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손호철 교수의 남아공 여행기입니다. 지난 12일 첫 편에서 이어집니다. 편집자.)
인종차별의 상징, '디스트릭트 6'
남아공에서의 둘째 날, 일어나니 머리가 멍했다. 서점에서 산 남아공 관련 책을 읽느라, 꼬박 밤을 새운 후유증이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닐 블롬캠프 감독, 2008) 영화팬이라면 익히 아는 작품이다. 남아공 창공에서 우주선이 난파되자, 외계인들을 '디스트릭트 9'이라는 지역에 격리 수용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외계인의 시각으로 인간 사회를 고발한 특이한 작품이다.
영화의 아이디어가 된 곳이 바로 인종차별체제의 상징인 '디스트릭트 6'다. 오늘은 디스트릭트 6를 구경하기 위해 시에서 운영하는 '디스트릭트 6 도보 탐방'에 합류했다. 로벤섬 관광과 달리 디스트릭트 6의 탐방은 사람들이 몇 명 되지 않아 조촐했다.
부두에서 가깝고 테이블 마운틴이 잘 보이는 디스트릭트 6는 다양한 인종과 서민들이 어울려 살던 '케이프타운의 심장'이자 '영혼'으로 불리던 곳이다. 원래 케이프타운은 인도와의 향신료무역을 주도했던 네덜란드가 항로의 중간 기착지로 사용하기 위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노예를 사와 건설했다. 그래서 케이프타운에는 흑인과 백인 이외에도 인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인 등이 어울려 살았고 이들의 집합소가 바로 디스트릭트 6였다.
백인 정권은 그러나 60년대 인종차별 정책을 강화하면서 통행증 제도와 인종별 거주지역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입지가 좋은 디시트릭트 6를 백인 전용 거주지로 지정, 이곳에 살던 6만 명의 유색인종들을 강제 퇴거시켰다. 이런 역사로, 디스트릭트 6는 인종차별 정책의 상징이 되었다. 다운타운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자, 오른쪽으로 테이블 마운틴이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동네가 나타났다. 디스트릭트 6였다.
우리를 맞은 것은 '60708090'이라는 커다란 글씨였다. 자세히 보니 시대를 상징한 것으로, 60년대 초반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모습과 통행증 도입으로 인종차별이 본격화된 상황을 그려 놨다. 70년대 디스트릭트 6에 백인 부유층 거주지를 만들기 위해 다민족 숙소에 불을 지르는 장면, 흑인들이 저항이 본격화된 80년대는 이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이, 그리고 90년대는 만델라가 석방되면서 인종차별체제가 끝나고 대통령에 오르기까지의 상황을 그렸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오른쪽 길 건너편에 폐허가 된 건물이 보였다. 저 건물이 아주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라고 설명하기에 자세히 보니, 부서진 건물 벽에 '디스트릭트 6 카페'라는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디스트릭트 6의 상징이었던 '디스트릭트 6 카페'가 있었던 곳. 디스트릭트 6 카페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술을 마시며 재즈 연주를 듣던 디스트릭트 6의 명소였다. 그러나 유색 인종 퇴거 조치와 함께 철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낙서 옆에 충격적인 포스터 한 장이 보였다. 분명히 만델라의 옛날 사진인 것 같은데, 큰 글씨로 '팔려갔다(Sold)', 즉 '배신자'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 '인종차별 해방의 아버지' 만델라를 배신자라니? 밤새 읽은 책에서 ANC 정부가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만델라를 '배신자'라고 비판한 포스터가 공공연하게 붙어 있다니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런 포스터가 새롭지 않은 듯 주변 흑인들은 놀라는 기색 없이 지나갔다.
백인 가이드의 재촉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앞으로 이동했다. 이내 단출한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1994년 민주화 이후, 디스트릭트 6에 거주한 사실이 입증된 이들 중 일부를 다시 이 지역에 이주시켜 살게 한 아파트였다. 실제 퇴거당한 이들 상당수가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더 올라가자, 오른쪽 길 건너에 좋은 큰 건물이 등장했다. 자세히 보니, 건물에는 'Cape Peninsula University of Technology'라고 쓰여 있었다. 크지 않았다. 가이드는 이 건물이 또 다른 인종차별 정책의 상징이라고 했다. 대학이 인종차별 정책의 상징? 가이드를 따라 조금 더 이동하자, 대학 건물에 둘러싸인 교회가 있었다.
