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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주 밖' 사람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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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주 밖' 사람들이 문제다

[민교협의 정치시평] 구경꾼의 정치학 : 성주 밖 사람들

체스판이 벌어졌다. 늙은 고수와 낯선 청년이 대결한다. 늙은 고수는 마을에서 패한 적이 없다. 고루한 옷차림의 그는 정석대로 두며 상대의 약점을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청년은 변칙적이고 도도하게 예측불허의 수를 구사한다. 중요한 말을 적지 한가운데로 들여보내 무작정 싸움을 건다. 예측할 수 없는 행마에 늙은 고수도 청년의 노림수가 뭔지 몰라 고민을 거듭한다. 어쩌면 청년은 체스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늙은 고수에게 늘 졌던 마을 구경꾼들은 청년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도 안 되는 수를 두었을 때도 뭔가 기발한 전략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믿었던 청년은 맥없이 패배하고 인사도 없이 표표히 떠나버린다. 자신들의 패배를 일거에 만회해주리라 열광했던 구경꾼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서둘러 흩어졌다.

'좀머 씨 이야기'로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승부>의 줄거리다. 여기서 청년은 기존 규칙을 과감하게 어기거나 인습에 도전하는 존재다. 그는 사건의 당사자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상황을 주도한다. 도전하는 자 대부분이 그렇듯이 패하기는 했지만, 견고한 규칙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과 긴장감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는 늙은이를 압도한다. 체제에 살아남거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자기실현과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통제 밖에 있는 자'들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그들은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고, 허점은 있지만 그보다 더 예리한 진실을 담은 말을 발설하고, 절제되지 않은 거친 말과 행동으로 이 세계가 거짓되다고 윽박지른다.

문제는 구경꾼이다. 소설에 나오는 구경꾼들은 바로 우리다. 싸움이 벌어지면 곁눈질로 기웃거리다 싸움이 끝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흩어지는 우리다. 그러다 또 다른 구경거리가 생기면 우르르 몰려가는 우리다. 아마도 성주 군민들도 구경꾼이었을 거다. 우리처럼 이 세계의 모순과 아픔에 술안주로 몇 마디 훈수나 두다가 시간이 지나면 제 앞가림하기 바쁜 사람들이었을 거다.

지금은 성주 주민들의 강고한 저항을 존경심으로 바라보지만, 최초의 시선은 양가적이었다. 성주를 방문하여 지지발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1번 당만 찍으셨죠? 밀양이나 제주 강정마을 얘기는 남 일이었죠? 세월호 가족들 욕하셨죠? 그 사람들 빨갱이들이라고, 세금도둑이라고 하셨죠?'라 물으면 순순히 '예' 한다. 그것은 반성의 언어다. 각성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구경꾼이던 사람들은 어느새 당사자가 되었다.

▲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있는 성주 군민들 ⓒ프레시안(최형락)

성난 군중 앞에 선 국무총리의 논리

어쩌면 현 정부는 늙은 체스 고수와 같아 보인다. 자신들의 정석과 규칙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고 매사에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예를 들어 보자. 지난 7월 15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성난 군중 앞에 서기로 결심했다. 군중 앞에 섬으로써 그는 모종의 반전을 노렸을 것이다. 대통령이 출국하여 없는 사이, 대통령의 대행자로서, '말하면 들으리라'는 신심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신실한 개신교 신자이기도 한 총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앞에 선 예수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예수와 달리 그의 손에는 어리석은 군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마이크'가 있었다. 시골 성주에 총리가 친히 내려가서 사드 배치 예정지를 시찰하고, 걱정 어린 눈으로 성주 읍내를 굽어보고, 직접 군민들을 만나서 진정성 있는 말을 하면 설득될 것이다. 그의 머릿속 매뉴얼은 그랬다.

그는 헬기 안에 있는 동안 내내 무슨 말을 꺼낼까 고심했다. 전날 밤 출력한 메모지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 읽고 지우고 다시 쓰며 다듬었다. 그가 의례적으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고 사과한 다음에 꺼낸 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관적이고 진부한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핵을 쏘아대는 북한으로부터 국가의 안위가 어렵고 국민의 생명과 신체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북한의 핵 개발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미사일 발사로 우리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건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안다. 그러니 무조건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준비가 부족했고 논리가 박약했다.

다른 하나는 헛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옹색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인터넷을 검색했을 것 같은 말을 꺼냈다. "성주는 일제치하에서 유림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만들어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김창숙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유공자와 그리고 독립운동자, 유학자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유학자의 고향이니 당신들도 정부의 결정에 복종하라는 것은 충(忠)이나 애국을 '복종'으로 이해하는 얕은 생각이다. 국가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독립운동가나 유림의 전통이 아니라, 매국노와 노예의 전통일 뿐이다.

여기에 '당사자'인 성주 군민은 물병과 계란을 던지고 차량을 가로막는 걸로 가뿐히 논파했다. 성주 군민은 이미 성주가 그저 여러 지역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곳임을 발견하고 있다. 그래서 성주가 아니라 한반도 어디에도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는 외침은 자연스럽다. 그건 한국의 권력자들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유일성과 대체 불가성'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래서 고유명사로 거듭난 성주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권력에 밀릴지도 모르지만 등을 돌려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구경꾼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구경꾼이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당사자보다 구경꾼이다. 당사자는 구경꾼 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푸코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거기 함께 있고, 좋건 나쁘건 사건에 휩쓸려 들어가는 구경꾼들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엉망진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 주동자가 아닌 사람들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그 무엇이 중요하다. 자신들이 일으키지 않은 사건에 대해 구경꾼들이 맺는 윤리적이고 정서적인 관계 말이다.

좋은 구경꾼들은 사건에 열광하며 정신적 변화와 승리를 향한 갈망을 갖는다. 구경꾼이 미성숙한 구경꾼으로 남게 되는 이유는 '아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결단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칸트). '구경거리로서의 사건'을 관망하면서 머릿속에 감정적으로 떠오르는 무엇이야말로 사건을 야기하는 사람보다 더 중요할지 모른다. 구경꾼들이 어떤 과정으로 자기를 형성하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18일 전국 90여개 시민사회종교단체가 참여한 '사드 한국 배치 저지 전국행동'을 꾸려 성주촛불이 100일이 되는 날 전국 100개 도시에서 사드 반대 촛불집회와 범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전국의 구경꾼들이 체스 선수로 나설 모양이다.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의 제약을 넘어설 수는 없다.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우리가 행하는 것을 바꾸어야 한다(테리 이글턴).

구경꾼의 미덕은 훈수가 아니라 열광이다. 결국 성주가 아니라 성주 밖 사람들이 문제다. 그래서 쥐스킨트는 다른 글에서 모든 걸 다 망각하더라도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구는 잊지 말라고 외쳤는지 모른다. 역습의 기회는 구경꾼이 만든다.

아, 깜빡하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놓칠 뻔했다. 젊은이의 자신감, 저돌성, 예측 불가능성에 고전한 늙은 체스 고수는 하찮은 풋내기에게 승리했음에도 승부에서 패배했다는 낭패감에 휩싸여 영영 체스를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졸렬하게 체스를 둔 적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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