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문명의 대전환과 큰적공'을 주제로 원광대학교와 원불교가 29일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서승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의 발제문을 싣습니다.
서 교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없어지면 한반도와 동아시아 냉전이 사라지고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동아시아 갈등과 위기의 요인은 북핵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북핵이 한반도 냉전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한반도 냉전 구조가 북핵 문제의 근저라는 겁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이 진행되지 않아 벌어지고 있는 한중일 간의 역사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서 교수는 지난해 12월 한국과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주목하며 그 배경으로 "미국의 강력한 개입"을 지목합니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로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가해자' 일본은 미국의 옹호에 힘입어 식민 지배의 책임을 피해왔으며, 이번 위안부 합의가 그 구조를 드러낸 극명한 사례라는 주장입니다.
서 교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분할 통치 하는 미국의 정책이 변하지 않기에 한반도 위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제국주의 중심의 역사관 극복을 동아시아 평화의 선결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발제문의 원제는 '동아시아 평화의 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 인권의 관점에서'입니다.
북한은 지난 1월 6일 4차 핵실험을 하고, 2월 7일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미·일은 이를 유엔 결의 위반으로 비난하면서 종전보다 엄격한 유엔 제재 결의를 채택했다. 한국 정부는 대북 제재에 앞장서서 개성공단 폐쇄를 단행하고 사드(THAAD) 배치까지 표명했다. 3월에는 사상 최대의 한미 군사훈련, '키리졸브'를 실시하여 북한에 대한 상륙훈련까지 했다. 이에 대항하여 북한에서도 해안 방어훈련과 상륙훈련을 시행하고, 핵 소형화를 과시하여 제5차 핵실험을 시사하면서 연일 미사일 발사를 실시하는 등 한반도의 대립과 긴장은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북핵 위기로 말미암아 첨예한 대립이 드러난 동아시아의 위기의 근저에 냉전의 잔존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소가 블록을 형성하면서 극단적인 대립을 하는 국제정치 질서인 냉전은 일반적으로 1989년에 종결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한반도/동아시아에는 냉전이 잔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키미야 교수는 "지구적인 냉전의 종언은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냉전의 종언'이라는 배당을 낳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북한이 체제생존을 내건 핵/미사일 개발을 본격화하여 긴장이 고조되었기에 냉전의 종언을 넘어 한미일의 협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북한이 생존을 위해서 핵/미사일 개발을 했기에 한미일 동맹이 불가피해지고, 냉전이 한반도/동아시아 지역에 잔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북핵/미사일 문제가 없어지기만 하면 한반도/동아시아 냉전은 사라지고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핵문제만 사라지면 동아시아/한반도평화가 이루어질 수가 있을까? 북한의 핵으로 인하여 이 지역에 냉전이 잔존하고 있다는 논법은 전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냉전이 종결됐다고 하지만 한반도 냉전이 해제되지 않고 적대적인 정책이 오히려 강화되었기에 북한은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으며, '빈자의 무기'인 핵에 의존하게 된 것이 아닌지? 북핵문제의 근저에는 한반도 분단이 있으며, 그 원인 제공한 것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이다. 문제는 그 분단 상황이 왜 해소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왔는가 하는 문제다. 그 원인을 6.25 전쟁에 찾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6.25 전쟁은 우리나라의 분단을 고착시키고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든 것은 사실이나 정전협정에는 정전협정 발효 후 3개월 이내에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이 철수하여,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개정을 위한 관계국의 정치회담을 개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듬 해 제네바에서 개최된 정치회담도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그 이후 잠정적인 정전선은 반영구적인 분단선이 되어버렸다.
