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는 의례적인 입장을 발표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조국통일 3대 헌장'을 강조하면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닌, 북한 주도의 통일을 꿈꾸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조국통일 3대 헌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그리고 1993년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인데, 이는 모두 김일성 주석 집권 시기에 나온 것들이고 북한이 주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북한이 적어도 통일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1990년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라며 "북한이 그런 판단을 하게 되기까지는 일정 부분 국내의 정치 상황도 영향을 줬다. 남한의 분열을 보면서 분열의 한 쪽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다시 쓸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이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조국통일 3대헌장을 확실하게 틀어쥐고 나가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전면적인 긴장 완화나 남북 교류 활성화 등은 실제 의도를 숨기기 위한 화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극비 방한해 평화협정 논의에서 한국이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는 <중앙일보>의 보도와 관련, 정 전 장관은 "우리에게 '미국, 북한, 중국 셋이 만나서 평화협정 이야기하면 안 될까?'라고 물어보고 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클래퍼 국장의 발언은 미국이 우리에게 '이제 이렇게 할테니까 알고 있어라'라고 미리 면역을 시켜주는 것"이라며 "한국은 개성공단까지 폐쇄시키면서 온몸을 던져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고 있지만, 미국은 대화로 가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클래퍼 국장이 한국을 몰래 다녀간 것을 보면 미북중 3자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건데, 이러면 우리는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열 받는다고 남북관계의 손을 놓을 수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자초하는 꼴이 된다"고 우려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36년 만에 열린 북한의 제7차 당 대회가 마무리됐습니다. 이번 당 대회에서 북한은 남북 군사회담과 교류 협력을 언급하면서 대남 유화 제스처를 보냈습니다. 지난 9일에 공개된 사업총화 결정서에서는 "북과 남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며 통일의 동반자로서 함께 손잡고 북남관계개선과 조국통일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요. 당 대회 이후 북한이 어떤 대남 행보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하십니까?
정세현 :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실제 중요한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조국통일 3대 헌장'을 "일관하게 틀어쥐고 통일의 앞길을 열어나가야 한다"고 한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건 좋지 않은 조짐입니다. 조국통일 3대 헌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그리고 1993년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인데, 이는 모두 김일성 주석 집권 시기에 나온 것들이고 북한이 주도한 작품입니다. 이번 당 대회 복장도 그렇고, 김정은이 완전히 할아버지 때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우선 7.4 남북공동성명의 경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이 만들어졌는데, 이건 북한이 제안한 겁니다.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우선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남한이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당시 7.4 남북공동성명의 숨은 주역인 정홍진 전 중앙정보부 국장도 나중에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가 될지 모르고 받았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내 정치 이슈 중 통일 문제를 선점하려는 계산이 있었다는 점도 남한이 이를 받아들인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을 겁니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가 미·중·소·일 4국이 한반도의 전쟁 억제를 보장하는 이른바 '4대국 안전 보장론'을 들고나온 것에 박정희 정권이 적잖게 놀랐기 때문에 정부가 통일 문제를 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다음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김일성 당시 주석이 1980년 10월 10일 장시간 설명한 통일 방안입니다. 김일성은 이 방안을 설명하면서 2개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용납하고 그 토대 위에서 공존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안을 실현하기 위해 5대 선결 조건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철폐, 반공 정책 포기, 주한미군 철수, 반공법 철폐, 민주인사의 집권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인사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인사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용공 내지 연공할 수 있는 인사가 집권을 해야만 연방제를 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결 조건이 다 이루어지면 굳이 연방제를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결국 북한은 겉으로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 소위 '투 코리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질적으로는 통합된 공산주의 1체제 1국가 1정부를 만들려는 노림수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는 공산화 통일방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왜 남한이 이 방안을 받지 않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례로 1981년, 통일원 장관을 지냈던 이용희 교수가 개인 자격으로 영국에 가서 노동당 헤럴드 윌슨 전 총리를 만났을 때 윌슨 전 총리가 왜 남한은 북한이 제안한 방안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당시 윌슨 전 총리가 남쪽이 'Confederative republic of Koryo'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이 교수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남북 간에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 연방제인데, 남한이 그걸 못 받는다는 건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전 장관은 선결 조건 5개를 윌슨 전 총리에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윌슨 전 총리가 "아 그럼 그건 대상이 없는 제안이었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남한이 받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는 평가입니다.
북한에서 이 방안을 제기한 것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면서 신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영·호남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본 북한은 남한을 두 쪽 낼 수 있고, 그 한쪽과 손잡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북한의 전통적인 '2대1' 전략입니다.
