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일 러시아 및 중국 순방을 앞두고 한 말이다. 이를 두고 언론은 '조건부 사드 배치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사드가 북핵 위협 증대로 필요성이 제기된 만큼 그 위협이 사라지면 그때 가서 철수시키면 된다는 의미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한국 내 사드 배치를 일관되고도 강력하게 반대해온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정상 회담을 앞두고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로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하기란 역부족이다.
먼저 역사적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군비 통제 조약으로 일컬어지는 탄도 미사일 방어(ABM) 조약은 전략 무기 제한 협정(SALT)과 동시에 체결됐다. ABM 조약은 미국과 소련이 사실상 미사일 방어체제(MD) 구축을 포기하기로 한 조약이다. 그리고 이 조약 덕분에 양측은 공격용 무기 제한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도 흡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1983년 전략 방위 구상(SDI)을 밝히고 소련이 이에 대응해 핵미사일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대하면서 '신냉전'과 '핵 겨울(nuclear winter)'이 지구촌을 배회했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들어 미국이 SDI를 사실상 철회하면서 핵 군축의 문이 활짝 열렸다.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INF) 협정과 전략 무기 감축 협정(START)이 잇따라 체결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드를 비롯한 MD는 적대국의 핵 폐기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핵 능력 증강을 부채질하는 속성을 지닌다. MD를 펼칠 때 핵 군비 경쟁이 기승을 부리고 MD를 접을 때 핵 감축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북한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이다. 7월 8일 한미 양국의 사드 배치 발표 이후 북한은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스커드와 노동 등 지대지 중‧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연이어 시험 발사해왔다. 북한으로서는 한-미-일이 사드와 같은 MD 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려고 하자, 핵 억제력의 핵심인 2차 공격 능력을 대폭적으로 강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기어코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북한은 핵 능력 증가로 맞불을 놓을 것이고, 이에 대해 한-미-일이 MD 능력을 추가로 강화하는 '군비 경쟁의 악순환'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의 기대와는 달리 한반도 비핵화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유럽의 사례를 보더라도 '조건부 사드 배치론'은 결코 녹록지 않다. 미국은 유럽형 MD를 추진하면서 오로지 이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이란과의 핵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도 유럽형 MD는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신냉전'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드가 북핵만 겨냥한 것이고 북핵이 해결되면 철수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박근혜 정부가 결코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박 대통령의 승부수는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다. 조건부 사드 배치론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 정부가 주장하고 미국 정부도 가능성을 타진해온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협정 병행 논의에 동의한다. 북한이 이에 호응하고 성과가 나온다면 사드의 필요성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거부하고 잘못된 길로 계속 나간다면, 사드 배치는 불가피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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