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인식 지평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가 지금처럼 북한을 대하면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도 어렵지만,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사드는 쉽게 철수시킬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 돈으로 사드를 구입해서 우리 기지에 가져다 놓을 경우에는 마음만 먹으면 치워버릴 수 있지만, 미국 돈으로 갖다 놓은 무기에 대해 한국 대통령이 철수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고 꼬집었다.
정 전 장관은 "사드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미국의 세계 전략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은 유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사일 방어체제(MD)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MD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전체 흐름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정책 대안을 선택할지 탐색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세계 정세와 동북아 정세, 북한을 조그마한 '대롱'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면서 "미국의 아시아, 유럽, 중동 전략과 여기에 대응하는 중국 및 러시아의 움직임 등을 보면서 한반도 정세를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사드 배치를 철회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사드 배치를 지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담에 함께한 이병철 평화협력원 부원장은 "한국의 내년 국방 예산을 보니 주로 PAC-3와 킬체인 등에 많이 배정돼있었다"면서 이러한 점을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 부원장은 "올해 말에 미국의 차기 정부가 들어서고 내년에 한국도 대선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인 교체기를 맞이한다. 이 때 사드 배치 대신 다른 무기를 구입하는 것으로 미국의 사드 요구를 무마시키는 일종의 시간 끌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모두를 어느 정도 달래기도 하고 만족을 주기도 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면서 "사드 배치를 지연시키면서 중국에게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무기를 좀 구매해 주는 식으로 시간을 끌다가 미국과 한국 정치 상황에 변화가 생기면 사드 배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담은 지난 6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의 사회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이병철 평화협력원 부원장이 참여했다. 다음은 대담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에게 "북핵 및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면 (사드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라며 '조건부 사드 배치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정세현 : 인식 지평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발언이라고 봅니다. 전 지구적인 국제 정치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하는데, 전혀 그런 인식이 없는 겁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 사드를 가지고 있다가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철수시킨다고요? 박근혜 정부가 지금처럼 북한을 대하면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도 어렵지만,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사드는 쉽게 철수시킬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돈으로 사드를 구입해서 우리 기지에 가져다 놓을 경우에는 마음만 먹으면 치워버릴 수 있지만, 미국 돈으로 갖다 놓은 무기에 대해 한국의 대통령이 철수 여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한국은 그저 장소를 결정하고 제공하는 것 뿐입니다.
게다가 사드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미국의 세계 전략을 살펴봐야 합니다. 미국은 유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사일 방어체제(MD) 구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MD 구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체 흐름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정책 대안을 선택할지 탐색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세계 정세와 동북아 정세, 북한을 조그마한 '대롱'으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옆에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핵과 사드 문제를 판단하다 보니 이런 발언이 나오는 겁니다. 북한이 붕괴할 것이다, 지난 3월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식의 착시 증상도 여기서 비롯되는 겁니다.
프레시안 : 조건부 사드 배치론을 언급한 이유로 중국에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서달라'라고 압박하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올라간 것도 이런 기대가 깔려 있었다는 분석이 있는데요.
정세현 : 박 대통령이 천안문에 올라가서 한 번 손 흔들고 웃어주면 중국이 뭐든지 들어줄까요? 강대국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미국의 아시아, 유럽, 중동 전략과 여기에 대응하는 중국 및 러시아의 움직임 등을 보면서 한반도 정세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사드 배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참모들이 사드를 들여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했어야 합니다.
이병철 : 올해 3월 미국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만났을 때, 시 주석은 미국이 한국 내에 사드 배치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같은 입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드 배치는 미국과 중국 간 강대국 정치인데, 박근혜 정부는 마치 한국이 중국을 설득하면 해결될 것 같은 호도 내지 잘못된 인상을 국민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사드 배치의 이유로 북한의 핵을 이야기하지만, 강대국 정치에는 안 통하는 상황입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를 한국이 자발적으로 결정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미국이 하라는 대로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문제는 이번에도 확인됐지만 시진핑 주석은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했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 국가가 펼치는 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한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반대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런 와중에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강행할 수 있을까요?
정세현 : 견결한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현실화하면, 중국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겁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국가 체면에 관한 사안입니다. 국가 원수가 직접 반대한다고 했는데도 무시하고 한미 양국이 밀어붙였다면 중국은 이를 만회할 무언가의 행동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이 미국을 바로 공격하는 것은 이후의 보복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만만한게 한국인 셈이죠. 사드를 배치하는 행위의 주체는 미국이지만 장소를 빌려준 한국을 제재함으로써 미국에게도 정책을 바꾸도록 만드는 겁니다. '기둥 때리는 것은 대들보 울리려는 것'이라는 옛 속담이 있는데 한국을 때리면 미국에도 자신들의 뜻이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병철 : 중국 <신화통신>의 오늘 자 논평을 보면 앞 부분에는 한중 간에 전략적 대화를 나눴다고 설명했지만, 이후에는 시진핑 주석이 사드 배치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의 입장은 변하지 않은 겁니다.