'세계' 냉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냉전의 주 무대는 유럽이었으며, 게다가 냉전의 종언이 동서 양 진영, 즉 미소 간의 화해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련이라는 국가가 스스로 해체하는 전대미문의 '국가의 자살'이 일어남으로써 소련‧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일어난 것이다. 소련‧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미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일방적인 승리로 받아들여지고, 역사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즉 '역사의 종언'이 선언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1972년에 미국과 중국 간에 대 소련 준군사동맹이 형성되었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속에서 '죽의 장막'은 일찍이 거두어졌다.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냉전의 종언이 합의된 바도 표명된 바도 없으며,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역사적인 원인이 거의 제거되지 않았다.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분할 통치(divide and rule)'하는 미국의 정책이 변하지 않기에 한반도 위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조적으로 재검토하여, 한반도/동아시아 평화의 조건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1. 동아시아 평화와 역사문제
동아시아의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일차적으로 이 지역에서 전쟁과 폭력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 노예화, 식민지화에 기인되는 것이었다. 작년 9월 3일 항일전쟁 승리 70년에 즈음하여 시진핑 주석은 그 가장 중요한 의의를 '근대 이후,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완전히 승리한 민족 해방 전쟁'라고 표명했다. 그렇다면 가해자인 일본은 그에 걸맞는 과거청산을 해야지 동아시아에서의 협동이나 '화해'가 가능할 것인데, 일본은 그러지 못하고 이웃나라와 갈등과 대립을 재생산해 왔다.
하타노 교수는 일본 외교 현안인 '역사문제'는 역사인식 문제와 전쟁과 식민지 통치의 청산, 즉 전후처리-법적으로는 '청구권'에 수렴되는 문제라고 하고 있다. 역사인식 문제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나 교과서 문제, 난징 대학살 문제가 있으며, 전후 처리 문제는 강제연행/강제노동,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포함된다고 한다. 여기에 영토 문제가 관련되는 것이다.
역사인식이란 역사적인 사건들에 관한 집단적인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자,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정체성과 관련되는 통합성(Integrity)만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인식은 집단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 데 동기를 부여하고, 행동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긍정-부정의 평가는 사건의 재발/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지극히 중요하기도 한다. 전쟁 추진을 위해 병사/국민들의 사기 앙양은 심리전의 중요한 부분이고, 바로 역사인식과 관련된다. 국민의 호전성을 부추기는 역사인식 문제는 보통 내정의 문제로 간주되어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간주되지 않지만, 국가 간의 갈등 해소를 논할 때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 역사 교과서 대화처럼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다.
위와 같은 '역사문제'를 일본은 얼마나 제대로 대처해 왔을까? 작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한일합의는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양 정부의 노력의 일환이라고 주장되지만, '역사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드러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2. 12‧28 한일 '합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 정부는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 방안에 합의하고,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합의사항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에 대한 일본 측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아베 총리는 '전(前) 위안부'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함.
2) 일본 정부의 정부예산으로 한국 정부가 만든 전(前) 위안부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 전(前) 위안부 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추진.
3) 상기 2)의 조치를 착실히 실시하는 것을 전제로,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하고 양국정부는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함.
이에 대한 한국 측 입장은 다음과 같다.
1)일본 정부의 조치를 평가하고,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
2) 한국 정부는 소녀상에 대한 일본의 우려를 인지하고,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
3) 한국 정부는 향후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함.
이 합의에 대해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어떤 정부도 (…) 제대로 다루지 못한 어려운 문제에 대한 최상의 것을 받아낸 것"이라고 자평했다. 일본 주요 미디어와 공산당을 포함한 각 정당, 국민 여론은 현안을 해결하고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 제거되었다고 환영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이번 '합의'에서 일본 정부가 군의 관련을 인정하고, 총리가 책임을 인정했으니 중요 현안이 해결되었으며, 앞으로 한일 관계 개선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합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압도하고 있다. '합의' 직후에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와 각 정당, 사회단체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비판의 논점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1) 이 '합의'가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동의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2) 국민들과의 여론 수렴이 없으며, 3) 할머니들 요구해 온 일본군 관여의 인정, 일본 정부 공식 사죄, 일본 정부의 피해보상이라는 요구도 제대로 얻어내지 못했다. 4) '합의'를 둘러싼 법적 효과에 문제가 있으며, 5) 한국의 외교적인 패배이며, 6) 인권의 보편성의 상실이고, 7) 기억/기념하고 역사 교과서에 명기하는 문제가 빠져있다. 7) 아베 정권의 진정성에 문제가 있다 등이다.
