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넉 달 동안 정부가 추진해 온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펀드 방안은 결국 없던 일로 끝나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서 삼권 분립과 법치주의가 얼마나 취약하고, 관치 금융의 고질적인 병폐를 끊기가 얼마나 어렵고, 한국 주류 사회의 체제 순응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과정을 짧게나마 돌이켜 본 후 이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필자)
(☞원문 보기 : 중앙은행 금고 탈취 미수 사건이 남긴 것)
지난 3월 말부터 7월 말까지 넉 달간 한국 경제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었다. 행정부가 국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중앙은행 금고에서 10조 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마련해 자기들 마음대로 쓰려고 했다. 결국 7월 말에 가서 거의 없던 일이 되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미수 사건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비록 헛짓으로 끝나가고 있지만 이 일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기억할 만하다.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펀드를 둘러싼 그간의 과정은 한국 정치와 경제의 오래된 병폐가 중층적으로 동시에 작용한 현상이었다. 지난 과정을 짧게나마 돌이켜본 후 이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7월 22일 정부는 '2016년 추가 경정 예산 편성안'에서 11조 원 규모의 추경 예산 가운데 1조9000억 원을 구조 조정 지원에 배정했다. 여기엔 조선업계 구조 조정이 진행됨에 따라 자본 확충이 필요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각각 4000억 원과 1조 원을 현금 출자로 지원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이 방안은 7월 18일 여야와 정부가 합의한 안에 의거한 것이다.
한국은행에서 돈을 마련해서 구조 조정에 쓰자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지난 4.13 총선을 3주 앞둔 3월 말이었다. 처음 바람을 잡은 것은 여당이었다. 선거 전에 이를 한국식 양적 완화 운운하며 대단한 정책 공약이나 되는 듯이 내세웠다. 경제가 안 좋고 앞으로 있을 구조 조정에 돈이 필요하니 한국은행에서 재원을 받아다가 경기 회복을 위한 투자와 산업구조 조정에 돈을 풀자고 했다.
당시 여당은 선거에 내놓을 정책 공약이 없어서 난감하던 차였다. 게다가 여당은 경제 정책 전문가로 국민들 앞에 내세울 사람도 부족했다. 그래서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재정경제부 부총리를 지낸 후 야당에서 3선 의원을 지내다가 공천을 못 받은 후 여러 차례 정치적 복귀를 시도했던 강봉균 씨를 여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내세워 한국형 양적 완화를 주장하게 했다.
처음에는 멋모르는 일부 언론인이 이에 동조하기도 했지만 곧 이것이 국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구제 금융을 자기들 입맛대로 하겠다는 뜻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여론이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선거 후 대신 등장한 것이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펀드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5월 4일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증자를 위해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협의체'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정부안을 마련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법적인 문제였다. 한국은행법은 한국은행이 제멋대로 발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국가와 금융 기관에게만 돈을 빌려줄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때 국채에 준하는 담보를 꼭 받게 되어 있고, 만기는 1년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워낙 위법적인 발상인 만큼 이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실행 방안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6월 8일, 정부는 '산업, 기업 구조 조정 추진 계획 및 국책 은행 자본 확충 등 보완 방안'을 발표했다.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해서 10조 원을 찍어 기업은행을 중간 통로로 활용해서 국책 은행 증자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세부적인 사항을 마련하는 데에 진통을 겪었다. 한국은행의 손실 최소화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어떤 도관을 통해 어떻게 돈을 국책 은행에 전달할 것인가를 찾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다. 결국 한국은행은 7월 1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펀드 조성을 위해 기업은행에 10조 원 한도로 대출해주는 방안을 의결했다. 대출 기간은 1년 이내, 대출 실행 기한은 2017년 말까지를 원칙으로 하고 매년 말 지원을 계속할지를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방안 역시 불법성 시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중앙은행의 대출을 받은 기업은행이 그 돈을 갖고 자본 확충 펀드에 다시 대출을 하면 위험 자산이 늘기 때문에 자기 자본 비율이 내려간다. 따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보증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신용보증기금은 10조 원만큼 추가로 보증을 설 자기 자본이 없다. 그래서 한국은행이 신용보증기금에 5000억 원(10조 원의 20분의 1)을 출연하기로 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빌려준 곳에 대한 보증을 자기 돈으로 서주는 꼴이고, 누가 보기에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최대한 잘 봐주어 봤자 편법이고 실상은 불법이다.
