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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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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2016년 10월 섬학교 <여서도 돌담 특집>

돌과 바람의 왕국,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10월 1(토)∼2일(일), 제52강으로 완도 앞의 전설 같은 섬 여서도로 떠납니다. 완도에서는 하루에 한 번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낙도라 심야인 10월 1일 0시에 서울을 출발해 여서도로 갑니다.

여서도는 한국에서 돌담이 가장 아름다운 섬입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입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초행의 나그네는 길을 잃고 헤맬 정도지요. 바람 때문에 밭들까지도 돌담을 쌓았는데 그래서 마을의 돌담들은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성곽 같습니다.

오로지 이 돌담 하나 보기 위해 여서도로 갑니다. 여호산 트레킹 길도 있지만 가을에는 뱀들이 지천이라 산에 오르기 위험합니다. 그러니 이번 여서도 길은 오로지 마을의 돌담을 거닐거나 낚시를 하거나 해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아무튼 최대한 한가롭게 지내다 올 예정입니다. 트레킹을 원하는 분은 이번에는 참아주세요 민박집이 작아 선착순 25명만 함께 합니다. 완도에서는 구계등 해변과 상록수림도 거닐다 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답사지인 <돌과 바람의 왕국, 여서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돌과 바람의 나라

완도항을 출항한 섬사랑3호는 청산면의 여러 섬들을 거처 여서도로 향한다. 여객선은 완도와 여서도 사이를 하루 한 번 왕래하는 정기선이지만 난바다의 드센 파도로 결항이 잦다. 떠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배다.

완도에서 여서도까지 직항로는 40여 킬로. 여객선은 쾌속선으로 50분 남짓이면 족할 거리를 세 시간에 걸쳐 항해한다. 여서도는 완도군의 200여 개 섬들 가운데서도 낙도다. 육지의 오지처럼 바다의 낙도를 가리는 지표는 거리가 아니라 접근성이다. 소모도와 대모도, 장도, 청산도 등의 기항지를 돌고 돌아 여서도에 입항한 배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서둘러 회항한다.

무엇일까. 나그네를 섬으로 데려온 것은. 돌집들, 민가의 담장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 이 섬은 돌과 바람의 나라다.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섬은 마치 사라진 잉카나 이스터 섬의 유적처럼 경이롭다. 이스터의 거석 문명은 붕괴했지만 여서도의 돌 문명은 현존한다. 돌들이 나그네를 섬으로 이끌었다. 이런 섬의 모습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성벽처럼 높고 튼튼한 돌담 덕에 섬은 무사했다. ⓒ강제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나그네는 길을 잃기 쉽다. 이 나라 어느 마을, 어느 섬에서도 나그네는 저토록 장대한 돌담들을 보지 못했다. 궁궐의 담장도 이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돌담들에 둘러쌓인 마을은 마치 거대한 성곽도시 같다. 작은 섬에 어째서 이토록 큰 요새가 필요했던 것일까. 왜구나 해적들도 사라진 바다에 막아야 할 어떤 적이 더 있는 것일까.

▲돌집들은 요새처럼 견고하다. ⓒ강제윤

흩어져 있는 돌들을 불러모은 것은 누구일까. 바람이었을까. 바람의 침략 앞에 섬은 늘 불안한 것일까. 섬에서 해적보다 무서운 것이 바람이다. 바람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돌담을 저토록 높이 쌓았다. 돌담들은 거주 공간을 분리시켜 주는 동시에 하나로 굳건히 연결되어 섬을 보호한다. 높이 5미터가 넘는 돌담들은 아무리 큰 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철옹성이다. 바람을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이 큰 바다를 앞에 두고 산비탈에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는 섬의 지형이 이런 주거문화를 만들어냈다.

여서도를 찾는 여행자는 희귀하다. 외부인은 대부분 낚시꾼이거나 공사장 인부들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밭에도 돌담이 있다. 사람이 떠난 뒤 집을 허물고 밭을 만들었으나 돌담은 남겼다. 바람으로 인해 돌담은 소멸을 면했다. 바람은 자기 적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돌담이 없는 곳은 마대자루를 이어 붙여 바람막이를 했다. 고장 나 못쓰게 된 텔레비전조차도 담장으로 쓰였다.

