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제재 2270호의 숨겨진 함의는 제재 강도보다 미중이 제자리를 찾은 동시에, 제재와 협상이 함께 작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가 약속대로 제재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을 경우 합의정신의 위배라는 것과 동일하게 한미일이 협상에 제대로 나서지 않는 것 역시 합의 정신에 위배된다.
유엔제재 2270호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제재'라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북한의 민생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48항, 대화 유도를 위한 것이라는 49항, 그리고 구체적으로 6자회담의 재개를 위한 제재라는 것이 50항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이들 합의 조항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미국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미국은 평화협정을 중국으로 하여금 제재안에 합의하게 만들기 위한 유인으로 간주하면서 제재와 대화의 병행을 시사했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협상 직후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는 지속적 응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테이블에 나오고 협상에 응한다면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밝혔었다.
합의의 이면에는 사드 배치 문제도 고려되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을 향해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듯 사드 배치 의사를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이후 중국은 북핵을 빌미 삼은 사드 배치를 저지하기 위해 제재안에 합의한 측면이 있다.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케리는 "아직 사드의 한국 배치는 결정된 바가 없고 미국이 사드에 목말라있거나 그런 기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한국 등 우방국에 대한 핵위협이 사라진다면 사드를 배치할 필요성도 없어진다"라고 함으로써 사드를 둘러싼 한미중의 초반 신경전이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같은 시기에 사드 배치를 위한 한미 양국의 실무 협상이 잠정 중단됐고, 강경 일변도의 한국이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북한도 2015년 이래로 평화협정-비핵화의 교환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 고도화에 매진함으로써 교환 가능성에 대한 행위자들의 타협점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한미일의 비핵화 선행론은 물론이고, 북한은 중국의 병행론 조차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또 김정은이 7차 노동당대회에서 '동방의 핵대국'임을 선포하면서 핵보유는 더 이상 어떤 것과도 교환 등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교환을 하더라도 북한이 원하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25년간의 경험으로 자신의 핵 폐기가 가지는 비가역성의 불리함, 즉 평화협정은 언제든지 파기하면 그만이지만, 핵 폐기는 복원이 훨씬 더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핵무기 고도화 및 다종화로 북한의 몸값이 높아지고 비핵화는 더욱 요원해졌다는 것은 타당한 분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해졌다고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은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의 가능성은 없어졌다는 전제하에 제재 일변도를 고집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한국은 처음부터 제재 일변도였고, 미국은 중국과 협상 당시 전진된 자세를 가지는 듯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대북제재 및 압박을 강화했다. 사실 미국으로서는 북핵 문제가 일종의 딜레마다. 북한 핵이 미국의 세계 비확산 레짐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는 점에서 협상을 통해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반면에 북한의 핵 위협은 대중 견제를 위한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정당화 및 가속화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점을 외면하기 힘들다. 미국의 이러한 고민이 반영된 것이 올해 초반의 타협적 분위기에서 중반의 사드 배치라는 강수로 가게 된 원인으로 판단된다.
한반도 사드배치는 한미 당국이 지난 7월 8일 전격적으로 결정함으로써 2월 말에 이어 미중 관계의 주요 변수로 재부상했다. 결과적으로 연초 미중 합의에서 보인 사드 배치에 대한 미국의 유연성 발휘는 전술적 변화였을 뿐 전략적 변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드 배치는 유엔 제재 2270 체제를 조기에 약화시켜버렸다. 특히 중국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제재 참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나 분석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력화된 것이다. 제재의 효과가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제재 효과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한국 정부는 줄곧 최소한 6개월을 지켜봐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는데, 그 시간마저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드배치 결정은 협상과 제재의 병행이라는 미중 합의 및 유엔 제재 2270 체제에 대한 한미의 조기 파기 및 일방적 파기의 성격을 가진다. 비록 중간에 북한의 중거리 미사일 실험 성공이 있었지만 이를 정당화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진짜 배경은 무엇일까? 동북아 전체 역학과 유관국들의 국내 정치 역학이 같이 얽혀있다. 우선 미중 관계에서 최근 미국의 공세가 심상치 않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8년을 돌아보면 전반기 중국의 자신감에 비해 미국의 수세가 두드러졌다면, 후반부에서는 미국의 공세가 두드러졌다.
전환점은 2013년 6월 캘리포니아에서의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창한 신형 대국관계론은 중국의 희망과는 달리 미국의 대중 경계심을 오히려 더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의 경제적 어려움과는 달리 미국의 경제는 견고한 흐름을 보여 왔고, 셰일가스 혁명 등으로 대중 압박의 고삐를 쥘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에 따라 미국은 대북 제재, 동중국해, 남중국해, 무역 및 환율 등의 전방위적 압박을 가했다.
특히 동북아는 북핵을 고리로, 동남아는 남중국해를 고리로 중국을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노골화하고 있다. 지난 6월의 미중 경제 전략 대화에서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은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을 두고 "이런 행동을 지속할 경우 중국은 만리장성 안에 고립될 것"이라고 까지 강력하게 경고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드 배치 역시 강화된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3각 군사협력의 본격적 구축의 일환이다. 이는 당연히 중국에게 전략적 위협일 수밖에 없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한미일 공조를 통한 대중 봉쇄의 본격적 시동이며, 동시에 그동안 공을 들여온 중국의 대 한국 외교의 실패를 의미한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한중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론한 소위 '조건부 사드 배치론'은 연초 케리의 조건부 배치론에서 그 효력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직 사드 배치가 현실화되지 않았고, 한국 내의 반대 여론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 너무 밀어붙일 경우 한국에서 반중 전선이 형성될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당분간 이중 전략을 유지하려할 것이다.
한편, 한중일의 국내 정치 역학도 주요 변수다. 예상보다 전격적으로 배치를 결정한 이면에는 한미 양국의 국내 정치 일정과 관련이 깊다. 안보 포퓰리즘의 측면에서 사드를 제2의 NLL로 활용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의도가 다분하고, 미국 역시 한국의 정권 교체 가능성에 대비해 조기 배치를 추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동북아 6개국 모두의 대외 정책이 국내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강경한 신냉전적 대외 정책을 내세움으로써 대내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겠다는 공통적인 경향을 띠어 왔다. 그런 면에서 사드 배치는 물론이고, 북핵, 남중국해, 동중국해, 대만 문제들은 향후 동북아에 '강자들의 전성시대'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이 심화될수록 가장 타격을 입을 것은 한국일 수밖에 없다.
한국이 역내에서 이익을 관철시키는 방법은 근거 없는 북한붕괴론을 내세워 대화를 거부하고 친미 편승을 통한 대북 제재에 올인하는 전략보다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미중의 패권적 관할 체제를 거부함으로써 외교 이니셔티브를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에 있다. 현재의 대미 편승외교로는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이해상관자(stakeholder) 역할을 전혀 할 수 없고, 미중의 이익에 종속되거나 양쪽으로부터 효용성을 상실함으로써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