국회에서는 국책 은행 자본 확충은 한국은행이 아니라 국가 재정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처음부터 우세했다. 야당은 처음부터 국책 은행 자본 확충은 재정 자금으로 해야 하니 국회에 증자안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여당 기재위 국회의원 중에도 유승민과 이혜훈 등 정부안을 반대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결국 지난 7월 18일 여-야-정은 추경안에 수출입은행 1조 원 증자 방안을 포함시키고, 자본 확충 펀드 운용은 최소화한다는 합의안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은 바보가 되었고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정부가 중앙은행 돈으로 구제 금융을 하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 처음부터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듯 하더니 곧 정부 눈치를 보느라 자본 확충 펀드 방안을 정부와 같이 모색했다. 금통위원회는 7월 1일 비상 계획을 의결한 것이라는 궤변을 내세우면서 출연을 의결했다.
이것은 졸렬하고 비겁한 얘기다. 정부가 요청하면 중앙은행이 건별로 심사해서 국책 은행에 출자하겠다는 것을 비상 계획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그게 무슨 비상 계획인가? 정 급하면 그때 가서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미리 의결해 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세계 어느 나라에 중앙은행이 금융 시스템 불안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비상 계획을 재무부에 맡기는가? 또 막상 한국은행에 손을 벌릴 정도로 문제가 터지면 이렇게 건별로 심사할 이유도 없고 여유가 없다.
이런 비판을 떠나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일로 금통위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점이다. 자기들 딴에는 그나마 선방했다고 위안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중앙은행 총재와 금통위는 뻔한 거짓말을 대놓고 둘러대는 집단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줏대 없는(spineless) 행동이었다. 체제 순응적인 한국 사회 주류 멤버들의 민낯을 다시 한 번 확인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임기를 4년 보장하면 무엇하나? 한국 사람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것 하나도 그냥 대놓고 반대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냐고 외국인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작년(2015년)에 삼성물산 합병을 두고 벌어진 현상과 진배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논란의 의미가 이것 외에 다른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번에 국책 은행 자본 확충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민주주의에서 삼권 분립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국책 은행의 부실을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해결하자는 발상이 문제인 것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민주국가의 삼권 분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국회가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핵심이다. 한국은행을 통해 국책 은행 자본을 확충하겠다는 정부안은 국회의 감시를 벗어난 공적자금을 마련해 쓰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나라 같으면 감히 생각도 못할 얘기다. 금융위기가 터지면 해결책은 둘 중의 하나다. 공적자금을 쓸 것인가 아니면 중앙은행 발권력을 이용할 것인가다.
이런 문제는 이미 선진국가에서는 이미 정리가 되어 있다. 은행의 유동성 위험은 중앙은행이 맡는다. 그러나 이에 대한 판단은 중앙은행이 한다. 단순한 유동성 위기가 아니고 은행의 부실이 심각하면 중앙은행이 아니라 예보, 또는 공적 자금을 들여서 처리한다. 이 공적자금은 행정부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집행한다. 국회는 이 재정자금이 제대로 쓰여지는지를 감시한다. 이것이 삼권 분립 하의 민주국가가 금융위기에 대응해서 공적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도산하면서 발생한 금융위기 시 미국 국회가 어떻게 했는가를 돌이켜보자. 2008년 9월 15일 리먼 사태가 발생해서 전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폭풍이 닥쳤을 때 미국 행정부는 2주 후 9월 29일에 국회에 7000억 불짜리 구제금융 펀드(TARP)를 요청했다. 당시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이 국회에 제출한 이 법안의 주 내용은 국가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은행들의 모기지 저당증권(MBS)을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9월 29일 하원에선 부결되었다. 공화당 정권이 낸 법안인데도 공화당 의원들이 압도적으로 반대해서 부결되었다. 자본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10월 3일 상원에서 통과된 수정 법안을 5일 하원 표결에 부쳐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일부 마음을 바꾼 의원들 덕분이었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공화당 하원의원의 대다수는 공화당 정권이 낸 법안에 반대했다.
어마어마한 재원 조달 규모에 비해 재무부가 9월 20일에 의회에 법안 초안을 넘겼을 때 이 법안은 겨우 세 장짜리였다. 재무부 장관의 행위에 대한 국회와 법원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법안 문구를 일부러 모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재무부장관의 결정은 되돌릴 수 없고 법원에 의한 무효 판결로부터 자유롭다는 문구를 포함했다.
10일 동안 의회에서 심사하면서 이 법안은 약 100여 페이지로 불어났다.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7000억 불을 한꺼번에 허용하지 않고 셋으로 나누었다. 둘째, 네 가지 국가기관 감시 장치를 만들었다. 셋째, 국민들로 하여금 이 프로그램에 의한 결정을 법원을 통해 제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중 현재 맥락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국가기관에 의한 감시 장치다.