요컨대, 첫째 당사자와의 의논도 양해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합의'가 한일 외상들의 합의문서 없이 기자회견에서 구두 표명하고 뒤에 양국 수뇌가 전화로 확인하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통화 내용의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합의'에서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표명했다. '합의'에 조약과 같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게 하려면 '합의'가 문서화되고, 국회의 비준을 얻어야 하는데, 전혀 국회와 의논도 없었다.
셋째로 '합의'에서 유엔의 공식 명칭인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군의 관여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 고노 담화를 계승하였으나, 조직적인 관여를 애매모호하게 하고 있다. 군의 관여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이번 합의에서 종전과 같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을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그렇다고 법적인 책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고, 애매한 표명에 머물고, 일본국내에서는 일관되게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에 일본 정부는 거출하는 10억 엔은 법적 배상금의 성격을 띨 수가 없고, 일본 정부도 일본에서 "10억은 배상금이 아니다"고 거듭 표명해왔다.
또한 아베 총리는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으나 아베 신조는 일본 국회의원들이 뉴욕타임스에 "위안부는 돈벌이하기 위해 스스로 종사한 매춘부"라는 전면 광고를 주도하는 등 지금까지 '위안부'는 개개의 동기에서 민간업자에게 '자발적'으로 종사한 매춘부이며, 강제성이 있다 할지라도 개개의 매춘업자나 인신매매꾼들이 한 짓이라고 하여 일본군 및 일본국가의 관여는 부정해왔다. 1월 31일 확인된 바에 의하면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질문서에 대해, 제63차 회의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일본정부가 조사한) 서류 어디에도 군과 관헌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forceful taking away)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답변서를 제출했다.
또한 이번 '합의'에는 교과서에 반영하고 교육하는 문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를 기재하는 책은 이제는 하나로 줄어들었다. 일본은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평화의 기념비(소녀상)의 철거를 압박하고 한국 정부도 동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억-기념에 대하여 역행하는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을 버리려고 하지 않고, 인류에 대한 범죄를 기억한다는 인류사적인 책무에 전면에서 거역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그나마 이번 '합의'를 한국에 대한 예외적이고 특별한 조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베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3. 정치에 종속하는 중대한 인권문제
이번 '합의'의 배경에 미국의 강력한 개입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은 우선 동아시아 안보 위기를 부추기고, '한미일 동맹'을 기정사실화하여, '한미일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한일 협력/화해가 필요하다면서 한일 관계의 장애물로 되어 있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여, 압력을 행사해왔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보장 장치인 한미일 동맹을 막고 있는 것이 과거 청산을 외면해 온 일본이 아니라,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고집하는 한국인 것 같이 본말전도 된 논리를 만들어 한국을 압박했다고 김준영 교수는 지적한다. 결국 한국은 치욕적으로 굴복하여 명분 없이 일본에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한중관계를 훼손하면서까지 중국 포위에 앞장서게 되어 사드(THAAD) 구입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영국의 <가디안(The Guardian>지는 "이번 합의가 오바마 정부의 지속적이고 때로는 직설적인 압력의 결과라고 진단하면서, 승리자는 일본과 함께 미국"이라고 했다.
미국은 시대착오적인 냉전 논리를 불러내어 한미일 동맹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북한을 표적으로 하면서, 중국 견제에 정조준하고 동북아의 군사 긴장을 유지하고,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도모함과 동시에 한국을 '한미일 동맹'(사실상 미일동맹)에 종속시켜 미국의 세계적 경찰 행동과 패권 관철을 위한 도구로 구사하려 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그러한 미국의 의도에 영합을 하면서 군사화의 욕망을 채우고, 헌법개정=일본 군사대국화의 행보에 탄력을 받으려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미일의 동아시아 군사화의 종속변수처럼 되었다.