북한은 대체적으로 남한의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이러한 전략을 내놓습니다. 지난 1960년 8월 14일, 해방 15주년 경축사 형식으로 등장한 연방제 통일 역시 4.19 혁명이 벌어졌던 때였습니다. 정권의 구심력이 약해질 때 통일 방안을 발표하는 겁니다.
이러한 북한의 의도가 있기 때문에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좋은 방안이라고 평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유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이 임박해지면서 김일성 주석이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이제 통일은 어느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자신들이 잡아 먹힐 수 있다는,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가 반영된 겁니다.
이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흡수통일 되면서 급기야 김일성 주석은 1991년 신년사에서 '이제 연방제도 느슨한 형태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북한이 이전에 주장했던 연방제는 남북을 묶어두는 긴밀한 연방제였습니다. 긴밀한 연방제를 주장하던 북한이 스스로 느슨한 형태로 풀어버린 것입니다. 이전의 연방제 방안을 남한이 덜컥 받아버리면 오히려 거꾸로 자신들이 먹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느슨한 것으로 풀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실질적인 이론가로 평가받던 한시해 전 유엔 차석대사는 미국에서 김일성 주석이 언급한 느슨한 연방제는 미국의 초기 연방제와 같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를 통해 남한은 북한이 느슨한 연방제를 통해 국가연합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연방제는 1989년 남한 정부가 제기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들어가 있던 '남북연합' 구성 개념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도 이 연방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투 코리아'를 기정사실화한 합의서였습니다.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않고 상대를 파괴·전복하려는 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중심이었죠.
그러더니 북한은 이듬해인 1992년 1월 22일 김용순 국제 담당 비서를 미국으로 보냅니다. 김 비서는 미국 국무부 아놀드 캔터 차관과 만나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수교를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과 수교를 거절하고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 사찰을 받으라고 압력을 넣으니까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로 대응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김영삼 정부가 북한의 붕괴를 이야기하면서 남북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노태우 정부 시절의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작은 '남남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 화해·협력 세력이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면서 대북 사업도 시작됐는데, 김영삼 정부 이후 강경 기조로 바뀌면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때 북한은 또 하나의 내용을 발표합니다. 1993년 4월 7일 최고 인민회의에서 강성산 총리가 수령님의 지시라면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합니다. 민족대단결 논리로 모든 것을 덮고, 통일이라는 명분 앞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남쪽 내부의 일종의 정치·사회적 모순을 일으키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북한이 또다시 '남조선 혁명역량 강화'의 차원에서 10대 강령을 내놓은 겁니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들어서면서 2000년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등장했고 이어 2007년 10.4 선언까지 나오면서 10대 강령은 잊혀진 문건이 됐습니다.
결국 1991년 신년사부터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나올 때까지 북한의 대체적인 입장은 1980년에 나온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과 같은 긴밀한 연방제가 아닌, 사실상 '투 코리아'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통일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전 조선반도의 공산화'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남북 간 교류 협력도 활발하게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6년 만에 김정은이 다시 이를 끌고 나온 것입니다. 북한이 적어도 통일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1990년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봅니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당시 북측의 책임연락관이었던 최봉춘이 당시 남측 연락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회담대표들을 금수산 궁전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김일성이 파티를 열어줬는데, 그 때 김일성이 이 합의서로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 흡수통일의 발목을 잡았다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스스로 굉장히 절박했을 때, 아쉬웠을 때는 그렇게 해놓고 지금 와서 그때보다 형편이 조금 풀리니까 자기 주도의 통일을 다시 한 번 꿈꾸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는 한낱 '미몽'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북한이 그런 판단을 하게 되기까지는 일정 부분 국내의 정치 상황도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한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겠다는, 소위 '2대1'전략을 다시 쓸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겁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북한이 군사회담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정세현 : 군사회담이나 남북 긴장 완화는 의례적인 이야기라고 봅니다. 북한은 구체적으로 의제를 제시했습니다. 확성기 방송과 삐라 살포를 중단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그만큼 북한에 아픈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이걸 중단시키고 싶은 겁니다.
북한이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조국통일 3대헌장을 확실하게 틀어쥐고 나가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전면적인 긴장 완화나 남북 교류 활성화 등은 실제 의도를 숨기기 위한 화장에 불과한 겁니다.
