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한국은행이 국책 은행 자본 확충을 위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의 핵심 관계자들이 4일 한자리에 모였다.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이 주재한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협의체' 첫 회의(킥 오프(Kick-off) 회의)다.
정부와 한은 갈등 봉합, 기재부 역할 커질 듯
이 회의는 크게 두 가지 상징성이 있다.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판 양적 완화(선별적 양적 완화) 거론으로 불거진 갈등이 적어도 겉으로는 수그러들었다는 점이다. 양적 완화 정책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므로, 한국은행 노동조합이 강하게 반발했었다. 또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보가 이례적으로 비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일 "구조 조정에서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밝힌 뒤로는, 눈에 띄는 갈등은 없다.
임종룡 금융위원장 역시 당초 국책 은행 자본 확충과 양적 완화를 통한 유동성 공급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밝혔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국판 양적 완화 추진을 못 박은 뒤로는, 입장을 바꿨다.
이 회의가 지닌 또 다른 상징성은, 향후 구조 조정 정국에서 기획재정부의 역할이 커지리라는 점이다. 기획재정부 주도로 마련된 회의라는 점이 그렇다. 회의 내용 역시 기획재정부가 언론에 소개했다. 얼마 전까지는 산업 구조 조정의 정부 측 사령탑으로 금융위원회가 꼽혔었다. 앞으로는 달라질 전망이다.
향후 두 달 안에 구체적 방안 마련
이날 회의에는 최 차관 외에 이찬우 기획재정부 차관보, 김용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보, 민병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이대현 산업은행 부행장, 김영수 수출입은행 부행장 등이 참가했다. 한국판 양적 완화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발했던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보가 참가한 점이 눈에 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이날 회의 참가자들은 향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금융시장 불안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 비상 계획)'의 일환으로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을 포괄적으로 검토해서 방안을 찾기로 했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올해 상반기까지 구체적인 안을 내기로 했다. 두 달이 채 안 남은 셈이다.
너무 많은 제약 조건, 정책 선택 폭이 좁다
문제는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정책 범위가 매우 좁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선택지가 적은데, 박 대통령의 고집 때문에, 제약 조건이 더 추가됐다.
일단 증세는 금기어다. 재정 건전성을 더 악화시키는 방안, 예컨대 국채의 대량 발행 역시 정부가 꺼린다. 야당과 타협해야 하는 추가경정 예산 편성 역시 내켜하지 않는다. 해운 및 조선 산업 부실에 대한 현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표현 역시 피해야 한다. 경제 위기를 암시하는 표현보다는, 경기 부양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이 좋다.
최후의 수단인 양적 완화가 먼저 거론된 건 이런 사정 탓인데, 여기도 걸림돌이 있다. 현행 법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에 직접 출자할 수 없다. 산업은행은 이명박 정부에서 부분적으로 민영화돼 있기 때문이다.
수출입은행 출자와 코코본드 활용
이런 제약 조건을 충족하는 대안은 많지 않다. 일단 수출입은행에 대한 한국은행의 출자는 가능하다. 수출입은행은 공기업이므로 한국은행이 출자하는데 법적 제약이 없다. 국회를 거칠 필요도 없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하면 된다. 통화정책 영역이므로, 증세 및 재정 건전성을 둘러싼 논란과도 관계가 없다. 따라서 이건 바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유력 대안은 '코코본드(CoCo bond, contingent convertible bond)' 활용이다. 의무 전환 사채, 조건부 자본 증권 등으로 번역된다. 경우에 따라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이다. 주식과 채권의 성질을 함께 갖고 있어서 지금 국면에 딱 들어맞는다. 당초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한국판 양적 완화에 부정적이었던 건, 현행 법을 바꿔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산업은행 채권을 한국은행이 인수하는 게 가능하다 한들, 그렇게 들어간 돈은 부채 계정에 잡히기 때문이다. 지금 중요한 건 산업은행 등 국책 은행의 자기 자본 비율을 높이는 일이다. 자본 건전성을 높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공급한 유동성이 부채 비율만 늘린다면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자본 계정에 돈을 넣는 방안이 필요했다. 코코본드는 이런 목적에 부합한다. 형식은 채권이지만, 바젤 III (Basel III, 은행 자본 건전화에 대한 국제 기준) 제도에선 자본으로 분류된다.
법적 문제는 없나. 형식상 채권이므로, 산업은행이 발행한 걸 한국은행이 바로 인수하면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풀려면 결국 현행 법을 바꿔야 한다. 야당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회로가 있다. 산업은행이 먼저 공개 유통 시장에 코코본드를 발행한다. 그리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공개 시장 조작 대상 증권에 산은의 코코본드를 포함시키면 된다. 그 뒤, 한국은행이 공개 시장 조작의 일환으로 코코본드를 사는 건 문제가 없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에 출자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결국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향후 논의 과제
다만 이 방법 역시 부작용이 있다. 산업은행이 한꺼번에 코코본드를 대량으로 발행하면 금리가 오를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 코코본드는 형식상 채권이다. 채권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가격이 떨어진다. 채권 값과 금리는 반비례 관계다. 따라서 금리가 오를 수 있는데, 이는 경기를 냉각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경기를 더 망치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시중은행의 코코본드 발행 계획 역시 어그러질 수 있다. 따라서 산업은행 자본 계정에 넣어야 할 돈 전부를 이 방식으로 마련하기란 무리다.
나머지 돈은 어쩔 건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얼마를 더 확보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국책 은행 자본 확충 협의체' 회의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요컨대 국민, 혹은 다음 세대에게 내밀 청구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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