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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용오름길 따라가는 민어 미식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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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용오름길 따라가는 민어 미식기행

2016년 7월 섬학교는 <고하도와 목포 : 민어특집>

삼복더위를 이겨내는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이라 했습니다. 민어는 여성들에게 특히 좋아 해산한 산모들도 꼭 민어탕을 먹었다고 합니다. 민어껍질과 부레도 별미지요. 그래서 “민어 껍질에 밥 싸먹다 전답 다 팔았다”는 식담이 있을 정도로 민어 맛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합니다. 부레는 가구를 만드는 접착제로 요긴하게 쓰였구요.

선인들에게 민어는 단순한 음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였지요. 민어는 여름 민어를 최고로 꼽습니다. 요즈음 민어가 들어오는 통로는 신안의 송도 위판장과 목포입니다. 특히 목포는 민어철이면 어느 식당을 가나 민어요리를 계절 메뉴로 내놓을 정도로 민어 요리의 본고장입니다.

▲서남해 목포 바로 앞 바다의 섬들이 초여름, 더없이 푸르다. Ⓒ섬학교

7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49강은 7월 2(토)∼3일(일), 1박2일로, 목포 일대에서 열립니다. 목포의 민어로 복달임도 하고, 목포 앞바다 작은 섬 고하도(高下島) 용머리해안의 용오름길도 걷고, 유달산 둘레길도 걸으며, 마음의 찌든 때를 씻고 올 예정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섬학교, <고하도/목포 민어 미식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복달임에 민어탕을 일품, 보신탕은 하품


민어(民魚)는 농어목 민어과 민어속의 난류성 어류다. 민어는 개펄 바다에서 산다. 낮에는 깊은 바다 속에 있다가 밤이면 수면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새우류를 특히 좋아한다. 새우어장으로도 유명했던 덕적바다에 민어가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워낙 귀한 고급 어종이 됐지만 민어는 이름처럼 옛날에는 백성들이 즐겨먹던 물고기다. 민어 중에서도 여름에 잡히는 것이 가장 기름지고 맛있다. 민어는 지역이나 그 크기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큰 민어를 개우치라 했고 법성포에서는 30㎝ 내외를 홍치, 완도에서는 작은 것을 불퉁거리라 불렀다. 서울이나 인천에서는 두 뼘 미만의 것을 보굴치, 세 뼘 내외는 어스레기, 네 뼘 이상만을 민어라 했다. 정약전의<자산어보>에는 민어를 면어(鮸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민어(民魚)라 한다 했다. <자산어보>에는 민어의 특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큰 놈은 길이가 4~5척에 달한다. 몸은 약간 둥글고 빛깔은 황백색이며 등은 청흑색이다. 비늘과 입이 크고 맛은 담담하면서도 달아서 날 것으로 먹으나 익혀 먹으나 다 좋고 말린 것은 더욱 몸에 좋다. 부레는 아교를 만든다. (<자산어보>에서)

▲여름 바다의 보양식 민어회와 부레와 껍질 요리 Ⓒ섬학교

민어는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가장 많이 오르던 물고기였다. 회나 탕, 구이뿐만 아니라 포, 알포, 알젓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자산어보>의 기록처럼 지방이 적고 단백질 함량이 많아서 맛이 담백하다. 서울, 경기지방에서는 복날 민어탕으로 복달임을 했던 전통이 있었다.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으로 쳤다. 민어는 쓸개를 빼고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민어는 머릿살과 껍질의 맛이 특히 뛰어난데 껍질은 데치거나 날로 먹기도 한다. 민어 껍질의 뛰어난 맛은 “민어껍질에 밥 싸먹다 논밭 다 팔았다”는 식담을 만들기도 했다.

옛날 민어 부레는 부레풀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 지금 남아있는 고가구들은 대부분 민어풀을 접착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부레는 속에 소를 채워 순대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또 부레는 생으로 먹거나 약재로도 이용됐다. 참조기와는 달리 산란철 민어는 알이 찬 암컷보다 수컷을 더 귀하게 친다. 알이 꽉 찬 암컷은 알이 워낙 커서 살이 적고 살 속의 기름기가 빠져 맛이 없다. 하지만 알이 밸락 말락 할 무렵에는 암컷의 맛이 최고다. 수컷보다 찰진 맛이 더 깊고 달다.

민어는 대부분 잡히는 대로 피를 빼서 얼음에 저장한 뒤 선어로 먹는다. 민어는 얼리면 민어 특유의 맛이 사라지기 때문에 생물로 먹는 것이 좋다. 민어는 활어보다 선어가 맛이 뛰어나다. 대체로 어류의 맛은 아미노산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어류는 사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 강직도가 떨어졌을 때 아미노산의 양이 가장 많다. 이때가 가장 맛이 좋다. 활어는 바로 잡으면 사후 강직 탓에 맛이 덜하다.

▲고하도 용머리해안 앞 해협은 먼 섬으로 가는 길목이다. Ⓒ섬학교

민어는 조기처럼 군단으로 몰려다닌다. 한창 민어가 많이 나던 시절에는 민어떼가 몰려들면 “뻘건 민어의 등이 물에 비쳐서 바다가 온통 뻘갰다”고 한다. 민어는 개구리처럼 우는데 “톱을 갖춰서(떼로 함께) 왁왁왁 울어대니 귀가 아프고 민어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낮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민어의 울음은 산란철에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다.