물론 중국은 내년이 한중 수교 25주년이기 때문에 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사드 문제를 가지고 끝장을 보려는 것은 한중 간에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중국 입장에서도 굳이 한국을 자극해서 한미일 3국을 지금보다 한층 결속시키는 전략을 쓰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의 조정은 있을 것으로 봅니다.
프레시안 : 일본에 X밴드 레이더를 설치한 것이 2013년인데 당시에는 중국이 반대를 안했다고 합니다.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는 건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대놓고 반대를 하느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병철 : 중국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과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중국을 적대국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을 주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은 일본에 설득이나 요청을 해봐야 먹히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한국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이고요.
협상하자는 중국, 북한-미국 대화하라는 뜻
프레시안 : 중국은 사드 배치에도 반대하지만, 북핵 문제도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자고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왕이(王毅) 중국 외교 부장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의 맞교환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실현 가능할까요?
정세현 : 중국뿐만 아니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러시아나 중국 입장에서는 북핵 문제가 사드 배치에 핑계가 되기 때문에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해서 6자회담이 열리고 북핵 문제가 해결 수순을 밟기 시작하면 한국도 나쁠 것은 없죠.
프레시안 : 그런데 중국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을 명시하지 않고 '협상'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6자회담을 열 수 있는 외교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요?
정세현 : 중국에서 말하는 협상의 형식이 4자일수도 있고 북미 양자일 수도 있다는 점이 숨겨져 있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지금 북핵 문제는 북한과 미국 간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뭔가 틀을 짜야 4자든 6자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왕이 부장이 6자회담을 특정해서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역사적 전례를 봐도 그렇습니다. 지난 2005년 9.19 공동서명 이후 1년 만에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말 미국과 북한은 접촉을 가졌고 이후 그 다음해 2.13 합의가 나왔습니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있기 전에도 1993년 북한과 미국 양자 간 비공식 접촉이 있었습니다.
또 실제 6자회담을 열어 놓고도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는 미국이 북한과 양자 접촉을 한 뒤에 6자회담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중국은 미국이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일 수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 양측이 먼저 틀을 잡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중국이 끼어들면 일이 더뎌질 수 있다는 것이죠. 러시아가 이야기하는 협상도 이러한 맥락이었을 겁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은 마치 사드 배치를 기다렸다는 듯이 노동 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등을 발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회담이 가능할까요?
정세현 : 북한은 회담이 열리지 않는 동안에 군사적 기술을 높여서 긴장을 조성하면 6자회담 관련 국가들이 몸이 달아서 협상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이런 패턴으로 움직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담이 없는 시기를 노려서 나중에 회담이 이뤄질 때 몸값을 높이려는 전략입니다.
지금 김정은이 핵 무력을 증강하라면서 강도 높은 지시를 내리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북한은 중국 같은 나라가 몸이 달아서 협상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까지 중국과 함께 움직이면 협상 분위기 조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위 '막판 스퍼트'를 올린다는 계산으로 연달아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현재 동북아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드 갈등이 자신들에게 나쁘지 않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핵-경제 병진 노선을 더 확고하게 끌고 나가면서, 자신들의 협상력과 몸값을 높일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도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 일정을 보더라도 내년 봄까지 협상이나 회담이 열리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두 달 뒤면 새로운 정권에게 넘겨줘야 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하려 할까요?
정세현 : 미국의 다음 정부가 들어서면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겁니다. 새 정부 들어서고 전열을 정비하려면 내년 6월 정도가 돼야 할 텐데, 이 시기를 대비해서 북한은 핵 무력 증강 속도를 높일 것입니다.
결국 정부가 북한의 핵 미사일을 없애기 위해 제재를 세게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거꾸로 이러한 접근은 북한의 협상력만 높여준 셈입니다.
프레시안 : 미국 대선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중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사드를 비롯해 대북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정세현 : 물론 외교정책에서 지도자의 성향이 중요한 변수이긴 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미국이 국제 정치를 끌고 가는 데 있어서 동북아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가치는 정권과 무관한 측면이 있습니다. 환태평양 지역의 국내총생산(GDP) 총액은 유럽이나 대서양 지역보다 훨씬 규모가 큽니다. 그래서 힐러리든 트럼프든 아시아 지역의 중요도에 맞춰서 미국 국가 이익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펼 것입니다. 미국은 중국 견제는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오바마 정부가 내걸은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은 설사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유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 태평양을 중국에 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시 대통령 집권 당시 미국은 동유럽에 사드를 배치하려고 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배치 계획을 축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란 핵 문제가 해결 기미가 보인다는 정세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북아에도 정세 변화가 있으면 미국의 다음 정부가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병철 : 미국의 외교정책을 크게 펼쳐 놓으면 한반도 문제는 사실 엄청나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 대외 정책의 주요 지점은 중동, 중국, 유럽 등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적어도 한반도만 본다면 정책적인 측면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입니다.
