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사거용인(死居龍仁)’의 명당에서 뭇 성현(聖賢)을 만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사거용인(死居龍仁)’의 명당에서 뭇 성현(聖賢)을 만나다

2016년 10월 고을학교는 <용인고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10월 제36강은 ‘죽어서 묻히고 싶어하는[死居龍仁]’ 용인고을을 찾아 그곳에 영면하고 계신 많은 성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용인8경의 하나인 어비낙조. 가을 황금빛 들판 넘어 어비리 저수지에 물든 석양의 낙조가 황홀하다.Ⓒ용인시

고을학교 제36강은 2016년 10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상현IC-심곡서원/조광조묘역-서봉사터/현오국사탑비-충렬서원/정몽주묘역-민영환묘역-채제공뇌문비-점심식사 겸 뒤풀이-양지향교-유형원묘역-송담고택-처인성-한산이씨음애공파고택-수원IC-서울의 순입니다.

▲<용인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6강 답사지인 <용인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추다

용인(龍仁)은 한남정맥(漢南正脈)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동쪽의 노고봉(574m)과 오봉산(418m), 서쪽의 광교산(582m)과 함봉산(306m), 남쪽의 시궁산(515m)과 구봉산(465m) 등 산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모여 탄천(炭川), 경안천(慶安川), 금어천(金魚川) 등을 이루면서 북쪽으로 흐르고, 이들이 부려놓은 구릉지(丘陵地)와 그 사이를 흐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곡저평야(谷底平野)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또한 산천의 형세가 생기(生氣)가 충만하며 중첩되어 있어 풍수에서 중요시하는 장풍(藏風)의 조건을 충족시켜줍니다. 나아가서 산세와 수세가 매우 짜임새 있게 어우러져 합취(合聚)되는 형국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구(水口)를 맺을 수 있는 관쇄(關鎖)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명당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사거용인(死去龍仁)’이라 하여 음택지(陰宅地)로 유명한 고을로 알려져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30㎞ 떨어져 있어 아주 가깝습니다. 동쪽은 이천, 서쪽은 수원과 화성, 남쪽은 안성, 북쪽은 성남과 광주와 접하고, 조선시대 이래 서울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여 남북 간의 도로가 잘 발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일합병 시기에는 수원과 여주를 잇는 도로와 기차가 운행될 정도로 교통이 활발하였습니다.

이렇듯 용인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선시대에는 구흥역(駒興驛)과 금령역(金嶺驛)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곽과 봉수가 운영되었습니다. 현재 할미산성, 보개산성(석성산성), 태봉산성, 처인성, 행군이토성, 임진산성 등이 남아 있는데, 축조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로 추정됩니다.

용인에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곽은 할미산성과 석성산성으로도 불리는 보개산성, 그리고 태봉산성, 행군이토성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경안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통로에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북방 진출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할미산성은 백현(349.3m)이라 불리는 산 정상부에 있으며, 성의 둘레는 651m 정도의 작은 산성입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고려 때 한 늙은 할미가 있어 하룻밤에 축조하였다는 데서 이름”하였다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으나 할미성에서 수습된 토기와 도기편 등을 보면 대체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섞여 있습니다.

보개산성(寶蓋山城)은 경안천과 신갈천의 분수령을 이루는 보개산 정상부에 위치한 산성으로 할미산성과 이웃해 있습니다.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너진 서쪽 성벽의 안쪽으로 박혀있는 겹축된 석재 틈으로 신라시대 기와조각이 들어있고, 산성의 정상부에서 나오는 유물들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현재의 규모로 증축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봉산성(台峰山城)은 태봉산(308m) 정상을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토축성으로, 이곳은 삼남지방의 교통로가 죽산 지역에서 모여 한성으로 향하는 중간 지점의 고갯길에 해당합니다. 백제시대의 타날문 토기류가 다량으로 수습되었고 일부 고려시대 도기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행군이토성(行軍里土城)은 축조방법과 유물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처음 축성되었다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축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야지대를 남쪽에 면한 골짜기의 가장자리에 입지한 점 등으로 보아 처인성과 많은 유사성을 보이는 관방 유적으로, 남북의 길이가 동서 폭보다 긴 장방형으로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형질 변경이 이루어진 상태라 유적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처인성(處仁城)은 고려시대 수주(水州. 수원)에 속해 있던 처인(處仁) 부곡(部曲)의 토성으로, 당시 성곽 둘레는 425m였는데 무슨 이유로 축조되었고, 어떠한 형태와 구조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250m 정도입니다. 고려 후기의 대몽항쟁기 때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살리타(撒禮塔)를 화살로 사살한 처인성 전투로 유명한 곳입니다.

