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오찬 회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수직적 관계'를 제대로 보여줬다. 박 대통령을 앞에 둔 이 대표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던 성주 방문을 즉석에서 취소하기도 했다. 국회 제 1당의 대표인 이 대표의 이날 모습에서는, 예전 대통령 비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 대표가 이날 건의한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과 관련해 당·정은 오후 5시 긴급회의를 열기로 했다. 일사천리다. 이미 국회 다수인 야3당이 한 목소리로 건의한 누진제 대책 마련 문제를, 이정현 대표가 청와대와 소통으로 단숨에 뚫었다는 효과를 선물해주기 위한 박 대통령의 배려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날 회동은 당·청 관계에 노정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수평적인 당 운영을 하겠다"고 대통령에 보고?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 초청 오찬 회동에서 이정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크게 세 가지를 건의했다. 전기요금 누진제도 개선, 민생 경제 사범 사면, 개각 시 탕평 인사다. 그러나 누진제 개선은 이미 국회 다수인 야3당이 합의한 내용이며, 사면의 경우 법무부의 실무 작업은 끝난 상황이다. 개각 관련 건의는 구체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 대표는 개각 인사 검증을 맡아 논란이 일고 있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대표는 건의 사항을 나열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에 많이 나오는 말씀 좀 드리겠다. 요즘에 컴퓨터 시대에서 스마트폰 시대로 바뀌었다. 사실 컴퓨터가 수직적인 체계라고 한다면 스마트폰은 수평 체계라고 하는데, 요즘 많은 책들 보면 수평적인 질서가 시대정신이다, 이런 말들이 있다. 우선 우리 새누리당은 당 운영을 함에 있어서 수평적인 질서를 많이 좀 하려고 할 생각이고, 또 최고위원들과 상의를 해가면서 그렇게 할 생각이다.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그런 스마트폰, 스마트 정책적으로 행보를 하려고 한다"
당 운영을 수평적으로 하겠다고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전임 대표인 김무성 의원은 '수평적'이라는 수사를 당청 관계에서 많이 사용해왔다. 그러나 이 대표는 사실상 '수평적 당 운영 방침'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박 대통령은 당에 주문을 늘어 놓았다. 박 대통령은 "당의 새 지도부에 국민들이 바라는 바는 반목하지 말고, 민생 정치에 모든 것을 좀 바쳐서 해나가 달라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주어를 '국민'으로 했지만, 그동안 반목 때문에 민생 정치를 소홀히 한 데 대한 꾸짖음에 가깝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한테 희망을 주는 새누리당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안들이 많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급한 것이 추경 예산도 있고, 또 우리 지역들을 전부 같이 특성이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긴요한 법인 규제 프리존 특별법 이것도 급하고, 또 노동개혁법도 한시가 급하다. 이런 것을 모두가 힘을 합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감으로써 우리 정부나 국가가 지향하고 있는 혁신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많이 힘써 주시기를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
박 대통령은 "당정청이 하나가 돼서 오로지 국민만 보고 앞으로 나아갈 때, 국민의 삶도 지금보다 더 편안해질 수 있고, 나라도 튼튼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고 했다.
이에 화답하듯 이정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당하고 야당을 굳이 구분해 놓은 것은 여당의 역할과 야당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저희 새 지도부를 중심으로 해서 저희 여당은 어쨌든 우리 대통령님이 이끄시는 이 정부가 꼭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아까 말씀을 하셨었지만 당정청이 완전히 하나, 일체가 되고 동지가 돼서 정말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나가서 정말 책임감 있게 저희들도 집권 세력, 여권 세력의 일원으로 저희가 책무를 꼭 할 것을 다짐을 드린다."
여기까지는 공개된 대화 내용이다.
"청와대 근무 때처럼 대통령과 격의 없어"…당대표야, 비서야?
그렇다면 비공개 대화에서 이 대표는 '당대표의 위상'을 보여줬을까?
이 대표는 오찬 회동이 끝난 후, 관례대로 국회에서 새누리당 출입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이 대표에 따르면, 이날 오찬 과정에서 이뤄진 대화 대부분은 박 대통령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원격 의료 허용, 파견법 등 노동법과 관련된 내용, 그리고 김영란법 시행령 논란과 사드 배치 논란이었다. 눈에 띄는 건의는 없었다. 오히려 이 대표는 오찬 자리에서 사드 부지로 확정된 경북 성주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김영란법 시행령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발언을 '브리핑'하는 데 그쳤다.
이 대표는 특히 "사드는 제가 누가 어떻게 이야기했다고 말은 하지 않겠고 엄중한 안보 현실임에 대해 (지도부) 전원이 대통령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가 혼자 당대표 되면 성주에 시외버스 타고 가서 진지하게 지역민 만나 대화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최고위원들이 실질적 주민 설득과 정부의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서 취소해야겠다고 이야기 했다"고 말했다.
현재 사드 배치 문제로 대다수의 군민이 반발하고 있는 성주에 당대표 자격으로 방문하려는 생각이 있었으나, 이를 접었다고 대통령에게 말한 셈이다.
이 대표는 정진석 원내대표가 김영란법과 관련해 농수축산 농가의 우려 등으로 시행령을 수정을 건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대통령께서는 '시행령은 국회에서 법 만들어주시게 되면 그 법 취지에 맞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행령이 참 그런 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이어 "시행령이 법 취지를 지켜야 한다는 그런 말씀은 안 했지만, 시행령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대통령 특유의 원칙을 말하면서도, '해결이 필요한 문제'라고 했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마치 대통령 참모의 브리핑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이 대표는 브리핑이 끝나기 전에도 "혹시나 오해 있을까봐 하는데, 김영란법은 (대통령이) '해결이 필요한 문제'라고 했고 아직 그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비공개로 이뤄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추측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대표는 "25분간 단독으로 만나서 뭐했느냐, 그게 (기자들이) 제일 궁금해하실거 같아서, 그것도 (민생 관련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짧지만 국정, 민생, 당 운영에 대해 상당히 의미있는 대화를 나눴다. 자주 연락 드리겠다고 말씀드렸고 대통령이 알았다고 기꺼이 답변을 주셨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태도는 기자들의 당혹감을 자아냈다. 그는 심지어 브리핑 도중 "박근혜 대통령께 느끼는 정치인으로 본받고 싶은 것은 일관성"이라며 대통령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 대표는 브리핑 말미에 "옛날에 늘 함께 같이 2004년부터 일해왔고 제가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느꼈던, 그 분이 관심을 가진 국가와 국민에 대한 문제에 관한한 격의없이 옛날처럼 대화하고 건의하고 시중 여론을 청와대, 정부에서 혹시라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이런 부분을 변함 없이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격의 없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이지만 '청와대 근무 때처럼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은, 공당 대표의 발언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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