또한 이번 '합의'가 한일조약의 본 뜨기라는 말이 무성하다. 인간의 존엄이나 권리를 정치적 거래의 도구로 삼은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50년 전 한일회담에서도 인권 문제를 '국익 추구' 내지 정치적 야합의 거래수단으로 삼으려는 미국은 강제적인 개입을 하였다. 일본은 그에 영합하여, 식민지 지배 책임 청산을 소임으로 하는 한일회담을 전적으로 왜곡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독재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정치자금을 거머쥐기 위해, 정작 해야 할 식민지 청산은 하지 않았기에, 한일 갈등의 화근이 남았다. 즉, 미국은 곤경에 빠진 월남전쟁에 한국과 일본을 동원하여 동아시아 냉전의 강력한 일익을 형성하고자 했으며, 일본은 그것을 빌미로 '한국 병합은 적법하게 이루어졌다', '식민지 통치시기에 일본을 적자를 내면서까지 투자를 하여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애썼다'는 제국 지배의 정당화론을 관철시켰다.
전쟁 범죄와 여성 인권의 유린이라는 '인도에 반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 또는 '중대한 인권(Violation of Gross Human Rights)' 침해를 정치 외교나 군사 안전 보장의 이해득실과 바꿔치기 해온 것 자체가 한일관계, 나아가서 일본과 동아시아 여러 민족 및 국가 간의 갈등 대립을 해결 불가능하게 만들어 온 것이다. 심지어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다는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마저도 이번 '합의'를 환영하거나 새로운 한일 관계의 출발점이라고 환영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 역사의 부정의의 회복이 정치나 외교로 '타협'이나 '타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정치가 인간의 맨 얼굴로 엄청난 폭력의 희생자에게 마주대함으로써 비로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베나 박근혜로서는 생각치도 못한 빌리 브란트나 바이츠제커가 몸소 실천한 '큰 정치'인 것이다.
이번 '합의'는 한일조약처럼 '국가 간의 약속'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 더욱더 어려워지고,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 청산 운동은 반국가적이고, 안전보장의 저해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막강한 국가 폭력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디 과거 청산 운동, 인권 운동은 강대한 국가권력에 저항하면서 추진되어 온 것이며, 역사의 정의는 어떠한 권력으로도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역사적인 의미
작년은 제2차 세계대전(1938-45년) 종결 70주년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나누어서 유럽과 동아시아, 대서양과 태평양에 걸치는 여러 지역, 여러 성격의 전쟁을 엮은 일련의 전쟁의 총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주무대로 하는 전쟁이었으나, 일본과 치른 전쟁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태평양전쟁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본 대일전쟁은 1937년 루거우차오(蘆溝橋) 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중일전쟁(일본 측에서는 지나사변)이라고 하고, 1931년 류타오후(柳條湖) 사변(918 사변)을 기점으로 한 일본과의 전쟁을 (중일) 15년 전쟁 이라고 한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영미와의 개전에 임하여 중일전쟁을 포함해서 '대동아 성전'이라고 불렀다. 즉 '선전의 조서(詔書: 천황의 명령서)'에서 일본이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장개석 정부가 공연히 풍파를 일으키고, 영미는 그 중국을 도와, "동아의 화란을 조장하여 평화의 미명 아래 동양재패의 야망"을 채우려고 했기에 "속히 화근을 끊어 동아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자존 자립"의 전쟁을 한다고 했다. 즉 대동아 성전이란 백인 제국의 지배에 신음하는 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해방시키고 아시아 사람들끼리 잘 사는 지역 번영(대동아공영권)을 이루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천황의 세계지배(八紘一宇)를 구호로 세계 재패를 지향함에 있어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말에 지나지 않다. 전후 '대동아 성전'론에 비판적인 일본 사학자들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나라와 정면의 전쟁을 벌였기에 '아시아 태평양 전쟁' 또는 15년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의 기본적인 성격은 반파시즘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파쇼당의 등장과 1932년 독일에서의 나치의 집권에 의해 유럽에서 파시즘이 큰 힘으로 성장하였다. 천황제 일본 군국주의는 쵸슈(長州)와 사츠마(薩摩)의 군벌들이 천황을 업어 명치유신을 일으켜 정치를 농단해왔다. 통치의 방식은 하향식으로 모든 국민을 통제/동원하는 것이라서, 아래서부터 군중의 열광주의에 의해 대중운동으로 이루어진 유럽 파시즘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군사주의, 개인주의/자유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우생학적인 인종주의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일제는 유럽에서의 나치의 성공에 편승하려고 1938년의 일독이 방공협정에 이어, 1940년 일독이 삼국동맹에 가담하고, 연합국과 대립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진주만과 영국영인 말레이 반도의 코타발에 선제 기습을 감행했다.
