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자유무역협정(FTA)를 비준할 경우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가 당장 살아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우리의 일방적인 비준만으론 아무런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다 알면서도 왜 자꾸 이러는 걸까? 그리고, 우리가 먼저 비준하면 미국이 압박을 받는다고?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아예 봉쇄할 수 있는 카드라고? 이 또한 거짓인 줄 다 알면서 왜들 이러는 걸까?"(본인의 프레시안 이전 기고 "'한미FTA 먼저 비준해 미국 압박하자고'?" 참조)
"최근까지 미 무역대표부(USTR)에서 정책담당 국장을 역임했던 나오타카 마추카타(Naotaka Matsukata) 박사의 말이다. '미 의회는 FTA를 비준할 때 오로지 국내 사정만 따져본다'고 말했다. 한국 국회가 먼저 비준했다고 해서 미 의회나 차기 미 행정부가 압박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박사는 '한국 국회가 한미 FTA를 미리 통과시켰는데, 미 의회의 요구로 한미 FTA가 개정될 경우 한국 국회는 개정된 한미 FTA를 다시 통과시켜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한국 국회가 한미 FTA 비준안을 상임위에서만 처리하고 미 의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게 순리라고 충고했다"(조선일보 11월 1일)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자유무역협정 전반에 걸쳐 어느 정도의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자신의 저서인 '담대한 희망'에도 이런 부분은 충분히 드러난다. 이미 오바마 후보는 2004년 상원의원 출마 당시 주요 경제공약으로 "미국이 체결한 무역협정의 내용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포함시켰다.(마틴 더퓌/케이스 보클먼 저, 「오바마 론」, 73면)
국내외 상황이 이렇다. 그럼에도 국내의 일부 시각은 한미 FTA의 재협상을 이야기하는 오바마 후보의 발언에 대해 블루칼라 노동자를 공략하려는 일종의 선거전략으로 평가절하하곤 했다. 하지만 내 평가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바마 캠프의 본심은?
10월 29일 워싱턴 DC에서는 한미경제연구소(KEI) 주최 토론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 캠프의 프랑크 자누지(Frank Jannuzi) 한반도 정책팀장은 "(FTA) 개정을 요구하는 것은 전술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 현재의 한미 FTA는 미국 제품이 한국 시장에 효율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장하지 않기에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것이 오바마 캠프의 본심이다.
이쯤되면 한나라당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 봐라, 우리가 협상을 잘했지 않느냐'는 식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말이다.
"자동차 산업 같은 것, 우리 자동차 수출이 아주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체결이 됐다, 오히려 미국에서 자동차 수입 문제 등에 대해서 재협상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쐐기를 박기 위해서라도 빨리 우리가 비준 동의를 해줘야 합니다.(10월 1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비판적 관점에서 정부의 한미 FTA 자동차 부문 협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자세히 거론하지는 않겠다. 몇 가지만 보자. 자유무역협정에 안달이 난 지난 정부는 협상에 들어가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완화'를 선물했다. 정부는 자동차 분야를 한미FTA 체결의 대표적인 수혜품목으로 평가하지만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약 8억 달러 증가 수준이다. 2006년 기준으로 9.3% 정도의 수출증대효과일 뿐이다. 그런데 환율은 변동하고 있고, 미국 내 현지생산은 급속도로 늘게 된다.
"2006년 기준 현대자동차의 대미수출물량은 24만대이고 미국 현지생산은 23만 6천대였다. 실질적으로 관세 철폐의 이득이 없다는 말이다"(유태환 외, '양극화 시대의 한국경제', 58면)
국내적으로는 배기량 기준의 자동차 세제가 개편됐다. 소형차 우대정책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조세연구원에 따르면 총 4천억원의 세수가 감소한다. 큰 차를 타던 사람들의 세금이 교통세나 주민세의 명목으로 일반 시민에게 전가된다. 세제 개편 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분쟁해결에 있어서 신속성과 관세환원 보복조항도 엄청난 독소조항이다. 이런데도 자동차 부문 협상이 잘됐고 우리에게 가장 큰 수혜품목이라니 답답할 노릇이다.
