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바마 행정부
버락 오바마 미국 제44대 대통령 당선자는 연방상원 의원 신분이던 지난 2005년, 도미니카/니카라과 등과 체결한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백악관이 너무 무심하다는 것에 항의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담대한 희망」, 255면)"
오바마 당선자의 FTA에 대한 기본인식은 이렇다.
"미국 경제의 장기적인 전망과 무역 자유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미국 노동자들의 능력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모든 국민들이 세계화의 득실을 한층 공평하게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건의 핵심은 "점점 심화되는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다.(같은 책 254면)
오바마 당선자는 이미 2004년 상원의원선거 당시 주요 경제공약으로 "일자리를 외국으로 옮기는 기업에 감세혜택을 취소하고, 학교 교육과 직업교육을 정상화하며 미국이 체결한 무역협정의 내용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포함시켰다.(「체인지, 그리고 담대한 희망 오바마론」, 73면)"
그리고 이런 입장들은 대선과정에서도 일관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환경 노동 등) 기준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2008년 2월 11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발언)
"한국에서처럼 조세와 규제를 통한 미국 자동차 생산자에 대한 중앙집중적인(centralized) 차별이 다른 미국산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다른 지역의 시장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2월 18일 위스콘신주 공정무역연합(Fair Trade Coalition)의 공개질의에 대한 답신)"
"심각한 결함이 있는(badly flawed) 한미FTA에 반대합니다."("5월 22일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한국이 수십만대의 차를 미국에 수출하면서도 미국차의 한국 수출은 수천대로 계속 제한하도록 하는 협정은 현명한 협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6월 16일 미시간주 연설)
"한국은 수십만 대의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하는 반면, 미국이 한국에 파는 자동차는 고작 4천∼5천대도 안된다. 이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다." (2008. 10.15 뉴욕주 헴스테드 호프스트라대 TV토론회(Hofstra 대학)"
오늘(5일) 이혜민 외교통상부 FTA 교섭대표는 "오바마 후보는 원칙적으로 보호무역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과 이명박 행정부의 '일방통행식 관점'이 아니라 '노동의 관점'에서 자유무역협정을 평가하는 지극히 제한적인, 그리고 신중한 차원의 자유무역주의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비준을 통해 미국을 압박하겠다는 이명박 행정부와 한나라당의 바램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2. 상하 양원 모두 민주당 지배로 돌아선 미 의회
민주당은 2006년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통해 미국 의회에서 다수당 지위를 확보했다. 얼마간의 정책조정기간을 거친 민주당은 의회차원의 신통상정책을 내걸고 공화당 행정부와 협상을 개시했다. 2007년 5월 10일 미 행정부와 의회는 신통상정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노동과 환경 분야에 국제기준을 적용하는 일이었고, 한편으론 자유무역의 확대가 미국 내 고용 및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4월 2일 한미자유무역협정이 타결됐다. 그럼에도 미국은 신통상정책에 따라 '재협상'을 요구했다. 정부는 '추가협의' 혹은 '추가조정'이라는 용어로 변명했지만, 사실상 '재협상'이었다. 협상의 균형은 이미 깨지고 말았다. 이명박 행정부는 자동차 분야 등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미국 새 행정부의 재협상 요구가 협상 전체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균형이 지난 재협상을 통해 이미 깨어져있음을 애써 망각한다. 당시의 재협상은 노동과 환경 분야 등 핵심쟁점에 대한 협상이었고, 미국의 일방적 요구는 사실상 전면수용됐다.