▲밭의 곡식들도 돌담의 보호를 받고 자란다. ⓒ강제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북향한 섬마을, 겨울 해는 짧다. 어두워가는 골목,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어느 집 대문간에 연기가 자욱하다. 할머니는 마른 풀을 태워 아궁이 불을 지핀다. 금새 사그라드는 불길을 뒤쫓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산에 나무가 울창해도 땔감을 하러갈 힘이 없어 장작불은 엄두도 못 낸다. 가마솥 안에는 소먹일 여물이 끓는다. 여서도의 소들은 소막에서 키워지거나 산에 방목된다.

"아저씨는 자망하고, 나는 소 키고. 나가 핵교도 안 댕기고, 암 것도 몰라라우."

노부부가 할아버지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할머니는 소를 키우며 산다.

"시킨 일만 하고 부모네 밑에서 살아나서 나는 참말 암 것도 몰라라우. 말도 배와야 하제. 할지도 몰라라우. 우리 애들은 고생도 징하게 했고. 씨어머니, 씨어머니 모시고 삼시로 애들 겔친디 한 번도 못 가봤어라우. 밥 한 끼 못해 줬어라우."

시어머니 모시고 외딴 섬에 사느라 뭍에 나가 공부하는 자식들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했던 것이 할머니의 평생 한으로 남았다.

"딸 다섯, 아들 둘인디, 다들 잘 사는디 큰 아들만 학굘 댕기다 말아서 군산에서 배하고 산다우. 저는 배 안타면 좋겠다고 합디다마는 지가 공부 안 했는디 인자 후회하면 머 하꺼시오. 안산서는 딸 하나가 산디, 노화도 사람하고 살어라우. 노화 대당리."

낯선 말소리에 할아버지가 뒤 안에서 나온다.

"요새는 당최 도미가 안와요. 전에는 감생이(감성돔)도 많이 들었는데. 아주 안와. 고기 잡으면 완도까지 싣고 가서 경매 하는디, 우리 배로 왔다갔다 하면 세 시간, 딸뿍딸뿍 하면 세 시간 반이 걸리고. 아주 숨이 왔다갔다 하지라우."

풍랑이라도 거센 날이면 물고기를 싣고 완도까지 내왕 하는 뱃길이 저승의 문턱처럼 위태롭기도 하다. 예전에는 제주 해녀들도 많이들 물질하러 왔었다. 그래서 '제주 처녀 여서도 들어가면 애 배야 나온다'는 말도 생겼다. 할머니는 그 시절이 꿈속 같다.

"물질은 제주서도 오고 여그 사람도 하고 그랬어라. 그때가 사람 사는 것 같았지라우. 그래도 제주서 들어와 산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어라우. 큰 제주 작은 제주가 살았었는디 지금은 모다 돌아가셨지라."

큰 제주는 먼저 시집와 산 사람이고 작은 제주는 나중에 시집온 사람이었다. 외딴 섬이지만 여서도는 지금보다 옛날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어장에 고기가 말라 이제 더 이상 외지 배들이 오지 않는다. 완도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바람막이가 없는 난바다의 섬인지라 바다 양식도 여의치 않다. 그러니 섬에 들어와 살려는 젊은 사람도 없다. 섬은 적막하고 섬은 아주 늙어버렸다.

요즈음은 섬의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사람이 죽어도 산이 아니라 완도로 간다. 메고 가 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 나이 들고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찾아 뭍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생애와 하직한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빌고 가제라우."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린다. 섬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어더지요. 어서 가씨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라고 할머니는 등을 떠민다.