임진산성(壬辰山城)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곳으로, 달리 임진산성지, 풍덕천동성지, 예진산성지 등으로 불렸으나 조선 중기와 후기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아마도 임진산성과 광교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경기도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총통, 철제탄환, 철모 외에도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류와 백제시대의 타날문토기, 조선시대의 명문도자기류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임진산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백제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는 복합유적으로 추정됩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을 배향한 심곡서원Ⓒ용인시

용구현(龍駒縣)의 용(龍)자와 처인현(處仁縣)의 인(仁)자를 따와 용인으로


용인(龍仁)는 본래 용구현(龍駒縣)과 처인현(處仁縣)을 합쳐, 용구(龍駒)에서 용(龍)자와 처인(處仁)의 인(仁) 자를 따와 용인현(龍仁縣)이라고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陽智郡)을 더하여 오늘의 용인시가 되었습니다.

용인은 온조왕(溫祚王)이 하남 위례성에서 즉위한 이후 계속 백제의 영토에 속했으나 475년(장수왕 63)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남하하여 아차산성에서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죽이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새로운 점령지인 용인지방을 구성현(驅城縣)이라 하였습니다. 그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한주(漢州. 경기도 광주)의 영현에 속하게 하고 구성(驅城)을 거서(巨黍)라 하였습니다.

그후 고려시대는 940년(태조 23) 용구현(龍駒縣)이라 하였으며, 1018년(현종 9) 용인을 광주목(廣州牧) 임내(任內)에 두었고 1172년에 와서야 광주(廣州)에서 분리하여 감무를 두고 현감으로 보직하였습니다.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부(水源府)에 속해있던 부곡(部曲)이었는데, 처인(處仁)이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 현종(高麗 顯宗) 때에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양지현(陽智縣)은 본래 수주(水州. 수원)였다가 1399년(정종 2년)에 양지현(陽智縣)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414년(태종 14) 광주부(廣州府)로 치소(治所)를 옮긴 후 세종 때까지 광주진(廣州鎭)의 관할구역(管轄區域)이었는데 1470년 죽주(竹州)의 고안(高安), 대곡(大谷), 목악(木岳), 제촌(蹄村) 등 4부곡을 영현으로 하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내속(來屬)되었습니다.

1895년(고종 32) 용인현(龍仁縣)이 용인군(龍仁郡)으로 개칭되었고, 다음해인 1896년 경기도의 4등군(等郡)이 되었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지방관제(地方管制)의 개편에 따라 1896년 양지군(陽智郡)으로 되었다가 1914년 용인군(龍仁郡)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용인시

용인과 양지에 읍치구역의 흔적 남아있어

용인은 음택지로 유명해서인지 고을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용인과 양지에 읍치구역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으며 오히려 성현(聖賢)들의 서원(書院)과 묘역(墓域)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양지관아(陽智官衙)는 1899년 당시 양지군수 신용균(申容均)이 중앙에 올린 <양지군읍지(陽智郡邑誌)>에 따르면, 동헌(東軒) 12칸, 내동헌(內東軒) 29칸, 책실(冊室) 4칸, 향장청(鄕長廳) 4칸, 순교청(巡校廳) 6칸, 서기청(書記廳) 6칸, 사령청(使令廳) 6칸, 사창(社倉) 8칸, 내삼문(內三門) 3칸, 문루(門樓) 6칸, 객사(客舍) 6칸 등 많은 부속건물을 갖춘 제법 규모가 큰 관아였으나 지금은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양지향교(陽智鄕校)는 1523년(중종 18)에 처음 지어졌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배치입니다. 이는 뒤로 갈수록 경사가 높아지므로 배향공간의 위계를 강학공간에 비해 더 높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은 대성전, 명륜당이 복원되었고 동재와 서재, 전사청, 공사청 등 여러 부속건물이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1987년에 신축한 외삼문과 최근 건립한 공사청과 동재가 남아 있습니다.