북한 핵-경제 병진노선, 핵으로 경제를 사겠다는 것
프레시안 :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 위원장'이라는 직책으로 이른바 '최고 수위'에 올라갔는데요. 최고 수위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정책과 관련해 '김정은' 만의 브랜드는 발표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정세현 : 사업총화 보고서에서 '국가 경제 발전 5개년 전략'이 발표됐습니다. 김정일 집권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였기 때문에 감히 경제 발전 계획을 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5개년 계획을 내놓았다는 것은 이제 당이 나서서 모든 것을 끌고 갈 정도로 상황이 풀렸다는 징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 생산량을 얼마나 높인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수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대외, 대남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는 경제인데도 말입니다.
이번에 눈에 띈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력 문제를 상당히 길게, 글로 풀어보면 몇 문단이 될 정도로 많이 언급했다는 겁니다. 이게 북한의 경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데, 북한 경제의 이른바 '병목'은 전력이라는 것을 드러낸 셈입니다.
북한이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력난이 심각하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보면, 결국 전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김 제1위원장이 말한 5개년 발전 전략도 성과를 내기 힘들 겁니다.
그런데 전력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북한이 당 대회를 앞두고 벌인 '70일 전투'의 성과로 제시한 수력발전소인 '백두산영웅청년3호발전소'에 누수가 생기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지난 1994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됐던 '제네바 합의' 때도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하면서 북한이 전력을 확보한 측면이 있는데요. 결국 대외 개방 없이 북한의 에너지 문제가 풀리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요?
정세현 : 북한의 핵 문제를 풀려면 경제난을 풀 수 있는 단초를 열어줘야 하는데 그게 에너지 문제일 겁니다. 핵 카드를 가지고 북한이 받아내려는 것이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경제 지원 등인데 경제 지원은 우선 먹는 식량을 달라는 것일 테고 그 다음은 에너지일 겁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필요한 것과 줘야할 것을 배합해서 협상을 시도할 겁니다.
실제 북한은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엄청 '남는 장사'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북한은 5메가와트 짜리 영변 원자로 하나를 들고 1000메가와트 짜리 경수로 2기를 받아냈습니다.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따지자면 400배가 남는 장사를 한 셈이죠.
지금 북한에는 내부에서 끌어다가 쓸 수 있는 이른바 '내부 예비'는 없을 겁니다. 그러려면 바깥에서 뭔가가 들어와야 합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개혁개방이나 평화적 외교를 통해 투자를 유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렇게 하다 보면 체제가 붕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핵을 가지고 한 방에 얻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제네바 합의 때처럼 핵을 통해서 한 방에 챙기고, 이를 종잣돈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생각이죠.
북한이 핵과 경제의 병진노선을 항구적인 노선이라고 못 박았는데, 여기에는 핵을 가지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밑천을 벌어들이겠다는 의도도 있습니다. 즉, 북한이 핵 카드를 가지고 받아내려는 것에는 북미 수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지원도 포함돼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 공동성명 모두에 경제 지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핵 카드를 잘 쓰면 정치·외교적인 입지도 올라가고 경제적 지원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돈을 벌어서 경제를 꾸려간다는 계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성과가 없다면 미국을 다급하게 만들기 위해 5차 핵실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협상을 하는데도 막혀버리면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핵실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프레시안 : 북한은 이번 당 대회에서 핵 전파 방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자신들은 스스로 이미 핵 보유국이라고 자평한 것인데요. 겉으로만 보면 비핵화에 대한 의지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정세현 : 북한에서 나온 연설을 분석할 때는 키워드끼리의 맥락을 잘 봐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목을 보면 결국 비핵화가 아닌, 비확산 쪽으로 끌고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는 북한이 미국의 북핵 정책 본심을 읽어낸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이야기할 때,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로 맞섰습니다. 남쪽에 오는 미국의 핵우산을 접으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미 동맹은 약화되고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이 뻔히 예견되는 한반도 비핵화를 미국이 절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비확산 정도라면 평화협정이나 북미 수교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비확산은 비핵화와 달리 무기 시장이 유지됩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그렇게 나쁜 카드는 아닙니다.
북한은 이런 계산을 통해 핵 전파 방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공언하면서,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비확산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풀이됩니다. 비확산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를 이끌어내겠다는, 상당히 치밀한 제안이었다고 봅니다.
미국-북한-중국, 3자 평화협정 추진?
