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1962년생. 일본 게이오 대학교 교수. 일본 근현대사 연구나 식민지 연구를 하는 이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방대한 자료 수집, 깊이 있는 해석과 훌륭한 글쓰기로 정평이 나 있다(일본 학계의 각종 학술상과 논픽션 부문 수상이 이를 증명한다). 나 역시 '창씨개명'과 일본의 식민지 동화 정책을 연구하던 20여 년 전 우연히 접했던 <단일 민족 신화의 기원>(1995년)에서부터 <'일본인'의 경계>(1998년), <'민주'와 '애국'>(2002년), <1968 上/下>(2009년), <사회를 바꾸려면>(2012년) 등의 저서를 나오는 족족 구해 읽었다.
워낙 대작들이라 번역되기 어려운 책들임에도 번역서가 이미 몇 권이나 나왔기에 한국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작년(2015년) 가을 <일본 양심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책이 국내에 번역·출판되었다. 제목이 강해 조금 미심쩍었다. 오구마 교수 본인 아버지에 관한 얘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원제목 <살아 돌아온 사내―어느 일본 병사의 전쟁과 전후(生きて帰ってきた男 ある日本兵の戦争と戦後)>(이와나미신쇼 펴냄, 2015년)은 건조했고 객관적 표현이었다.
책은 오구마 에이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小熊謙二)의 삶을 담담하고도 촘촘히 다룬다. 오구마 겐지는 1925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도쿄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진다. 와세다 실업을 졸업하고 <후지통신>을 다니던 겐지는 1944년 징병이 되어 만주로 갔고 거기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1948년 3월 일본으로 귀환한 후 그는 고도성장기 일본을 경험했고 도시 하층민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 그는 현직에서 은퇴했고 '소소한 사회활동'을 시작하며 "자신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일"에 대해 경험하고 나서게 된다. 그러던 중 지금은 중국 국적자로 살고 있는 '일본군' 조선인 동료 오웅근이 전쟁 피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것을 알게 된다. 오구마 겐지는 자신이 받은 피해 보상금의 절반을 오웅근에게 보냈고 이후 그와 함께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다. 하지만 소송에서 진다.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아들 오구마 에이지는 아버지의 삶을 '그저 그런 개인사'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구마 겐지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던 삶의 무게를 혼자 견뎌 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반성'과 '성찰'이라는 가치를 조금씩, 조금씩 찾아 갔다. 역자가 붙인 '일본 양심의 탄생'이라는 다소 과한 제목도 그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아베 신조가 이끄는 지금 일본 사회에선 더 이상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 나라에선 없었던 것 같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양심'과 '책임' 말이다.
일본 학계의 천황이라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찍이 일본 사회 '무책임의 원칙'을 통렬히 비판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아니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전전(戰前) 파시즘을 가능케 했다는 설명이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무책임의 원칙'은 더욱 강고했고, 실제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논의는 일본 사회의 '터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소시민 오구마 겐지는 달랐다. 아니 그런 오구마 겐지'들'이 실은 적지 않았음을 오구마 에이지는 추적해 갔던 것이다.
처음엔 설마 했다. 문화방송(MBC)의 올해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제목이 <아버지와 나 : 시베리아 1945년>라는 걸 알았을 때 오구마 에이지의 책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오구마 에이지와 오구마 겐지가 정말 등장했다. 오구마 에이지는 '삭풍회'라는 시베리아 억류자 모임 생존자들을 만나 아버지 오구마 겐지에 관한 얘기를 함께 나누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 대부분은 소련군 포로였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을 걱정해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못한 채 살았다고 했다.
소련과 수교가 이루어진 1991년에서야 '삭풍회'라는 모임을 조직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청구권이 말소되었다는 이유로 모두 기각 당했다. 이들은 대체로 오구마 겐지와 비슷한 연배였고 상당수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영하 50도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이들은 다시 인민군으로, 국군으로 징집되었고 다시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
그동안 아무도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도, 소련도, 북한도, 대한민국 정부도 모두 자신들을 버렸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는 이미 고인이 된 문순남 씨의 아들 문용식 씨가 등장한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공고를 졸업하고 대구의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문용식 씨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혼자 힘으로 자료를 모으고 문서를 해독해야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한국 외교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렇지만 "소련군 포로수용소 위치와 번호를 러시아 정부가 요구한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왜 그걸 문용식 씨가 답해야 하는지, 아니 그가 답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문용식 씨는 오구마 에이지 교수와 같은 뛰어난 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요즘 그는, 몇 년 전 해산한 '삭풍회'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아들처럼 절을 하고 사라질 뻔했던 자료를 다시 모으고 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오구마 에이지와 문용식 씨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생존한 시베리아 수용소 징병 피해자들은 이미 구순의 노인들이었다. 스무 살에 징병되어 만주로, 시베리아로 끌려 다녔던 이들이 올해 '광복 71주년'을 맞았으니 구순이 맞다. 오구마 오구마 겐지도 1925년생이니 구순을 넘겼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복동 할머니도 올해로 구순이시다. 그런 김복동 할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가히 '염천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난 14일 '나비문화제'에 참석해 목소리를 높이셨다. "아바이는 징용 징병 끌려가서 피맺힌 목숨 바친 돈으로 새마을사업 하더만, 그 딸 아니라고 할까봐, 할매들 몸 팔아서 재단 만든다나? 그게 옳은 일이냐.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할머니는 지난 4월 일본 지진 복구 기금으로 100만 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평생 모은 전재산 5000만 원을 분쟁지역 피해 아동 지원과 평화활동가 양성을 위한 '나비기금'으로 작년에 기부한 바도 있다. 누가 죄를 지었고, 누가 자신들을 돕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신다. 아버지의 삶을 찾아 나선 문용식 씨도, 폭염 속 집회를 피하지 않으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와 '존엄'인 것이다.
또 다른 구순의 노인이 계신다.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김영관 선생의 연세는 올해로 아흔 둘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2일 원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유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했고, 김 선생은 참석자를 대표해 인사말을 했다. 지극히 정중하고 공손한 표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인식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김영관 선생은 "건국절 주장은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에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고 명확히 설명했다. 대통령은 당연히 응답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분노와 절망은 징병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에 국한되지 않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구순의 독립유공자'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드 배치 필요성'만 말했고 독립유공자들에게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를 지키는 길에 하나 될 수 있도록 앞장서 달라"고 재차 요구했을 뿐이다. 전형적인 '동문서답(東問西答)'이었고, 확실한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다.
광복 71주년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다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규정했고 '건국'이라는 단어를 세 차례나 사용했다. 김영관 선생의 간절한 호소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거부한 것'이었다. 구순의 오구마 겐지가 지키고자 했던 '양심'과 '책임', 구순의 징병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그리고 독립유공자가 지키고자 했던 '명예'와 '존엄'은 찾을 수 없었고, '할 수 있다'(4회), '자신감'(4회), '자긍심'(1회)이라는 강요된 '희망의 메시지'만 경축사에 넘쳐 났다.
어떤 다른 목소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기만 가득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지경이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김복동 할머니는 폭염 속에서도 수요 집회 참석을 멈추지 않고, 김영관 선생은 대통령에 대한 면전고언을 피하지 않았다. 오구마 에이지 교수 역시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사회를 바꾸려면 데모를 해야 한다. 사회는 이미 바뀌고 있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누군가는, 뭐든지 해야 한다. 슬프게도 우리는 '구순(九旬)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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