더구나 자동차 부문은 이미 한 차례의 '전면적 재협상'을 거쳤다. 물론 정부는 '추가협상'이라는 말도 못쓰게 했고 '추가협의'라고 강변했다. 그래봤자 '재협상'이다. 이 부분에 대해 송기호 변호사는 최근 저서 「곱창을 위한 변론」에서 놀라운 사실을 분석해 냈다. 참고로 2007년 4월 1일 협상타결이 있었고 그후 노동, 환경 등 분야에 대한 재협상을 거쳐 6월 30일 최종서명본이 발표됐었다. 그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한미FTA 서명본의 극적인 변화는 자동차에 있다. (중략) 미국은 서명본 19장에서 노동기준과 무역보복을 연계시킴으로써 한국 자동차 산업의 내부 노무관리를 정면으로 겨냥하였다. (...) 미국이 한미 FTA 서명본에 국제노동기구의 핵심 노동기준인 단결권, 집단교섭권 보장조항을 집어넣은 후, 한국 자동차 산업이 노동자의 권리를 이 조항 수준으로 보장하지 않은 결과 한국 차가 미국에서 싼값에 팔리고 있다며 노무관리의 시정을 요구하는 수단이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무역 보복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노동과 무역의 연계이다. 이러한 미국의 성공은 기념비적이며 역사적 사건이다.(한미 FTA 협정문, 제19.2조, 주석 2, 제19.7조)"
그렇다. 미국으로서는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으로서는 거의 모든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눈총을 받을 희대의 비극이다. 무역과 노동의 연계는 94년 WTO협정에서도, DDA에서도 아예 의제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다시 송기호 변호사의 말이다.
"그러나 미국은 마침내 2007년 6월 30일 한미FTA에서 무역과 노동기준의 연계에 성공하였다. 세계 15대 무역국 안에 들어있는 나라 가운데 오로지 한국만이 미국으로부터 노동과 무역의 연계기준을 당했다. 나아가 미국은 무역 외에 투자와 정부조달분야에서도 노동부문을 연계시켰다. 미국 통상정책의 성공이었다. 그리고 미국 자동차 산업의 성공이었다.
이래놓고도 정부는 연계조치를 "무역과 투자에 영향을 주는 경우로 분쟁 절차 대상 한정"이라며 거짓말을 해댔다.(2007년 6월 30일 국정브리핑. 추가협의 '전략적 역제안' 실익 5가지)
불가피한 재협상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려는 제조업 중심주의로 향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시장에서 국가로 권력을 이동시키고 노동시장을 강화시킨다. 오바마 후보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일관된 신념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다 지금 미국 자동차 시장은 큰 위기에 빠져있다. 미 자동차 빅3 중 GM과 크라이슬러가 합병을 추진 중이다. 문제는 인수자금이다. 자동차 업계를 구하기 위해 미시간 등 6개주 주지사들은 연방정부에 구제금융의 사용을 요청했다. 월스트리트저널 30일자 보도다. 이것이 미국 자동차업계의 현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최소한 자동차 부문을 비롯한 한미 FTA 재협상은 '현실'이다. 협정이 발효되기도 전에 두 차례의 재협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전적으로 미국 측 요구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재협상에 대한 카드를 준비하는 일이다. 정부가 맨처음 한미FTA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홍보했던 것처럼 관세 인하에 따라 우리 제조업의 활로를 뚫고, 미국의 일방적인 무역구제조치를 개선하고, 전문인력의 미국 일자리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역구제조치는 단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 전문직 비자쿼터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그런데 1차 산업과 3차 산업의 우리 시장은 완벽하게 빗장을 열어주었다.
현명한 정부라면 그때 협상에서 제대로 이루지 못한 카드들을 준비하고 미국의 재협상 요구에 맞불을 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이 정해놓은 자신들의 시간표, 자신들의 협상요구조건에 쫓기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은 '선비준'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선비준해봐야 또 재협상이고, 또 재비준이다.
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미 FTA 당정 태스크포스(TF)를 맡은 황진하 제2정조위원장의 말이다. "쇠고기 협상 때 미국이 재협상 얘기를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주권국끼리 합의한 것은 마음대로 깨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되길 희망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