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8일 서울시는 6309명이 접수한 청년 활동 수당 지원서를 전수 조사해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지원서 항목에 따라 작성된 지원자들의 텍스트를 분석해 본 결과 지원 동기로는 취업>준비>아르바이트라는 언급이 가장 많았다. 활동 목표로는 자격증>취득>준비>합격>공부, 활동 계획으로는 공부>준비>학원 순으로 많이 등장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취업 실패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단기 아르바이트, 부족해진 시간에 따른 취업 준비 실패 반복의 악순환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전효관 서울혁신기획관은 "청년 활동 지원 사업이 미취업 청년들에게 당장의 지원금 제공의 차원을 넘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담보해준다는 점에서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서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청년 수당 사업의 취지나 목표에 따라 지원서는 작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였다. 아니 솔직히 다소 놀라웠다. '꿈'이라는 단어가 순위권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업의 절박함과 절실함이 수당 지급 선정 기준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래서 애초에 예정했던 활동 계획서 평가 점수화나 면접은 심사 방법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이번 사업이 또 하나의 스펙 쌓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고려도 반영되었다.
그런데도 6309명의 지원자들은 '꿈'이나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 언어 사용을 자제했고, '취업'과 '준비', '공부'라는 현실적이고 객관적 언어를 주로 선택했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청년들에게 취업은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꿈의 전부가 될 정도로 그들의 삶은 절박하다.
'꿈의 실종'은 청년만의 일도 아니다. 한 때 우리 사회에는 '중산층의 꿈'이라는 게 있었다.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자식들 대학 보내고, 해외여행도 좀 다니고, 영화나 공연 관람도 적당히 하고, 시민 단체 후원도 한두 군데 하면서.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폭발적 성장도 '중산층의 꿈'에 기반 했었다. 지금 시민운동이 직면한 위기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억압이라는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했던 계층적 기반, 즉 중산층의 붕괴와 몰락 차원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중산층이 갖고자 했던 '집'을 갖고자 하는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글자만 뒤집혀 '빚'에 대한 공포와 부담만 남아 삶을 옥죄고 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기대의 자리를 '아무리 더' 해도 안 된다는 절망이 메웠다.
스스로 중산층으로 여기는 인구 비중도 계속 줄고 있다. 국민대통합위원회와 (재)행복세상이 주최한 지난 6월 토론회에서 정해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통계청 자료를 분석해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국민 비율은 2009년 54.9%에서 2013년 51.3%로 하락했고, 저소득층이라 여기는 국민은 2009년 42.4%에서 2013년 46.7%로 증가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2014년 6월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당신은 중산층입니까" 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 공식 중산층 비중은 2009년 66.9%에서 2013년 69.7%로 2.8%포인트 상승했지만 같은 기간 체감 중산층 비중은 54.9%에서 51.4%로 3.5%포인트 감소했다"는 결과가 제시되었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2015년 12월에 발간한 <2016년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에 따르면 무려 79.1%가 "자신은 중산층에 못 미친다"라고 답했다. 양극화에 따른 중산층 기반의 절대적 붕괴와 소득 불평등이 만들어 내는 상대적 박탈감이 '꿈의 실종'을 이중으로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꿈의 실종'은 안정과 상승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불안과 추락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의 단면을 확연히 드러 낸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 김창환 교수는 '헬조선'의 진짜 이유는 소득 불평등 자체가 아니라 고소득 중산층마저도 미래를 불안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대한 '불안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 중산층의 총체적 붕괴를 직접 체함하고 관찰한 김현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역시 "(한국) 중산층이 곧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예언 아닌 예측을 반복해 전하고 있다.
물론 중산층의 붕괴와 몰락은 비단 한국만의 모습은 아니다.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한 것이나 미국 대선의 '트럼프 돌풍'도 중산층의 몰락, 불만, 불안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뽑힌 힐러리 클린턴 역시 중산층 소득증대가 경제정책의 핵심이라고 계속 강조해 왔고,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중산층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재차 약속했다.
대한민국 청년과 중산층이 겪는 불안과 불만은 꿈꿀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사라진 꿈의 자리를 자칫 분노와 적의가 채울 수 있음은 세상 밖 소식을 통해 확인된다. 한국 사람들은 착해서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헛된 꿈'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분노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징표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꿈이라는 것은 모순과 고통을 은폐하는 허위의식이며, 당의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트럼프가 구사하는 공포와 배제의 언어가, 오바마나 힐러리의 희망과 포용의 언어보다 진실에 가깝다는 설명도 그래서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은 분명 변화를 만들어 내는 힘이자 말이다. 그래서 정치인과 사회운동가들은 '꿈의 언어'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지지를 결집시키려 시도했다. 마틴 루터 킹이 그랬고, 버락 오바마가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다. 손학규 전 대표가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 여전히 큰 울림을 갖는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정치 언어에서 꿈이 사라지고 있다. 청년과 중산층이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듯 유력한 정치인들조차 꿈을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자신의 '대권 꿈'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미래에 관한 꿈 말이다. 꿈을 말할 여유도, 용기도 서로에게 없기 때문일 테다. 그렇기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 수당'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청년 배당'은 소중한 시도다. 비록 건조한 행정 언어와 딱딱한 행정 양식을 매개로 이뤄지고 있지만 이는 분명 '꿈의 대화'다.
서울시는 3000명을 이번 주에 선정하고 이달 내 수당지급을 시작할 계획이다. 보건복지부는 즉각적인 시정 명령, 직권 중지·취소 처분을 공언하고 있다. 성남시는 7월 20일 3/4분기 청년 배당 지급을 실시했다. 반쪽자리다. 서울시가 낸 보도 자료를 다시 읽어 보았다. 과연 꿈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었다. 취업, 준비, 교육은 300자와 40자 글자 수 제약 하에서 어렵사리 적어 내려간 꿈, 미래, 희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중앙 정부가 당장 멈춰야 하는 것은 두 지자체의 청년사업이 아니라 자신들의 중단 활동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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