첫째, 이 법은 새로 만드는 금융안정협의회(Financial Stability Oversight Board)에서 이 TARP를 감시하도록 했다. 의장은 중앙은행장이다. 둘째, 의회 내에 국회 감시 패널(Congressional Oversight Panel)을 만들어 여야가 선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정부 프로그램을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이 패널은 30일마다 이 프로그램 운영에 대해 의회에 보고해야 했다. 하버드 법대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워렌이 바로 이 패널의 수장이었다. 셋째, 미국 의회 소속인 감사원(Government Accounting Office)에 TARP 운영에 관한 모든 자료를 요구하고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독자적인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넷째, TARP안에 특별 감사국(Office of Special Inspector General)을 두었다. 감사국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상원의 비준을 통과해야 하며 임기가 보장되었다. 그는 분기마다 국회에 보고해야 했다. 나중에 오바마가 임명한 가이트너 재장관은 재직 도중 이 COP의 워렌과 TARP 감사인 바로프스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워렌 교수가 의회 청문회에서 가이트너를 꼬치꼬치 심문한 장면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다시 눈을 돌려 한국으로 돌아오자.
한국은 공적 자금인데도 국회에 의한 감시 장치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대표적인 것이 IMF 위기 시 만들어 지금까지도 운영하고 있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다. 국회가 만들어 준 공적자금을 관리하라고 만들어 놓았는데 소속은 금융위원회 아래다. 외부 인사로 위원장을 임명한다지만 위원장은 금융위원회 위원장과 위원 중에서 호선하는 1인이 공동으로 맡는다. 사무국에서 일하는 사람도 대부분 공무원들이다. 사무처장은 보직이 없는 고위 공무원이 잠깐씩 거쳐 가는 자리다. 미국에서는 네 개 감시 장치 중 의회가 직접 통제하는 기구가 세 개인데 한국은 하나도 없다.
또 다른 예로 2009년 은행자본 확충 펀드의 경우를 보자. 당시 정부는 이 펀드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나라가 큰일 난다고 국회를 협박했다. 자세한 것은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국회로부터 동의를 받은 자금 한도가 약 20조 원이었다. 실제로는 4조 원 정도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각 은행에 얼마나 어떤 조건에 왜 주었는지를 밖에서 알아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정무위나 기재위 국회의원이 물어도 무성의한 숫자 몇 개 던져주는 것이 전부였다. 관심을 갖는 국회의원도 별로 없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허술하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선거에 직접 참여하는 것 외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한탄을 많이들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시장경제도 그렇다. 정부가 할 일이 아닌데도 정부 관료가 틀어쥔 채 놓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책 금융이다.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은행권 대출 중 정책 금융성 대출의 비중이 아직도 40%를 넘는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번 조선 산업과 해운 산업에서 문제가 생긴 것도 바로 잘못된 정책 금융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기들이 정책 금융 때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금융 자금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자기들 마음대로 쓰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면 그 뒤치다꺼리도 자기들에게 맡기란다. 구경거리 난 것 아니고 볼 것 없으니 그냥 지나가란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번 문제는 삼권 분립의 문제였다. 그리고 아직도 과대한 정책 금융 또는 관치 금융의 문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지난 8년 간 정부가 대놓고 국민을 상대로 하는 거짓말의 문제였다. 처음에는 한국적 양적 완화라고 연막을 치더니, 그 다음에는 국책 은행 증자는 추경으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시간도 걸리고 법적으로도 요건이 안 된다고 했다.
국회 입장에서 보면 이는 삼권 분립을 무시한 정부를 국회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다. 정부가 양적 완화라는 엉뚱한 구실을 들이대면서 중앙은행 금고에서 돈을 탈취하려고 해도 법으로 금고를 맡고 있는 중앙은행마저 정정당당하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때 국회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여당 국회의원들이 자기들의 직분을 잊고 정부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제 1당이 삼권 분립에 의한 정부 감시와 견제 역할을 포기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삼권 분립의 원칙을 지킬 수 있는가?
다행히 이번에는 다르다. 20대 국회는 여소야대 국회다. 과거 여대야소 국회에서는 아무리 말로 해보았자 정부가 무시하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통령이 정치 검찰을 이용해 검찰 정치를 하고, 여당 국회의원이 의원으로서의 자긍심이 없이 거수기 노릇만 하는 상황에서는 삼권 분립이 무의미했다. 20대 국회가 행정부 감시와 견제를 얼마나 하는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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