오늘(5일) 미 의회 선거결과는 상하원 모두에 걸쳐 민주당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2006년 11월 이후 민주당 지배 하의 미 의회가 통상분야에 있어서 좀 더 보호주의적인 혹은 '제한적 자유무역주의'적인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그 변화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앞서 언급한 신통상정책이 있었다. 올 4월에는 콜롬비아 정부의 노동탄압 문제가 미국 노동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 무역촉진권한(TPA) 적용을 거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월에는 무역협정을 미국 이익에 맞게 개정할 수 있도록 하는 TRADE Act 법안 등 일련의 보호무역주의 경향을 띤 법안이 제출되었다. 또다른 법안으로는 무역협정의 효과적 집행을 담보하고 무역법 집행을 강화하는 TEA 법안, 자국산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업구조조정 촉진하고 근로자를 지원하는 TGAA 법안 등이 의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기획재정부조차도 지난 8월 5일에는 "미 민주당이 상하 양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이래 보호무역주의적 입법 사례가 크게 증가해 부시 행정부의 자유무역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1995년 WTO 체제가 출범한 이후 미국은 일방적 무역조치와 병행하여 WTO 분쟁해결정책절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럼에도 1997년 10월 미 클린턴 행정부는 미 통상법 슈퍼301조를 발동하여 한국의 자동차시장을 우선협상국관행(PFCP; Priority Foreing Country Practice)으로 지정한 바 있다. 미국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서고 나면 한국이건 일본이건 공화당 행정부보다는 훨씬 더한 무역마찰을 빚어온 선례가 있다.
한국 정부는 이런 역사적 경험과 최근 미 의회의 변화를 역시 애써 외면하고 있다.
3. 오바마의 시급한 과제 안에 FTA는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미국은 국제적, 국내적으로 위기에 처해있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한 일방주의적 국제질서는 결국 미국을 고립시켰다. 최근의 금융위기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의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종언이었다. 양극화 문제는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했고, 의료보험의 사각지대는 무려 4600만명에 이르렀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미국 사회를 철저하게 분열시켰고, 정치적 대립 또한 격화되고 있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미국은 새로운 변화, 대전환을 요구하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버락 오바마 당선자가 있었다.
미국이 내년 가을쯤 한미FTA를 처리할 것 같다고? 우리가 선비준해서 미국을 압박하자고? 미국의 재협상 요구가 없도록 만들겠다고? 참으로 진정성 없는 명분과 행동의 나열일 뿐이다. 이 또한 또다른 불신을 낳아 그렇지 않아도 신뢰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이명박 행정부를 또다른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미국은 역사적 대전환을 꾀하고 있다. 먼저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념할 것이다. 지난 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권교체기와 유사한 상황이다. 그때 가장 국민들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바랬던 건 무엇이었나? 금융위기의 극복이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금 미국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극복에 최우선 과제가 있다. 최소한 6개월은 이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 다음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으로서의 오바마 대통령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짜는 데 일정기간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여기에 북핵문제 해결도 포함된다. 그 다음은 국내문제 해결이다. 세금을 인상하여 재원을 만들고,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국가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 가능성이 있다. 통상문제는 이때쯤 거론이 시작될 것이다. 금융위기를 안정시키고 미국의 새로운 국제적 위상을 정립한 다음 다시 눈을 안으로 돌려 국내적 불안정을 해소시키고 그런다음 새로운 통상정책에 대한 입안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서두를 일이 아니다. 미국의 정책 변화를 지켜보아야 한다. 미국의 변화된 정치지형을 바탕으로 미국의 외교안보정책과 통상정책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그리고 그 영향이 우리에게 어떻게 미치게 될지를 차분하고 신중하게 검토하는 게 옳다. 재협상으로 갈 것 같으면 이미 균형이 깨져있는 협상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재협상에 전력을 기울인다. 협상이 이대로 갈 것 같으면 미국과 조기비준에 대한 동의를 구해가면서 국내적으로 취약산업에 대한 보호대책을 차질 없이 밀어가는 쪽으로 중점을 옮겨가면 된다.
물론 내 지론은 좀 더 근본적인 쪽이다. 한미 FTA는 우리가 지금까지 일구어 온 헌법질서와 경제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헌적 협상이라는 것이다. 결코 단순한 통상협정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신중하자는 것이다. 노무현 행정부는 그저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논리 하나만으로 일방적으로 한미 FTA를 밀어붙였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내적 협상은 아예 없었다.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황금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차분히 한미FTA가 갖는 헌법적 의미, 정책적 의미, 경제적 영향과 피해대책에 대해서 차분하게 토론하고 뒤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이명박 행정부는 뭐가 그리도 급할까? 일방적 비준동의만으로도 경제가 살아난다고 믿고 있는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나서 그렇게도 서두르는가? 조용히 태평양 너머를 직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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