물론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로 보면, 대북 강경책이 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실제 힐러리가 집권할 경우 국무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웬디 셔먼 전 국무부 정무차관 역시 상당한 매파입니다.
사드 배치를 막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프레시안 : 어쨌든 이번 동방경제포럼과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이 다시 한 번 확인됐는데요.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를 계속 밀어 붙일까요?
이병철 : 사드 배치 타이밍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내년 국방 예산을 보니까 40조가 배정돼 있는데, 주로 PAC-3와 킬체인 등에 많이 배당돼있었습니다. 고고도 정찰 능력 강화, 패트리어트 성능 개선 등을 포함해 지난해 대비 몇 천억이 늘어났습니다. 이건 미국 입장에서 나쁜 소식은 아닙니다. 미국 무기를 그만큼 많이 살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말 미국의 차기 정부가 들어서고 내년에 한국도 대선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인 교체기를 맞이합니다. 이 때 사드 대신 다른 무기를 구입하는 것으로 미국의 사드 배치 요구를 무마시키는 겁니다. 일종의 시간 끌기 전략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사드는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병철 : 지금은 아니지만 향후 사드 배치 포대를 늘린다고 하면 우리가 돈을 주고 구매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 써보라고 샘플같이 주는 것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직접 구매하라고 할 수 있죠.
프레시안 : 지금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좀 끌고, 그 와중에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모멘텀을 만드는 것이 사드 배치를 막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인가요?
이병철 : 미국과 중국 모두를 어느 정도 달래기도 하고 만족을 주기도 하는 방안이라고 봅니다. 사드 배치를 지연시키면서 중국에게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무기를 좀 구매해주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도 기분 좋게 해주고 중국도 만족시켜줄 수 있고, 그러다가 미국 정권에도 변화가 생기고 한국의 대선도 진행되면 사드 배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계기도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 사드 배치를 지연시킬 가능성이 있을까요? 2014년 이후로 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에 매진하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협상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책을 유턴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병철 : 유턴까지는 아니더라도 박근혜 정부도 조금의 변화는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을 겁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도 확인한 상황에서, 이대로 가면 분명히 한국에 피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중국이 우리나라와 최대 무역 국가인데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무시하고 무조건 밀어붙이기에는 정치적인 부담이 너무 큽니다.
프레시안 : 1987년까지는 민주화라는 목표가 있었고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정책, 김영삼 대통령은 선진국 진입,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 등 나름의 목표와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이후에는 이러한 목표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이면서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돼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남북 관계를 파탄내면서 북한 관리에 사실상 실패했고 국내 정치 역시 파탄을 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정세현 : 실제 집권 세력들은 국내 정치가 파탄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남북 관계를 망치면서 국내 보수화가 촉진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만 판단할 겁니다.
프레시안 : 2010년 5.24 조치 이후로 북한 위협 내지 붕괴를 국내 정권 안보의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햇볕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을 가졌다는 측면과 관련해 야당이 효과적인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 붕괴론과 한미동맹 신성 불가침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세현 : 한미동맹 지상주의를 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 붕괴론이 한국의 대외 정책과 대북 정책의 전제가 돼 있는데, 이 부분 만큼은 야당이 확실하게 연구해서 국민들한테 제대로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 외교 안보 측면에서 수권 정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보입니다만, 만약 현재 박근혜 정부가 북핵 협상을 하자고 나선다면 활로가 마련될까요?
정세현 : 사실 우리는 북한이 핵을 이용해 받아내려는 반대 급부를 줄 수가 없기 때문에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입니다.
다음 정부에서 설사 보수 세력이 다시 집권하더라도 북한 핵의 최대 피해자인 우리가 나서서 북한과 미국을 설득하고 여기서 접점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여기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한미 동맹을 이용해야 합니다. 동맹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미국도 우리말을 들어 달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동맹 좋다는 게 뭡니까? 공조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희생시키면서 미국이 얻으려는 이익을 조금만 줄이면, 우리는 그 틈으로 살 수 있다고 미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사실 한국의 위상이 김영삼 정부 이후에 상당히 커졌는데, 지금은 높아진 위상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대북관에 따라 대미관이 결정됩니다.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국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북한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군사적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통해 북한의 대남 군사 도발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북 정책을 펼치면 미국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적대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답은 군사적인 조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미국에 의존하고 무기를 더 많이 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업습니다.
즉 북한을 통일의 상대로 보느냐,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미국을 활용하는 측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경도돼있기 때문에 제재와 압박 만을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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