프레시안 : 북한의 당 대회가 한창일 동한 흥미로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7일 <중앙일보>가 보도한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방한이었는데요. 지난 4일 비공개로 들어왔다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서 국가정보원 인사들을 만난 뒤에 다음날인 5일 떠났다는 건데요. 클래퍼 장관이 평화협정 논의와 관련, 한국 정부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타진했었다고 하는데요.
정세현 : 우리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것은 아닌지 불길합니다. 10.4 정상선언 4항을 보면,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제안이었습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발표 이후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 제재가 들어오면서 공동성명이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북한은 결국 다음 해인 2006년 1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이를 본 부시 대통령은 압박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저런 문구를 제안한 겁니다.
미국은 이번에도 제재나 압박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는 "미국, 북한, 중국 셋이 만나서 평화협정 이야기하면 안 될까?"라고 우리한테 물어보고 간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평화협정 체결과 수교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 이렇게라도 동북아 문제를 해결해 놓고 싶을 겁니다. 그래야 남중국해에서 미국이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는 여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청와대가 어떤 답을 줬을지가 의문인데요. 평화협정을 미끼로 북한의 핵 문제를 비확산 정도로 끝내려고 하면 안 된다고 딴지를 걸었다면, 2009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평화협정을 추진하려고 했을 때 이명박 정부가 '비핵개방3000'을 내세우면서 미국의 행보를 막아섰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이 북한의 핵 동결과 NPT 복귀를 전제로 미국에 평화협정을 타진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중국은 자신들도 평화협정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 미국과 북한, 중국이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국이 끼어들 명분은 충분합니다.
동아시아 문제를 풀어가는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지역의 헤게모니도 가지려는 것이 중국의 목표라면, 중국은 절대 미국과 북한 사이에 다리만 놔주고 빠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미국과 중국이 같은 용어를 쓰면서도 속사정은 다릅니다. 중국은 일단 한반도 비핵화를 밀어붙여서 미국에 대한 핵우산을 줄이려는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같은 무기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협상이 진행된다면, 막판에는 비확산에서 끝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세게 밀어붙이다 보면 미국이 자국의 무기 시장이 없어진다는 이해관계 때문에 협상을 관둘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일단 협상의 계기를 마련하고 그걸 자기 중심적으로 끌고 가려면 우선 미국과 북한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을 타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미국이 굳이 남한을 빼려는 이유는 뭘까요?
정세현 : 북한이 남한은 빠지라고 했을 겁니다. 평화문제는 미국과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죠. 그게 끝나고 난 뒤에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는 남북이 협의하자는 입장일 겁니다.
1983년 북한은 랑군 사건을 일으키고 나서 두 갈래로 회담을 제안했습니다. 군사 문제는 미국과, 통일 문제는 남한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당시 남측에 "군사 문제 미국이랑 해결할 테니 남한은 그동안 방청객으로 앉아서 지켜보고 있으라"면서, "너희들 운명은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알고 통일 문제 협의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북한의 본심이 드러나면서 정부는 당시 북한과 회담을 거절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한은 평화협정 문제에서 남한이 끼어드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레시안 : 이렇게 되면 북한-미국 또는 북한-미국-중국 간에 물밑이든 공개든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클래퍼 국장이 "어느 선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흘려준 것도 일종의 면역을 시켜주는 거라고 봅니다. 미국이 우리에게 "이제 그렇게 할 테니까 알고 있어라" 라는 겁니다. 한국은 반대하겠지만 미국은 대화로 가겠다는 겁니다.
한국은 개성공단까지 폐쇄시키면서 온몸을 던져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고 있지만, 이대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국이나 중국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당초 북한은 핵 카드를 가지고 6자회담을 통해 미국의 수교도 받아내고 평화협정과 경제 지원도 받아내려고 했는데 미국의 대북정책, 특히 북핵 정책의 착오로 인해 핵 능력이 커져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6자회담 방식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겁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은 남한의 이명박-박근혜 정부, 그리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에도 고맙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제 몸값이 굉장히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책임 있는 핵 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비확산에 협조할 테니까 수교와 평화협정, 경제 지원 내놓으라고 하면서 미국과 협상하려는 생각일 겁니다. 마침 중국이 다리도 놓아주고 있구요.
클래퍼 국장이 한국을 몰래 다녀간 것을 보면 미북중 3자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건데, 이러면 우리는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열 받는다고 남북관계의 손을 놓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자초하는 꼴이 됩니다.
여기에 김정일의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가 북한에 다녀오고 나서 북한과 일본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북한이 겐지에게 다리를 좀 놓으라고 귀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아닌, 남한이 동북아의 고립된 섬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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