▲돌의 왕국답게 외양간도 돌집이다.ⓒ강제윤

바람이 묻어온 이야기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이 출토되었을 정도로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는 길다. 하지만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경이다. 그때 처음 먼 바다를 건너 섬에 정착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갈 곳 없어 숨어들어온 외딴 섬. 섬이 숨어 살 만하다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열흘도 못 갔을 것이다. 섬은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갇혀 지내야 하는 곳이다. 숨고 드러냄은 선택이지만 갇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옛날 이 난바다의 섬에서 바다를 건너는 일은 곧 생사를 건너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때문일까 뭍에서 먼 섬일수록 사람들의 세계관은 숙명적이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직선으로 가면 제주도 조천이 40여 킬로 거리다.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킬로, 완도나 제주보다 가깝지만 서로 왕래하지 않는 두 섬은 전혀 다른 세계의 섬들이다. 옛날에는 여서도를 ‘작은 제주’라 했었다. 거리도 가깝고 풍토도 비슷했던 까닭이다. 여서도의 정정석 이장은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했던 선친을 옆에서 지켜본 탓에 60, 70년대 여서도의 생활상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선친이 여서도 이장을 할 때는 이장을 보좌하던 이 서기까지 있었다. 그는 80년대에 완도로 이주했다가 5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서도는 여서리 200-1번지에서 시작되어 500번지에서 끝난다. 한때 이 작은 섬에 300가구까지 살았다는 증거다. 인구가 줄어 193세대였던 1968년도만 해도 여서국민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지금은 학생이 둘뿐이다. 옛날의 여서도는 제주와 육지의 중간 기착지였다. 여름에는 제주에서 수박이나 과일들을 싣고 가던 풍선(風船)들이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가을이면 전라도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온 풍선들이 바람을 기다렸다. 제주의 고기잡이배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심지어 그 뗏목처럼 위태로운 테우(떼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와 자리돔을 잡아가는 제주 어부들도 있었다.

완도 본토가 완도군 섬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68년 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대도시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60~70년대 여서도 사람들은 완도로 나다니지 않았다.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로 고기를 팔러 다녔고 여수에서 생필품을 사들여 왔다. 보길도와 소안도, 노화도 등 완도 '서삼면(西三面)' 사람들의 생활권 또한 완도가 아니라 목포였다. 섬사람들은 완도-목포간, 완도-여수간 정기여객선을 타고 여수나 목포로 나가야만 서울이나 부산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여서도 사람들이 지닌 동력선만 50여 척이 넘었다. 섬사람들은 잡아온 갈치나 고등어를 '염장질' 해서 경상도 충무와 삼천포까지 팔러 다녔다. 멸치는 젓갈을 담아 강진 사초리나 장흥 삼신포 등에 내다 팔았다. 귀항 길에는 지붕 이을 볏짚과 쌀, 보리 등 겨울 날 곡식을 사왔다. 봄보리 나올 때까지는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갈치 낚시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장비를 직접 가지고 들어와 빵이랑 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박물장사들은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물물교환 해 갔다. 인천의 배들까지 갈치잡이를 오곤 했다.

섬사람들에게는 바다 일 못지않게 농사도 큰 일이었다. 작은 섬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산밭을 개간하여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농사철이 지나면 섬사람들은 약초를 캐다 약초수집상들에게 팔았다. 이장은 오래된 사진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사진 속의 여서도에는 집들이 빼곡하다. 이제 막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의 모습이 어제 같다. 이장은 여서도의 역사를 증거해 줄 자료집이라도 만들어 후세에 남길 생각이라 한다.

섬은 산이다!


여서도의 주산은 여호산(352m)이다. 섬 전체가 여호산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마을은 여호산 산자락에 기대 자리잡았다. 여호산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 섬을 한 바퀴 일주할 수 있다. 산정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작은 섬의 산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산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단단한 채비를 차려야 한다. 산정에 오르니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구름에 쌓여 오늘은 제주도가 보이지 않지만 맑은 날에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여호산 산정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정상에서 하산길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려 kt중계탑 부근에서 길을 찾았다. 당산숲 방향으로 하산을 하다가 해양사의 중요한 유적 하나를 만났다. 여서도 요망대(瞭望臺)다. 돌담으로 쌓아 만든 요망대는 아름다운 돌 건축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군사시설이다. 높은 곳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곳이 요망대인데 감시초소인 셈이다.

여서도 요망대는 조선조 말 대원군 시절 이양선의 출몰을 감시를 위해 만들어졌다. 요망대는 둘레가 약 20m로 바깥 높이가 1.5m 정도인데 내부의 바닥에는 구들장이 놓여 있다. 추운 겨울 요망대를 지키는 봉군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깔아놓은 것이다. 요망대 아래쪽에는 봉군들이 숙식하던 집터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요망대는 일제의 파수대 역할을 했다. 해방 직전까지도 섬 주민들이 봉군으로 차출되어 요망대 근무를 했고 서양 선박을 발견하면 지서의 일본인 순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요망대에서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여서도의 당산숲이 있다. 마을 윗당이다. 당숲의 경계는 돌담을 쌓아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했다. 거목들이 그늘을 드리운 당숲은 신령하기 그지없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섬사람들은 이 당숲을 신성하게 여기고 해마다 당제를 올린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 했던가. ⓒ강제윤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렵고