여러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만델라 사진과 유언이 적힌 높은 건물이 나타났다.
"나는 한 인간이 그가 그의 국민들과 조국에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다 했을 때는 평화롭게 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같은 노력을 했고 그것이 내가 영원히 잠들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만델라 사진에도 '배신자 만델라'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디스트릭트 6 도보 탐방'은 박물관 앞에서 끝났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판자촌 탐방 일정이 있어 눈물을 머금고 발을 돌려야 했다.
인종해방의 그림자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케이프타운 외곽에 있는 판자촌으로 이동했다. 교외를 나가면서 발견한 것이지만, 케이프타운과 남아공은 입지가 정말 탁월하다. 남아공은 아프리카지만, 가장 남쪽에 있어 날씨도 많이 덥지 않다. 또 자연환경마저 아름다울뿐 아니라 천연 자원까지 풍부하다.
기이하게도 판자촌에 가기 위해서는 케이프타운 최고의 부자 동네를 지나가야 한다. 그 길과 풍경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부자 동네인 베벌리 힐스를 빼닮았다. 아니, 차이가 있다면 이곳이 베벌리 힐스보다 훨씬 잘 살고, 좋다는 점이다. 이런 세계적인 부촌을 관통해 판자촌으로 가자니, 이번 여행을 위해 읽은 자료와 밤새 읽은 책 내용이 떠올랐다.
지구 상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는 어디일까? 나는 자본주의 성장을 택한 '최근의 중국'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아니었다. <꽃보다 청춘>이라는 TV 프로그램 덕에 모두가 가고 싶은 여행지로 떠오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막을 자랑하는 나미비아와 바로 이곳 남아공이었다. 두 나라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잘 사는 곳이다. 그리고 빈부격차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측정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표가 지니계수다. 지니계수는 0과 1 사이 값으로 나타내는데, 0에 가까울수록 완전 평등을 의미한다. 선진국 중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0.21이고 가장 불평등한 미국은 0.36정도다. 우리나라는 군사독재 시절 0.31수준이었으나, 민주화 이후 빈부격차가 좁아지면서 0.28까지 낮아졌다가 IMF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0.35까지 높아졌다.
2007년 안식년을 가지면서 중국에 대해 공부했다. 그때 마오져퉁(모택동)이 국민당군대를 피해 도주했던 1만㎞를 답사하고 책 <레드 로드: 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이매진 펴냄)를 쓰면서 중국의 지니계수가 0.2수준에서 자본주의 도입 후 0.496까지 높아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지니계수가 0.5에 가까운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데 이번에 남아공을 공부하며 또 한 번 놀랐다. 남아공의 지니계수는 0.696이었다. 케이프타운대학의 하룬 보랫(Haroon Boret) 교수는 세계 각국의 불평등을 20년간 연구하는 과정에서 지니계수가 0.7을 넘은 것은 딱 한번 봤다고 했다.
놀라운 사실은 더 있다. 1994년 인종차별 종식과 흑인 정부 집권 후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됐다는 점이다. 보랫 교수는 "민주화가 이뤄진 1994년 당시 남아공과 브라질의 불평등 수준은 비슷했지만, 룰라 정부가 들어선 뒤 진보적 분배 정책을 편 브라질은 빈부격차가 빠르게 개선된 반면 남아공은 절대 빈곤층이 다소 줄어들었을 뿐 사회적 불평등은 급속히 악화됐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수 세력에 의해 '좌파'라는, 말도 안 되는 비판을 받았으나 '중산층과 서민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김대중 정부, 그리고 이를 계승한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빈부격차는 군사독재 정권보다 더 심화됐다. 비슷한 현상이 남아공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아니 우리보다 훨씬 심한 양극화가 흑인들의 민주 정부에서 일어난 것이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일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진보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세력(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달리, ANC는 투쟁 내내 노동조합인 COSATU와 공산당과 같이 행동했다. 뿐만 아니라, 급진적 노선을 견지했다. 그런 ANC 정권 하에서 세계 최악의 불평등이 생겨난 이유는 뭘까.
