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강력하게 화친을 반대하여 당나라와 전쟁을 치렀으며,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조선은 김상헌 등 대부분의 신료들이 화친을 반대하다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화친의 의미는 단순히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굴욕적인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전통 중국에서 '화친'이 의미하는 것
우리나라에 주로 화친을 요구해왔던 중국에서는 화친이 어떤 의미일까? <한서(漢書)>에 "군주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변방의 이민족 통치자와 통혼하여 한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화친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화친의 본래 의미는 이렇듯 결혼 정책을 통해서 중원의 황실과 변방의 이민족이 우호를 다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른바 '백등산(白登山)의 굴욕'이라고 알려져 있는 한고조 유방(劉邦)이 겪은 치욕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할 당시 황하강 북쪽에는 묵돌(冒頓)이 흉노(匈奴)를 통합하여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 주변의 제후들이 속속 흉노에 투항하자 유방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출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흉노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백등산에서 포위되었다가 7일 만에 겨우 벗어난 후 유방은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조건은 한의 공주를 흉노의 선우(單于 : 흉노의 왕)에게 출가시키고, 술과 비단 등의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또한 형제의 맹약을 맺고 만리장성을 경계로 상호불가침하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화친이라는 단어는 매우 굴욕적인 의미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굴욕을 견뎠기 때문에 70여 년 후에 한 무제(武帝)가 흉노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중국인들은 자평하기도 한다.
화친을 꼭 굴욕으로만 생각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바로 당나라 때였다. 당나라는 고조 이연(李淵)이 돌궐과 화친을 맺음으로써 세력을 키워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후에는 위구르족의 도움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나라 황실이 화친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황실에 북방 유목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연의 모친은 성이 독고(獨孤) 씨였고, 당태종의 어머니 성은 두(竇) 씨이며, 당고종의 어머니 성은 장손(長孫) 씨였다. 모두 북쪽 유목 민족의 성이다. 이렇듯 중국에서는 왕조에 따라 화친을 적극적인 외교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송나라와 명나라는 화친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그 시대의 주류 학문이었고, 두 나라 모두 문벌이 득세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원래 '친(親)'이라는 글자는 혈육 간에만 사용하는 자였기 때문에 화친은 혈육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사대부들이 오랑캐에게 황실의 딸을 시집보내서 사돈을 맺는 것을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송나라는 이민족과의 갈등을 돈으로 해결했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는 전연지맹(澶淵之盟)이라 불리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요는 점령하고 있던 땅 일부를 송에게 반환했지만 그 대가로 송과 요가 형제 관계를 맺고, 송은 요에게 세폐(歲幣)라는 이름으로 매년 은 10만 량과 비단 20만 필을 바쳐야 했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금나라와 맺은 소흥화의(紹興和議)는 더욱 굴욕적인 것이었다.
금나라와 송나라는 군신 관계를 맺고, 금나라가 송나라의 황제를 책봉했으며 송나라는 은 25만 량과 비단 25만 필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 후에 맺은 융흥화의(隆興和議) 때는 양국의 관계가 숙질(叔姪) 관계로 바뀌고, 세폐는 은과 비단이 각 20만으로 조금 줄었으나 영토 일부를 금나라에 할양해야 했다. 화친을 거부한 송나라는 이렇게 돈과 땅으로 오랑캐와 인척 관계를 맺지 않는 체면을 지켰지만 뒤이어 등장한 몽골에게는 손자의 나라로 전락하더니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명나라는 주변국과 화친도 화의도 하지 않고 오로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다.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골을 물리치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한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굳이 화친을 해야 할 강한 이민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 말에 후금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이자성(李自成)의 난'이 발발하는 내우외환의 시기에도 후금과 화친은 고사하고 화의조차 맺지 않고 멸망하고 말았다. 문관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그들의 체면과 나라의 운명을 맞바꾼 것이다.
역대 중국의 외교는 화친을 통한 인척 관계, 형제 관계, 군신 관계, 숙질 관계, 조손 관계, 그리고 조공 책봉 관계 등 다양한 관계를 설정하고, 그 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관계의 명칭에서 보듯이 유교적 예법에 따른 형식과 절차가 중요했던 시대에 일단 관계가 정립되면 의무도 정해지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이 맺고 있는 화친의 방식은?
현재도 중국은 다른 나라와 관계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외교를 한다. 그들은 외교 관계를 크게 다섯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단순 수교, 선린 우호, 동반자, 전통적 우호 협력, 혈맹 등의 관계가 그것이다. 혈맹 관계가 가장 밀접한 관계이지만 현재 혈맹 관계에 있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하기 전까지 북한이 중국과 혈맹 관계에 있었으나 지금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과 함께 전통적 우호 협력 관계로 분류된다.
대부분의 인접국과 중요한 나라는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것도 다양하다. 미국은 건설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이고, 러시아는 전략적 협조 동반자 관계이며, 일본은 전략적 호혜 관계로 되어 있다. 영국 및 독일과는 전면적 동반자 관계이고, 프랑스 및 유럽연합(EU)과는 전면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이며, 러시아와는 전략적 협조 동반자 관계이다. 중국은 그 외의 많은 나라들과도 약간씩 다른 명칭의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협력(合作)'이란 주로 특정 경제 문제에 대한 협력을 의미하고, '전면 협력'이란 각각의 영역에서 전면적인 협력을 한다는 뜻이다. '동반자'란 상호 대립하지 않으며 이견이 있는 것은 유보하고, 공통의 관심사는 협력한다는 원칙을 준수하며 특정한 제3국을 공격하지 않는 관계이다. '건설적'이란 의미는 원래 적대 진영에 있었으나 협력과 소통을 통해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동반자 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전략적 협력'이란 세계 경제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군사 전략적 방면에서 상호 협력한다는 의미이다. '전략적 협조(協作)'는 전략적 협력보다 군사 전략적 방면에서 기술적 협조까지 포함하는 좀 더 광범위한 협력 관계이다.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는 '우호 협력 관계', 김대중 정부 때는 '21세기를 향한 협력 동반자 관계', 노무현 정부 때는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그리고 이명박 정부 때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왔다. 경제적 협력 관계에서 군사적 협력 관계를 포함하는 관계가 되어 외교의 범위가 확장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음 단계는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가 되는 것인데 중국과 전통적 우호 관계에 있는 북한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과 대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 관계를 설정하는 것인 것처럼 외교에 있어서도 관계를 정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현재 설정된 관계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제하고 또 현재 설정된 관계에 맞게 요구하면서 차근차근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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