돌담길을 따라 동쪽 능선을 오른다. 이 섬도 위성 안테나 덕분에 텔레비전 시청이 편리해 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 구형 안테나를 장대에 매달았다. 바람을 피해 여러 가닥의 끈으로 안테나를 붙들어 두었으나 위태롭다. 안간힘을 써도 안테나가 잡을 수 있는 전파란 기껏 한두 개다. 이 길목에는 사람의 집보다 밭이 더 많다. 많은 집들이 폐가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돌담길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낯설고 신비롭다. 현세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간 속을 걷는 듯하다. 당숲을 지나 마을 서쪽 길로 접어드니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에는 돌다리와 돌우물이 온전하다. 뭍에서라면 이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의 집들을 가르는 경계는 돌담이지만 그 돌담은 또한 이웃과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돌담 중간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물건을 주고받고 소식을 나누던 생활의 통로다. 저 통로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바람은 통로를 지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묻어갔을까. 돌담들이 없이도 이 섬에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돌들은 섬의 수호신인 동시에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다.

내연화력발전소를 지나 섬의 서북쪽 산정에 있는 등대로 간다. 무덤들, 산속 유택들의 경계를 가르는 것도 돌담이다. 돌담과 함께 이 섬을 지켜온 또 다른 공로자는 방풍림을 이룬 상록수들이다. 길 가의 동백나무 노거수 한 그루는 이제껏 나그네가 본 동백나무 중 가장 크다. 동백나무는 야물고 단단해서 성장 속도가 아주 느리다. 어른 두 사람이 둘러도 다 못 품어안을 저 정도의 크기라면 5백년이 아니라 천년은 족히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나무들은 섬사람들을 지켜주었으니 이제 사람이 나무들을 보호해야 할 차례다.

동백나무뿐이겠는가. 섬 전부를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두렵다. 이 섬의 보물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릴 것이 또한 두렵다. 그러나 끝끝내 숨길 수 없고 숨긴다고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면 드러내서 모두가 함께 지킬 방도를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섬 자체가 문화재인 이런 섬은 자치단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보호관리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주민들의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섬의 문화유산 보존이 주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비전만 있다면 반대할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람은 이 통로를 지나며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묻어갔을까.ⓒ강제윤

산정에 오르니 멀리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가깝고도 먼 것이 섬들 간의 관계다. 바로 붙어있는 듯이 보이는 저 섬들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섬들은 제각각 육지만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등대로 가는 길목에서 '고래' 한 마리를 만난다. 바위는 금방 바다 속을 헤엄치다 숨 쉬기 위해 솟아오른 고래 같다. 고래바위라 이름 붙여준다. 고래는 실눈을 뜨고 입을 벌려 깊은 호흡을 한다. 나그네도 막혔던 숨통이 비로소 트인다.

여서도 앞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태양광으로 작동되는 무인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쇠울타리가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거셌던 것일까. 건너편 산은 정상까지 밭이다. 지금은 모두 휴경중이지만 비탈밭은 섬살이의 고단함을 증거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비탈 같은 삶이 섬뿐일까. 삶의 비탈은 세상의 도처에 널려있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잠잠해진다. 내일은 다시 배가 뜰 것이다. 이제 나그네는 섬을 떠나 또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어디를 가든 사람은 결코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처음 이 바다를 건너, 섬으로 숨어들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강제윤

10월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0월 1일(토)>
10월 1일 0시(9월 30일 24:00 자정)
서울 출발(9월 30일 23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2강 여는 모임
05:00 완도 도착
06:30 완도항 출발
07:30 청산도 도착
07:30-8:20 아침식사(생선구이)
08:40 청산도 출항
09:40 여서도 도착
10:00-12:30 여서도 마을 탐방
12:30-13:30 점심식사(섬밥상)
14:00-18:00 자유롭게 놀기(낚시 혹은 산책 및 휴식)
18:30-21:00 저녁식사 겸 뒤풀이(여서도 할매가 담근 막걸리에 생선회요리)
21:00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10월 2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08:00-09:00 아침식사(섬밥상)
09:00-09:40 자유시간
10:00 여서도 출발
13:00 완도 도착
13:20-14:10 점심식사(생선구이)
14:20-15:30 구계등 해변과 상록수림 걷기
15:50-16:20 완도어시장 장보기
16:30 서울 향발. 제52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52강 <돌과 바람의 왕국, 여서도>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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