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필라델피아 외곽에 있는 숙소를 나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장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타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버니 샌더스 티셔츠, 팔찌, 스티커, 배지로 무장(?)한 모녀였다. 알면서도 "샌더스 지지자"냐고 물었다. "그렇다. 나는 킹 오브 프러시아(필라델피아 근교)에 살고 있고, 엄마는 버지니아에서 왔다. 편파적인 민주당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간다"고 소개한다.
수개월 간의 경선 기간을 거쳐 선택된 한 사람의 후보를 위한 행사로 열려 온 미국의 전당대회. 그런 역사대로라면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는 '힐러리의, 힐러리를 위한, 힐러리에 의한' 행사가 돼야할 텐데, 힐러리가 개최하는 '힐러리에 의한' 행사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라델피아 중심, 마켓 스트리트와 13번 스트리트가 만나는 길에 내리자마자 이런 생각이 틀리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가운 태양과 폭염의 거리에서는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이 넘쳐났다. 다양한 방법으로 샌더스 지지자임을 드러낸 사람들은 "힐러리는 절대 안 된다", "버니 샌더스를 대통령으로"라는 피켓을 들고 필라델피아 시청 주위에서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민주당이 샌더스와 그 지지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불만, 새로운 정치와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는 정당에 대한 항의는 계속됐다. 적어도 민주당 전당대회장 바깥 거리의 후보는 버니 샌더스였다.
전당대회 본 행사와는 별개로 인종, 계층 등의 다양한 위원회의 회합과 토론이 열리는 '필라델피아 컨벤션 센터'로 갔다. 출입증을 보이고, 엄격한 검문을 통과한 후 들어선 행사장은 쾌적하고, 시원했다. 이 안에 분노와 좌절의 구호와 저항은 없었다. 힐러리의 세상이었다. 힐러리의 얼굴로 만든 포스터, 티셔츠 등 각종 기념품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전국에서 모인 대의원들은 반갑게 인사하며 교류했다. 거리의 목소리가 행사장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안 들은 척하는 건지, 민심과는 괴리된 완고한 민주당이라는 성(城)이 불안해 보였다. 강한 바람과 폭풍과 해일을 느끼지 못하는 태풍의 눈 같다고나 할까. 필라델피아의 안과 밖은 그렇게 다른 생각, 다른 사람, 다른 구호로 나뉘어져 있었다.
30년 가까이 미국 한인들의 정치참여 운동을 펼쳐 온 시민(한인)참여센터(KACE) 김동석 상임이사는 "원래 미국 정당의 전당대회는 수개월 간의 경선레이스를 통해 수렴된 한 후보를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단합의 축제다. 그런데 샌더스 지지자들로 넘쳐나는 필라델피아 거리의 모습은 민심과 괴리된 정당과 정치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기존의 정치질서와 문법에 안주하면서, 사람들의 요구와 문제에 둔감한 정치가 위기에 처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미국 정치권과 민주당에 새로운 각성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로 선을 지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밖에서는 안으로 침범하지 않았고, 안에서는 밖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목소리를 내고, 각자의 일을 했다. 행사장 안에서도 샌더스 지지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행사장 밖만큼 격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트럼프라는 공공의 적 앞에서 가능한 절제와 질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위태롭고 불안한 시간이 흐르고, 웰스파고 센터에서 '단합'을 주제로 내걸고 본격적으로 전당대회가 시작됐다. 저녁으로 시간이 진입하면서 뜨거웠던 태양과 폭염을 식히려는 듯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성난 민심의 열기와 그로인한 불안을 잠재우려는 것인가? 이 비 뒤에는 필라델피아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단합의 무지개'가 뜰 수 있을까 궁금했다.
대회 첫 날의 주요 연설자는 대통령 부인 미셀 오바마, 강력한 부통령 후보로 부상했던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 그리고 힐러리의 경쟁자였던 버니샌더스 상원의원이었다. 비를 뚫고 웰스 파고 센터가 있는 AT&T역에 도착하니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경찰이 설치한 철책 뒤로 버니 샌더스의 열성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어 들어간 전당대회장에는 대의원들로 가득차 있었다. 많은 연설자들의 순서 후 드디어 밤 10시가 넘어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가 등장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미셸의 이름이 적인 피켓을 든 대의원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딸의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한 미셸은 "나의 딸과 우리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대통령은 클린턴"이라고 말하며 클린턴으로 단합할 것을 주문했다. "흑인들의 중노동으로 건설된 백악관에서 생활하며, 우리의 아이들은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며 흑인과 여성이라는 중첩된 핸디캡을 안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함께 풀어낸 연설은 품격과 감동의 연설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언젠가 누군가가 표절하고 싶을 만큼' 멋진 미셸의 연설 후 전당대회장의 분위기는 고조됐다.
이어서 등장한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은 트럼프 저격수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듯 노동, 경제, 복지, 의료, 교육 문제 등에 있어 트럼프와 공화당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와 비교해 힐러리를 추어올리는 연설을 이어갔다. 워렌은 "우리는 힐러리와 함께 할 것이다(We will with her)"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드디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엄청난 환호 속에 등장했다. '버니! 버니!"를 외치는 환호가 5분 가까이 지속되어 샌더스 의원은 연설을 시작하지 못했다. 자신의 경선 역정에 대한 소회, 지지자들에 대한 감사로 잠시 울먹이기도 한 샌더스 의원은 "다음 미국 대통령은 힐러리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입장을 정리했다. 장내는 긴장하며 기다리던 힐러리 지지 선언이 샌더스 의원의 입을 통해 나오자 절정의 환호와 열기로 가득찼다.
안과 밖의 분열과 갈등으로 위태로웠던 필라델피아의 공기는 환호의 목소리로 뒤덮였다. 완고하면서도 위태롭게 빗장을 걸어잠근 힐러리의 민주당이 샌더스를 통해 구원받은 밤이었다.
그러나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의 손만 들어주는 들러리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연설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정책을 다시 강조하는데 할애했고, 이를 한 문장으로 "우리의 정치혁명은 계속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샌더스 의원은 자신에게 투표한 1300만 명의 유권자, 800만 명의 자원봉사자와 '27달러의 기적'(버니 샌더스는 평균 27달러의 소액기부로 선거캠페인을 진행했다)을 일구어낸 후원자들이 자신의 뒤에 있음을 상기시켰고, 그 결과로 이 자리에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자하는 1846명의 대의원이 참석해 있음을 과시했다. 최저임금 등 자신의 정책들이 민주당의 공약으로 채택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민주당이 미흡하다는 경고로 긴장을 놓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샌더스 의원의 연설 중에는 샌더스의 패배를 아쉬워하는 지지자들이 오열에 가까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여러번 포착됐다.
김동석 상임이사는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은 단순히 샌더스라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낡고 고루한 정치의 변화를 바라는 강한 흐름을 보여주는 현상이기 때문에 샌더스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샌더스 의원의 연설은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는 끝이 아니라, 민주당이 민심의 흐름을 받아들여 대다수 국민들과 괴리된 그들만의 리그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 시작이라고 봐야한다"고 분석했다.
불안과 환호로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 전당대회 첫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힐러리'를 연호하며 올라탄 대의원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미시시피에서 왔다는 이 대의원에게 "버니 샌더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버니를 사랑한다." 힐러리와 힐러리의 지지자들에게 아름다운 밤이었다.
전당대회 이틀째 오후(현지시간 7월 26일 오후 2시 30분, 한국시간 7월 27일 새벽 3시 30분)에도 필라델피아 시청 앞에서는 "힐러리는 사기꾼", "버니 아니면 무효"라는 구호를 외치는 군중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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