 결과 양질의 노동력이 제공될 수 있었고요. 또 관료 임용 제도의 확대를 요구한 교수, 학생의 압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 가운데 드문 성공 사례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것은 단지 높은 성장을 이룩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공평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데 있습니다.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공평한 성장은 박정희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공이라기보다는 토지 개혁과 그 결과 나타난 불평등 완화가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벌 중심 성장 정책은 장기적으로는 불평등을 다시 심화함으로써 토지 개혁의 성과로 나타난 이런 긍정적인 변화를 다시 되돌린 측면이 있습니다.
불평등 원인, 재벌+신자유주의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시장 중심 자유주의, 흔히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불평등의 원인으로 많이 거론됩니다.
유종성 : 신자유주의가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불평등 심화의 1차적 책임은 재벌 중심 성장 정책이 한계에 이르면서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재벌의 무분별한 해외 차입과 연쇄 부도로 초래된 1997년 외환 위기는 한국 사회로서는 큰 분기점이었습니다. 그 시점에 한국 사회가 효용이 다한 재벌 중심의 성장 정책에 쐐기를 박고 토지 개혁에 준하는 경제 개혁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미완에 그치고, 역대 정부가 사실상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더 심해지고 소득 분배는 악화되는 상황을 낳았죠.
바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지나친 경제 불평등과 이에 따른 기회의 불균등을 완화하는 토지 개혁에 준하는 사회 경제 개혁이 한국 사회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그런 논의를 시작하는 데 유의미한 역할을 한다면 학자로서 더 이상 바랄 바가 없겠습니다. 한국어판 출간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고요.
정치 검찰 힘 키워주는 선거법
프레시안 : 하버드 대학교 유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외국에서 지냈습니다. 요즘 근황이 어떤가요?
유종성 : 2014년에 8년간 재직하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를 떠나서 호주 국립 대학교(정치 및 사회변동학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요즘에는 아시아 각국의 선거법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따져 보는 연구를 주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죠. (웃음)
프레시안 : 가족(유승희 민주당 의원)의 선거(2012년 4.11 총선)를 돕다가 검찰에 의해서 선거법 위반(허위 사실 유포)으로 기소를 당하고, 재판까지 갔었죠?
유종성 : 그렇습니다.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확정을 받았지만, 검찰의 황당한 억지 기소로 1년 반 동안 고생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 제한, 호별 방문 금지 등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민주적인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특히, 허위 사실 공표죄와 후보자 비방죄는 정치 검찰에 의해 악용되는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 때의 문제의식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선거법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따져 보는 국제 비교 연구로 이어졌죠.
프레시안 :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는 게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유종성 : 힘듭니다. (웃음) 한국어로 한국 학생에게 강의하지 못하고 서툰 영어로 외국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해야만 하는 현실이 아쉽기 짝이 없죠.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도 고욕이고요. 물론 해외의 유수 대학에서 끊임없이 학문적 경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항상 긴장감을 주기도 합니다만….
프레시안 : 그런 긴장감의 결과가 이 역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는 국내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종성 : 그 첫 번째 활동으로 9월부터 <프레시안>에 기명 칼럼을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학자로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통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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