ANC는 1990년 COSATU와 함께 집권 후 추진할 경제정책 계획을 만들었다. 이는 앞서 주장했던 좌파적 정책보다 후퇴했지만, '분배를 통항 성장'을 기본 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3년에는 외국 학자들을 초빙해 거시경제 연구팀을 만들어 경제정책을 만들었다. 이 역시 전국적인 최저임금제 도입 등 진보적인 국가 개입을 주된 기조로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만델라 등 지도부에 의해 폐기되고 만다.
만델라는 백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출옥한 1990년부터 '남아공의 정주영'이라고 할 수 있는 해리 오펜하이머(Harry Oppenheimer)와 정기적으로 식사하며 경제를 논의했다. 이 밖에도 만델라 밑에서 부통령을 지냈고, 그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이 된 엠베키(Thabo Mbeki) 등 ANC의 지도층들은 재계 인사들과 정기적인 비밀 회동을 가졌다. 이를 통해 재계는 ANC를 포섭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은 인종차별에 따른 국제 제재로 고립된 남아공이 발전하는 길은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만델라 측을 설득했다. 결국 만델라와 ANC가 채택한 정책은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금융시장 개방과 자유화 등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세계 최악의 양극화다. 무장투쟁의 치열한 투사였고, 만델라 정부에서 각료로 일했던 로니 카스닐스(Ronnie Kasrils)는 그의 저서에서 ANC의 집권 준비기부터 만델라 정부 전반부인 1991년에서 1996년은 ANC 정신이 대기업의 영향에 의해 잠식당한 "파우스트의 시간"이었으며 "우리는 민중을 강에 떠내려가게 팔아먹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현지의 저명한 언론인 두 페레즈(Max du Perez) 역시 "만델라 초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체제가 안정된 뒤 진보적인 정책을 펴지 못한 것은 결정적인 역사적인 죄를 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ANC는 인종차별 체제하에서 벌어진 흑백 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전혀 손대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정책 결정에 실패했다. 바로 사회적 불평등 해소의 가장 중요 수단인 교육 정책의 실패다. 한마디로 무능이다.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예산(GDP의 6%)을 교육에 투자하고도, 수학과 과학 수행평가에서 아프리카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생의 3분의 1이 문맹일 정도다.
1994년 민주화 이후 ANC 정부가 흑인 어린이들에게 제공하는 교육은 '세계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인의 대학 및 직업학교 진학률은 20%를 넘는 반면, 흑인은 2.9%에 불과하다. 게다가 남아공 정부가 추진한 경제 발전은 기본적으로 자본 집약적이고 기술 집약적 성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반 흑인들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있다. 결과는 30%가 넘는 실업률과 빈곤이다.
부패와 도덕적 타락도 심각한 문제다. 현 주마(Jacob Zuma) 대통령은 자신의 사저를 수리하는데 국고 2300만 달러를 사용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결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각종 부패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ANC의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마리카나 대학살'이다.
흑인 대통령과 ANC가 남아공을 지배한 지 8년이 지난 2012년 8월 16일 광부들이 마리카나에 있는 론닌 광산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광산 노동자들은 인종해방투쟁에서 ANC의 가장 중요한 지지 세력이었다. 그러나 흑인 경찰들은 시위대에게 무차별적 총격을 가했고, 34명이 사망하는 사실상 대학살이 벌어졌다. 충격은 그다음이었다. 저명한 언론인 드 페레즈(Max du Perez)의 심층취재에 의하면, ANC 부의장이자 COSATU와 전국광부노조(NUM, National Union of Mineworkers)의 창립자인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가 론닌사(社)의 지분을 상당수 보유한 채 광부들이 아닌 론닌의 이익을 대변했다.