용인향교(龍仁鄕校)는 1400년에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에 창건되었으나 1894년(고종 31)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일부 건물이 파손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5칸의 대성전과 삼문(三門)과 강당 등이 있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심곡서원(深谷書院)은 조선 중기 중종 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조광조(趙光祖)를 기리기 위해 1650년(효종 원년)에 설립하였습니다. 효종은 ‘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서원의 구조는 홍살문과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 안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담긴 현판과 서원의 규약 등이 걸려 있습니다. 강당 옆에는 서원의 책과 문서가 보관된 장서각이 있고, 제사를 준비 하는 재실인 고직사가 있으며,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와 정암을 위해 여러 번 상소를 올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유교를 통해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대사헌에 올라 신진사류를 과감히 등용하였고, 정국공신의 훈공을 대폭 삭제하는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다가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을 사서 훈구파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무고로 능주(凌州)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습니다.

충렬서원(忠烈書院)은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불린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서원입니다. 원래는 1576년(선조 9) 정몽주와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처음 지어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1605년(선조 38)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서원을 다시 지었는데 그때 조광조의 위패는 심곡서원으로 옮겼고, 1608년(광해군 원년) ‘충렬’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습니다.

사당에는 정몽주와 그의 손자 정보(鄭保),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자결한 이시직(李時稷)의 위패와, 1997년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참형을 당한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추담(秋潭) 오달제(吳疸濟)의 위패가 함께 모셨습니다.

▲양지향교 명륜당Ⓒ용인시

성현들의 서원(書院)과 묘역(墓域)들 즐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고려의 충신으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360년(공민왕 9)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쳤고 오부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는 등 문신으로서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당했습니다.

그 뒤로 포은의 묘는 경기도 개성에 속하였던 풍덕군에 있었고 1406년(태종 6) 포은의 고향인 영천에 안장하기 위해 천묘하였는데, 천묘 행렬이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에 걸어두었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용인시 모현면 지금의 묘소 자리에 떨어져서 후손들은 의논 끝에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은 조선 후기 현종과 숙종 때 문신으로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651년(효종 2) 사마시를 거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서인 소론의 지도자로서 남인을 탄핵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과 갑술옥사(甲戌獄事)입니다.

경신대출척은 1680년(숙종 6)에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이며, 갑술옥사는 1694년(숙종 20) 서인이 다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건인데, 그 과정에서 남구만은 남인들의 서인에 대한 반격 사건인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 15. 1689)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으나, 갑술옥사로 다시 재기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그의 묘소는 본래 양주의 불암산 화접동에 있었는데 뒤에 후손들이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로 이장하였고, 묘 앞에는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있으며 묘소 입구 도로변에는 신도비가 있습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조선후기 실학파의 비조(鼻祖)로서,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 발발하였고 조선 건국 이래 누적되어 오던 여러 모순이 극대화되어 가던 때입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隧錄)>으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사상은 이미 영조 대에 인정을 받아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 성호(星湖) 이익(李瀷),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그의 사상은 전해졌습니다.

묘역에는 봉분 앞으로 경계석과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그 중간 부분에 걸쳐서 놓여있습니다. 묘표는 1768년(영조 44)에 세운 것으로, 묘표의 건립에는 죽산 부사 류언지(柳彦摯)와 류형원의 증손 류발(柳發)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이며 비문은 1768년 류언지(柳彦摯)가 지었고, 판중추부사 홍계희(洪啓禧)가 글씨를 썼습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은 영, 정조 시기의 명재상으로 15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 23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사관과 충청도 암행어사, 도승지, 병조판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도승지로 임명된 해, 영조와 그 아들인 사도세자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를 폐하는 비망기가 내려졌는데 채제공이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 철회시켰습니다. 후일 채제공이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도세자가 죽자 이때 사도세자를 향한 충심을 확인한 영조는 손자인 정조에게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하여 다시 관직에 나갑니다. 그후 여러 분야에 걸쳐 정조를 보필하게 되었는데 화성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상업을 진작시켰습니다.

정조는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몸소 애도의 글을 지어 내렸는데, 그 글이 1799년(정조 23) 〈체재공선생뇌문비(蔡濟恭先生誄文碑)>에 새겨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뇌문(誄文)’이란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손수 고인의 공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쓴 조문 형식의 글이고 그 글을 비석에 새긴 것이 ‘뇌문비’입니다.

