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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벗 삼으라"는 박근혜…무엇이 고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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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벗 삼으라"는 박근혜…무엇이 고난인가?

[민교협의 정치시평] 자유에 이르는 길은?

결국 파면이라는 중징계 처분으로 한편의 치졸했던 망상적 발언 사건이 끝이 났다. 한 국가의 교육정책을 기획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던 고위공무원의 인식치고는 조잡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럼에도 대중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영화 <내부자>에서 보듯이 "몇 번 짖다가" 또 다른 먹잇감을 향해 짓는 개,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되짚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사건 자체는 저급하고 천박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정치 현실과 그 실행과정을 이해하는 데 이 보다 더 좋은 예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이 진행된 과정을 보면 우리 사회의 단면과 문화적 현재가 남김없이 드러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신분제가 필요하고, 또 대중들은 정말 개, 돼지 같은 존재들일까. 아니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정말 대중을 "천한 아래 것들" 취급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근대 이후 이룩했던 인권과 계몽의식은 물론, 애써 달성한 민주주의 역시 허구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현대 사회는 세습적 신분제를 폐기했으며, 개인의 인권과 보편적 계몽의식을 일반화하였다. 국가와 정치 역시 전체주의적 통치를 벗어나 개인의 인권과 자유 개념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체가 보편적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정신을 선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헌법이며, 그에 따른 사회 구성의 결과가 바로 법치 사회이다. 이런 철학에 근거하여 현대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 체제가 형성되었으며, 그에 기반한 문화를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전근대의 시대로 퇴행하는 인식이 그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그런 생각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사람이 한 나라의 교육정책 전체를 기획하고 진행했다는 사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문제는 과연 이런 인식이 나 아무개 개인에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공직생활을 했던 과정에서 보듯이 이 나라의 기득권층이 지니는 일반적 생각인지가 관건이다.

나 아무개의 개인적 인식에 그친다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논리적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일반화의 오류일 뿐 아니라, 한갓 저급한 인간의 시대착오적 행태에 과민하게 대처하는 똑같이 어리석은 행동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왜 대중은 이 사건에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한 것일까. 과연 이 사건은 한낱 웃기는 코미디 같은 일에 불과한 것일까. 그가 말 한대로 벌써 사람들은 그 발언을 잊어버리고 "다른 먹잇감을 향해 짖고" 있지 않은가. 먹잇감이야 차고 넘친다. 대충 꼽아도 끝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 아무 분야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대형 협작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국정원 대선 개입과 간첩조작, 댓글 사건, 방산비리,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법무법인 김앤장 의혹, 성완종 리스트 사건, 홍만표와 진경준에서 보는 검찰비리와 뿌리 깊은 전관예우, 청와대의 언론 보도지침…도대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건들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되거나 밝혀진 사건이 없다. 모두 다 의혹으로만 취급되거나 흐지부지 잊혀져간 사건들일 뿐이다.

▲ 영화 <내부자들> 중 한 장면 갈무리

이제 먹잇감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또 민정수석의 권력을 이용한 부패로 옮겨갔다. 여전히 국론분열과 종북몰이, 또 국가 위기 따위의 50년 이상 똑같이 되풀이 되는 지겨운 "클리세(cliche)"들이 난무하고 있다. 불순분자를 가려내라는 명령이나 명백한 불의에도 "고난을 벗 삼아 소신을 지켜라"는 주문은 과연 한 국가의 수장다운 발언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뒤에는 해방 이래 끝없이 반복되었던 수사가 자리 한다: "가만히 있으라!" 국론분열이나 종북 논쟁, 경제 위기 논의는 그 변종일 따름이다.

역사를 기록하고 해명하는 이론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가치이념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흔히 사관(史觀)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를 설명하는 길은 한 사회와 역사의 단위를 지배하는 원리에 의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신분제를 둘러싼 싸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인류가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정주문화를 시작한 이래의 역사는 통치 권력과 피통치 집단 사이의 관계설정에 따라 달라진다. 18세기 이래의 근대시기는 개인의 권리와 철학, 가치판단과 이념의 자유를 보장하고 확대해온 과정이었다. 그래서 중세적 시대에서 당연시되었던 신분제와 노예제도는 폐기되었으며, 종교와 이념의 자유가 일반화되었다.

인류 사회에서 지배 체제의 양태가 정치를 결정했으며, 계층과 계급 구분은 권력과 경제력, 또는 문화적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인류 역사는 이런 역기능들을 줄이거나 폐기하면서 이 관계를 평등하게 발전시켜온 과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 인신구속이 당연시되던 노예제에서 이를 폐지하고 보편적 인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역사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권리나 심지어 동물권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생각해보면 이런 역사적 과정은 필연인 듯하다. 우리 사회의 발전 역시 거시적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경제력과 정치권력을 통해 계층을 구분하고 계급을 일반화하려는 의식이 공공연히 나타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우리 사회와 문화의 현재를 보면 이런 우려는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종놈이 감히...", "너희는 시키는 대로 해, 명령은 우리가 해!" 따위의 언설에서, 또 지역을 가르고 아파트를 구분하는 의식들, 학교와 직업, 수입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하는 사회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급의식은 신분을 구속하던 고대 노예제는 물론 중세의 농노나 농민 계층, 신분제와 노비 제도 등에서 보듯이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된다. "현대판 노예"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나 기업가들, 고수입을 올리는 이들이 비정규직 노무자나 사회적 약자를 같은 신분이라고 생각할까? 경제력에 의해 예속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과연 신분이 자유롭다고 해서 노예가 아닌 것일까.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자유로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치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겼을 때 우리는 노예가 되고 배제된 자가 된다. 이를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이라 불렀다. 호모 사케르가 되지 않는 길, 노비가 되지 않는 길은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스스로 설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이끌어갈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와 물질, 이념과 권력에 종속되어 스스로의 가치와 철학을 포기할 때 우리는 자유로운 노예가 된다. 모든 것을 돈에 따라서만 판단하고 돈만 생각하는 사람은 노예일까 아닐까? 나아무개의 발언이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것이라면, 이를 넘어서는 길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아감벤은 빼앗긴 존재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생명정치를 말한다. 이 이론의 한계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존재의 원리를 회복하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길은 경제와 이념의 구속, 무지와 생각하지 않음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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