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36년 만에 열린 당 대회에서 "우리 공화국은 세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주어를 '미국'으로, '세계의 비핵화'라는 표현을 같은 의미인 '핵무기 없는 세계'로 바꾸면, 오바마가 2009년 4월 5일 체코 프라하에서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그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오바마의 연설에는 찬사가 쏟아졌고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반면 김정은의 세계 비핵화 발언에는 냉소와 비난이 쏟아졌다.
두 사람의 닮은꼴은 '언행 불일치'에서 거듭 확인된다. 오바마는 30년간 무려 1조 달러를 투입해 핵무기 현대화에 나서기로 했다. 여기에는 전략 핵무기뿐만 아니라 '스마트 핵폭탄'으로 불리는 'B61-12' 1000개 생산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김정은 역시 세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해놓고선 핵 무력 증강에 여념이 없다. 2013년과 올해 두 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부친 집권 기간인 17년 동안보다 불과 4년 사이에 더 많은 탄도 미사일 및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이 대목에선 북미 간의 적대적 의존 관계도 발견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을 이유로 핵 보유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북한의 핵 위협을 이유로 핵무기 현대화 및 미사일 방어 체제(MD)를 정당화한다.
냉전 시대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핵무기 없는 세계로 가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MD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꾸로 미소 양국이 MD를 사실상 하지 않기로 하면서 핵 군축 시대를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는 MD와 핵무기 없는 세계는 양립 가능하다고 강변한다.
이게 얼마나 현실과 동 떨어진 얘기인지는 러시아가 최근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하기로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MD라는 방패를 뚫기 위해 메가톤급 핵탄두 15개를 동시에 장착한 초대형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을 선보인 것이다. 그 책임을 온전히 오바마에게 돌릴 수는 없다하더라도, 냉전 시대에 버금가는 핵군비 경쟁에 불이 붙은 것만은 분명하다.
김정은과 오바마는 서로를 향해 극언도 주저하지 않는다. 북한은 잊을 만하면 미국을 핵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위협한다. 이에 질세라 오바마는 "우리 무기들을 활용해 북한을 분명히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이 우리의 중요한 우방인 한국 바로 옆"에 있어서 참고 있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한 오바마마저도 북한을 핵 선제 공격 대상에 올려놓았다. 이란도 여기에 포함되었었는데 핵 합의로 사실상 북한만 남게 되었다.
이렇듯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핵 문제와 관련해선 닮은꼴이다. 오바마의 눈에는 북한이 '핵무기 없는 세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고, 김정은의 눈에는 미국이 '세계 비핵화'의 최대 걸림돌이다. '거울 영상 효과'라는 말이 떠오르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건 비교나 풍자의 의미를 넘어선다. 한반도 핵 문제가 풀리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악마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정작 내 안에 있는 악마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이에 북핵과 (MD를 포함한) 미국 핵은 '동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북한이 핵 실험을 할 때마다, 그리고 최근 당 대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핵을 가진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숨 내뱄듯 던진다. 나 역시 골몰하고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 위협을 가하는 미국을 어떻게 상대할까?'라는 질문을 놓고 60년 넘게 씨름해왔다.
우리가 정말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꾼다면, 이제는 두 가지 질문을 함께 던져야 한다. 왜? 북핵'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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