어부들에게 민어는 성질이 순한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다른 물고기들은 그물을 걷어 올리면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고 튀어오르는데 민어는 체념한 듯 가만히 있다. 그래서 어부들은 그런 민어가 "순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민어의 성질이 순해서가 아니다. 부레는 공기의 양을 조절해 부력을 유지하는 기관이다. 다른 어류에 비해 부레가 큰 민어는 그물에 걸리면 부레에 바람이 가득 차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민어가 그물에 많이 걸리면 그물째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레에 바람이 차서 못 움직이는 것을 민어가 성질이 온순하다고 한 것이다. 바늘로 가스를 빼주면 민어는 활기차게 바다로 도망쳐 버린다.

예부터 이름난 여름 민어어장은 신안의 임자도 앞의 타리도(태이도)와 재원도, 인천의 덕적도, 평안도 신도 바다였다.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1908)에 과거 한국 바다의 민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민어는 서남해에 많고 동해에 이름에 따라 점차 감소하여 강원·함경도 연해에 이르러서는 거의 볼 수 없다.”
현재는 다른 어장들은 더 이상 여름 민어가 잡히지 않고 임자도 어장에서만 잡힌다. 목포나 인천, 서울 등지로 가는 여름 민어들도 모두 임자도 어장에서 난 것들이다.

▲고하도 선창가. 모처럼 고향 섬을 찾은 딸이 아비의 어구손질을 돕고 있다. Ⓒ섬학교

108일 간의 조선수군 사령부 고하도


지금은 목포와 다리로 연결된 고하도(高下島)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해서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함대는 명량해전 승리 직후 서둘러 몸을 숨겨야 했다. 아직도 건재한 수백 척의 왜군 함대가 다시 공격해 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는 바로 군산 앞바다 고군산도까지 퇴각하여 은신한다. 지금의 선유도다.

잠깐 숨을 돌린 이순신 함대는 1597년(선조30) 10월 29일 고하도(高下島)로 내려가 진을 친다. 섬의 서북쪽이 병풍처럼 솟아있어 배를 감추기에도 적합한 곳이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고하도는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영산강의 내륙 수로가 연결되는 지점이라 전략적 요충지였다.

1598년(선조31) 2월 17일 완도(莞島)의 고금도로 옮겨갈 때까지 고하도는 108일간 조선수군의 총사령부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 기간 동안 이순신은 소멸되다시피 한 조선 수군의 재건을 위해 전함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모집한다. 고하도에서의 노력으로 조선 수군은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다. 조선시대에 나주목(羅州牧)에 속했던 고하도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보화도(寶花島)로 나온다.

조선시대 나주목에 속했던 고하도는 목포와 불과 2㎞ 거리밖에 안될 정도로 가깝다. 고하도는 보화도(寶和島), 비노도(悲露島), 고하도(孤下島)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해서 고하도라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목포 사람들은 흔히 ‘용섬’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형상의 용머리해안 때문이지 싶다.

고하도에는 ‘원마을’ ‘아래쪽마을’ ‘섭드러지’ ‘큰덕골’ ‘뒷도랑’ ‘가장골’ 등의 작은 자연부락들이 있는데 가장 큰 마을은 선착장 부근의 원마을이다. 이 일대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모충각’이 있고, 모충각 안에 이충무공기념비가 있다. 모충각 주변의 큰산 일대에 이순신장군이 조성한 고하도진성이 있다. 이들 유적들이 통칭 ‘고하도 이충무공유적’이다.

고하도의 큰산∼말바위 일대에서 고하도진지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순신이 정유재란 당시 고하도에 진지를 구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곳이다. 유적지 근처 큰덕골에는 이순신이 전함을 건조하던 조선장(造船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금은 그곳이 간척지가 되어 사라지고 없다. 다리가 놓아지기 전까지는 원마을 선착장과 목포항을 오가는 여객선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선들만 정박해 있다.

▲노적봉으로 유명한 유달산은 목포의 상징이다. Ⓒ섬학교

<유달산>

이난영의 노래나 노적봉으로 유명한 유달산(228m)은 목포의 상징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노령산맥이 바닷가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이다. 노량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니 그 의미는 사뭇 깊다. 유달산은 '영달산'이라고도 하는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달산이란 이름처럼 유달산 곳곳은 전설의 고향이다. 유달산 제일봉인 일등바위(율동바위)는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하여 육도바위라고도 한다. 또 심판받은 영혼이 이동한다는 이등바위(이동바위)도 있다. 전망 좋은 곳마다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소요정 등의 많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완만한 유달산 능선에서는 목포 시가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유달산 능선에 서면 목포 앞바다 섬들이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섬학교

섬학교 2016년 7월 2(토)∼3(일)일, 제49강 <고하도/목포 민어 미식기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7월 2일(토)>
08:00 서울 출발(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9강 여는 모임
-점심식사(목포에서 준치회덥밥)
-유달산둘레길 걷기(4.3km)
국도1,2호선기점-노적봉-이난영노래비-유선각-일등바위-얼굴바위-소요정-달성공원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관람
-갓바위 산책
-저녁식사 겸 뒤풀이(목포에서 민어회와 민어탕 등)
-자유시간 및 취침(<해운모텔>, 다인실)

<7월 3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장어탕요리)
-고하도 용오름둘레길 걷기(6km)-배를 타지 않고 버스편으로 들어갑니다^^
둘레숲길입구-말바우-뫼막개-용머리-숲길삼거리-대숲삼거리-큰덕골저수지-둘레숲길입구-이충무공유적지
-점심식사(목포에서 서대탕)
-목포 <자유시장>에서 장보기
-서울 향발. 제49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49강 <고하도/목포 민어 미식기행>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유달산 오르는 길목의 옛 목포부 건물이 이국적이다. Ⓒ섬학교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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