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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수는 왜 8.17을 기억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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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수는 왜 8.17을 기억해야 하나?

[민교협의 정치시평] 고(故) 고현철 교수 1주기를 맞아

총장 직선제를 지킬 것을 요구하며 대학본관 옥상에서 투신한 부산대학교 고(故) 고현철 교수의 1주기다. 부산대는 17일 교수 학생 직원들이 함께 추모식을 가지고 대학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 교수의 뜻을 기리며 기념 조형물 제막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국립 대학의 중견 교수가 캠퍼스에서 대학 민주주의를 외치며 투신자살한 사건은 과거 유신 독재 시절 학생들의 잇단 죽음과도 대비되면서 대학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모든 추모가 그러하듯이 산 자들은 애도를 통해 망자와 이별하고 그의 뜻을 현실에서 되새기고자 한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교수 단체들이 결집하여 대규모 시위를 가졌고, 부산대는 국립대 가운데 유일하게 직선 총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 교수의 희생은 총장 직선제를 지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대학 현실에서 총장 직선제 고수가 정권의 비민주적 강압에 저항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가 남긴 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 점이 분명하다. 직선제를 지키겠다고 공약하고 당선된 당시 부산대 총장이 교육부 방침대로 간선제를 추진하게 된 것을 그는 대학의 자율성이 실종된 결정적 증거로 보았다.

민주주의가 이처럼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음에도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은 "너무 무뎌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오직 총장 직선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 당시로서는 교육부의 총장 직선제 폐지 압력에 끝까지 맞선 곳이 부산대였으므로 부산대가 무너지면 대학 자율성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고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은 대학의 자율성을 옥죄는 정부의 부당한 개입에 맞선 항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못지않게 대학과 사회 일반에 퍼져 있는 무기력과 순응주의에 대한 자성과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스스로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도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이 역사의 퇴행에 무디어진 일반의 인식을 깨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과연 그같은 선택이 지식인의 실천으로서 최선이었는가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가 충격을 가하고자 한 대상은 민주화 흐름을 거스르는 정권이 아니라 바로 무기력한 교수 사회였다. 그의 죽음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교수들에 대한 아프고도 강력한 심문이기도 한 것이다.

▲ 고현철 교수 투신 이후 대책을 논의하는 부산대 교수들. ⓒ연합뉴스

그러나 대학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가령 총장 직선제 고수만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대학 민주주의의 구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론 총장 직선제의 폐해에 대한 교육부의 지적과 간선제 요구는 대학의 자율적인 결정 과정에 개입하려는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고려의 가치조차 없지만, 원론적으로 교수들만의 총장 직선 관행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총장 직선제 도입은 군부 독재가 종식된 이후 대학 민주화의 중요한 전기를 이루나 다른 구성원들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점에서는 교수 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총장 선출 제도에 관한 한 학생까지 포함한 대학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선출 방식을 도출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대학은 외부의 부당한 간섭이나 통제를 벗어나야 하고, 실제로 정부 개입에 맞서거나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사학 권력에 맞서서 대학의 자율성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대학이 진정으로 민주화되려면 대학 내부의 비민주적 관행이나 질서를 혁신해나가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대학 내부의 기득권 구조를 혁파하는 일이며, 교수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다.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산실이면서 국가의 중요한 이데올로기 기구로 존재한다. 그러하기에 지식인의 속성이라고 할 비판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 기득권 세력의 일부로 손쉽게 편입되는 것이 교수들의 입지다.

교육부가 재정 지원을 빌미로 대학을 평가하고 '선택과 집중'을 내세운 몰아주기를 통해 대학을 길들이고 통제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학들 사이에는 생존을 건 경쟁이 벌어지고 이 속에서 교수 사회가 순응주의 및 그 쌍생아인 패배주의에 젖어있다는 자괴감이 팽배해 있다. 비판의식을 상실한 교수 사회는 이기주의의 터전이 된다. 경쟁에서 하위권으로 밀린 대학은 생존을 내세워 대학 내부의 민주적 논의 자체를 봉쇄하고, 상위권에 속하는 대학은 승자의 혜택을 누리는 가운데 정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할 여지부터 축소된다. 정부의 평생 교육 단과 대학 사업이 야기한 최근의 이화여대 사태에서 보듯, 교육부 정책에 대한 대학 당국의 맹종과 이같은 무리하고 일방적인 결정을 막아야할 교수 사회의 역량 부족이 결국 학생들의 극렬한 항의를 촉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현철 교수가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라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지 1년, 대학의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고인이 암담하게 여겼던 1년 전의 정치 현실은 일각에서 '저강도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할 정도로 파시즘적 성격이 짙었다. 그렇기 때문에 총장 직선제 폐지 강요에 맞선 당시의 저항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권의 일방적인 민주 질서 파괴와 국정 실패가 총선을 통해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정치 지형이 일정 정도 변화를 겪는 동안, 대학은 민주주의의 진전은커녕 오히려 정부의 통제에 순응하는 반민주적인 기득권의 성채가 되고 만 것은 아닐까? 교수들의 뼈아픈 자성이 없고서는 고인에 대한 추모도 기념비를 세우고 그를 추억의 대상으로 삼는 망각의 의식(儀式)에 불과할 뿐이다.

대학의 민주화가 사회 민주화의 초석이 되려면, 대학의 자율성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만으로 는 부족하다. 교수집단부터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비정규 교수 학생 직원이 함께 하는 말 그대로의 학문 공동체를 일구어나갈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고인에게는 진정한 대학 민주주의를 위해 한 몸을 바칠 각오, 즉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을 내릴 용기가 있었다. 암울한 대학의 현실을 두고 권력과 자본에 탓을 돌리고 비판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고인의 뜻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은 우리 속에 깃든 이기주의에 맞서서 공적이고 민주적인 질서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는 결단, 바로 그런 일상의 실천을 통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윤지관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는 한국대학학회 회장이고 <대학: 담론과 쟁점> 편집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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