비문은 서두에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라고 칭송하였고,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고 하였으며 이어서 정조는 “경(채제공)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 “조정에 노성(老成. 채제공)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채제공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계정(桂庭) 민영환(閔泳煥)은 구한말의 대신으로, 1878년(고종 15)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주미전권대사 등을 거쳤고 1896년 특명 전권공사로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여 서양의 근대적인 문물제도와 근대화한 모습을 보고 돌아와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면서 개혁을 시도했으며, 친일각료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습니다.

일본이 을사늑약(1905)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의정대신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에 찬동한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대한제국 백성들과 각국 공사, 그리고 고종 황제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자결하였습니다.

묘소는 봉분 뒤쪽에 사성(莎城)이라고 하는 높은 둔덕을 쌓고 그 위에 담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봉분 앞 좌우로 문인석 한 쌍이 있고 우측으로는 묘비가 서 있습니다. 묘역의 입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을 새긴 신도비가 있으며 원래는 수지구 풍덕천동 토월마을에 있었으나, 1942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 중종 때 덕행이 높았던 문신이자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추구하며 훈구파와 대립했던 사림파였던 음애(陰崖) 이자(李耔)의 후손들이 살던 집으로, 그가 묻힌 묘역이 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현재 가옥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는데,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ㄷ자형 평면구조입니다. 좌우의 날개채의 지붕 형태가 다르게 되어 있는데 사랑채 부분은 팔작지붕이고, 오른쪽 나뭇간과 안채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어 두 공간의 위계가 서로 달랐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서봉사터 현오국사탑비Ⓒ용인시


용인,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에 서다

용인은 조선후기 기호지방과 호서지방 노론들의 사상논쟁인 ‘호락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은 노론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1711년(숙종 37)에서 1712년까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한 논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의 주요쟁점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同異性]로서 달리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라고도 하며 이후 1746년(영조 22) 이재(李縡)가 제자 최석(崔祏)에게 지어준 <한천시(寒泉詩)>가 알려지면서 관심 있는 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 등을 지지한 이들이 충청, 호서지역을 중심으로 살았으므로 호론(湖論)이라 하며,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 이재를 지지한 이들은 서울, 경기 낙하(洛下)지역에 주로 살았으므로 낙론(洛論)이라 하였습니다. 용인은 서울 낙하지역에 포함되었으므로 낙론학자들의 주요한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용인지역의 유풍(儒風)은 조광조(趙光祖) 이후 이재로부터 진작되었는데 이재는 용인 출신으로 훗날 노론 낙론의 지도자가 된 인물입니다. 1728년(영조 4) 9월부터 용인으로 옮겨와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지은 강의 자료가 <천상강설(泉上講說)>이며, 1737년(영조 13)에는 충렬서원(忠烈書院), 1742년(영조 18)에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의 원장으로 각각 취임하였습니다.

호락논쟁은 철학적 토론의 양상과 호론, 낙론간의 학문적 도통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양상을 띠었고 용인지역에서의 호락논쟁은 낙론계의 주도자인 이재를 비롯하여 그의 문인, 손자 이채(李采),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용인의 충렬서원 등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하면서 정체성을 확보해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조선 사상사에서 용인지역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논쟁은 100년간 지속되었는데,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의 주요한 철학적 관심이자 정치적으로는 노론 학통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호서(湖西)와 기호(畿湖) 학파간의 대립 양상이라는 성격도 갖게 되었습니다.

광교산 동쪽 서봉사지에 있는 현오국사탑비는 현오국사(玄悟國師)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1185년(명종 15)에 세워졌습니다. 일반적으로 행적을 기리는 탑비는 사리를 모신 부도와 함께 세우는데 서봉사지에는 부도의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비석만 남아 있으며 비문에는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을 쓴 사람은 고려 명종 대 문신 이지명(李知命)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초서로 이름을 날렸던 유공권(柳公權)입니다.

서봉사가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남아있는 절터의 규모를 보면 아주 큰 절로 추정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나온 쌀뜨물이 개울을 따라 10리나 흘러가서 왜군이 그 물길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이곳이 서봉사의 옛터로 밝혀진 것은 <현오국사탑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성은 왕씨(王氏)였으며, 속명은 종린(宗璘)이었고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됩니다.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1178년에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명종은 크게 슬퍼하며 그를 국사(國師)로 삼고, ‘현오(玄悟)’라는 시호를 내린 뒤 동림산 기슭에서 다비하였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