고향을 떠나 판자촌에서 생활하며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던 열악한 노동 조건과 NUM의 배신에 화가 난 광부들은 NUM을 탈퇴해 광부건설노조연합(AMCU, Association of Mineworkers and Construction Union)이란 독립 노조 소속으로 파업에 동참했다. 그러나 라마포사는 정부에게 강력한 공권력 투입을 요구, 이 같은 학살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도, ANC도, COSATU도, 하다못해 남아공 공산당(SACP)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명서 하나 없이 이를 외면했다. ANC 스스로가 '민중의 학살자'로 돌변한 셈이다.
이런 기득권화는 결국 COSATU의 주력 부대이자 남아공 최대 노조인 남아공금속연맹(NUMSA, National Union of Metalworkers of South Africa)의 반란을 가져왔다. 좌파계열로 전통적으로 공산당과 가까웠던 NUMSA는 2013년 말, ANC와 SACP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대신 COSATU도 삼각동맹에서 탈퇴해 ANC에 대항하는 '민주좌파전선'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COTUDSA는 오히려 NUMSA를 제명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Z. 바비(Vavi) COSATU 사무총장도 제명했다. 이에 바비와 NUMSA는 새로운 노동조합연맹의 건설을 선언했다.
이 같은 사회적 양극화와 부패, 그리고 정부와 조직의 무능이 일부 과격파로 하여금 남아공 인종해방의 아버지인 만델라의 사진에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ANC에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요인이 됐다.
양극화의 현장, 판자촌
버스가 판자촌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는 돈을 받고 안전을 보장하며 판자촌 탐방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 최대 판자촌'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이번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리우)다. 이곳은 무장한 갱단이 지배하는 치외법권 지역이라, 경찰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도시다. 그런데 갱단들이 이를 관광 상품화해 돈을 벌기 위해 '지프차 가이드투어'를 만들었다. 2004년 당시 경험을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이매진 펴냄)에 쓴 바 있다. 케이프타운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어 찾아온 것이다.
동네 입구에서부터 사방에 쌓인 쓰레기 더미 등 판자촌 특유의 모습이 나타났다. 10여 년 전 본 리우의 판자촌과 너무도 닮았다. 집밖에 걸어 놓은 형형색색의 빨래들, 그리고 길을 따라 위치한 허름한 가게 등 리우 판자촌에 다시 온 기분이었다. 조금 전 지나쳐온 베벨리힐스보다 더 호화로운 부촌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특히 케이프타운 판자촌의 경우 인종차별 정책에 의해 흑인 거주지역으로 지정돼 교외에 떨어져 있는 만큼 일자리가 있는 도시까지 출퇴근하기가 어려워 빈곤의 악순환이 불가피해 보였다. 우리나라도 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서울의 판자촌을 철거해 경기도 광주로 강제 집단 이주시키면서 지금의 성남이 만들어졌는데, 교통 문제로 생계가 더 어려워지자 판자촌 주민들이 민란(광주 민란)을 일으켰다.
몇 년 전 만델라재단은 "만델라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던 67년(그가 24살 처음으로 운동에 뛰어든 1942년부터 20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을 기념하기 위해 유엔이 '넬슨 만델라의 날'로 지정한 7월 18일을 전후해 모든 사람들이 사회를 위해 67분 동안 봉사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많은 남아공 시민들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 학생들도 '67분 봉사'를 나온 것이다.
백인 학생들과 흑인 어린이들이 함께 뛰노는 모습은 남아공이 이제는 인종차별이 폐지된 '정상적인 민주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흑인 정부가 가장 실패한 정책이 교육이고, 특히 인종적 교육 격차로 흑인 정부의 남아공이 세계 최악의 불평등 국가로 전락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포옹을 마냥 흐뭇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학교를 나와 판자촌을 다시 돌아봤다. 거리의 미장원 등 인상적인 판자촌 모습이 많았지만, 흑인 어린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시에 만델라를 '배신자'라고 낙인찍은 포스터가 자꾸 겹쳤다. 감옥생활만 27년, 일생을 바쳐 획득한 인종해방 사회, 그리나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흑인들에게 백인 정권보다 훨씬 심각한 불평등을 선물했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의 사진에 '배신자'라는 포스터가 등장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고향에서 ANC가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이에 대해 만델라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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