재2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선발 자본주의 국가와 후발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시장, 영토, 자원의 쟁탈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기도 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성격이 반제 민족해방 투쟁이라는 측면이다. 파시즘 국가들은 모두 군사적 침략과 영토 팽창을 일삼아왔으나, 그 중에서도 일제는 명치유신, 청일, 노일전쟁 이래 동아시아 이웃나라들을 침략하여 식민지 지배를 해왔다는 점에서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과 다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에 항거해서 일어선 아시아 여러 민족의 전쟁에서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민족의 해방/독립을 지향하는 반제 민족해방 전쟁의 성격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5. 일제의 패전과 동아시아의 정의 회복의 과제
1945년 일제가 국체(國體)의 보존, 즉 천황제의 존속이라는 조건부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고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포츠담 선언 제8항에서는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된다"고 명시하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제가 탈취한 영토는 박탈, 중국에서 절취한 대만, 펑후섬 등의 원상회복, 조선의 독립이 확인되었다.
일제의 기습을 받은 연합국, 특히 미국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한 일본 군국주의의 해체였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 군국주의 해체라는 측면을 가장 중시했으며, 일본에게 일련의 패전 처리를 과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일본에 대한 7년 간의 군사점령, 일본군의 해체, 군비와 전쟁의 발동을 금한 '평화헌법'의 제정, 극동 군사재판의 실시와 7명의 A급 전범의 처형, 카이로 선언 및 포츠담 선언의 효력을 확인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체결, 미국의 반영구적 일본 주둔을 보장하는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 및 연합국은 카이로 선언, 포츠담 선언에서 일제의 전쟁 책임을 묻고, 무력이나 강압으로 탈취한 영토의 반환을 명하기는 했어도 식민지의 무력에 의한 강탈과 피지배 민족을 노예화하고 물적 인적 자원을 착취한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연합국의 시급하고 최대의 과제는 파시스트들과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었으며, 둘째 식민지 해방에 대한 명확한 정책과 방침을 애당초 가지지 못하였으며, 셋째, 무엇보다도 연합국은 거의 다가 식민지를 가진 나라들이고, 전쟁 후에 구식민지를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후에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민족해방 투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종언 후의 전후 처리로서 전쟁의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가 있는데, 전쟁 처리는 전범국가들에 대한 군사 점령과 전범재판소의 개설 등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 것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의 역사인식 투쟁의 원인이 되어 평화 실현에 대한 장애가 되어 왔다.
6. 강요받은 독일의 과거 청산과 일본의 평화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정책의 근본은 미국의 국익의 실현, 즉 냉전 시대에서 정치‧군사적 패권의 추구였으나, 독일과 일본에 대한 구체적인 점령정책은 각각 달랐다. 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면책하여 구체제에 대해서 관용한 반면에, 독일에 대해서는 과거 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나치의 전쟁 책임을 가열차게 추구하였다.
그 이유는 유럽에 냉전이 시작되어 소련‧사회주의 진영과 대치하기 위해 서독의 군사력이 필요했으며 독일의 침략으로 처참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화해시켜서 군비를 확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전쟁 후의 서독을 나치와 철저히 단절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신속하게 서독을 재무장시켜서 1949년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발족하자 1955년에는 가입케 하고, 독일 육군을 엘베강 '철의 장막' 따라 배치하여 NATO군의 중핵을 담당하게 했다. 작년에 일본에서 한창 문제가 된 집단적 자위권(군사동맹 가입)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벌써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독일은 NATO의 핵심적인 군대로 유럽에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1995년에 NATO군의 일익으로 유고슬라비아 폭격에 참전하였고, NATO 밖으로 해외 파병을 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지에는 유엔 결의를 근거로 독일군을 파견하여 지금까지 300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전후 국가적 차원에서 독일의 양대 원칙은 부헨발트 서약에서 표명된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다"와 "제노사이드의 저지"였는데, 2002년에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개혁연합 정권 하에서 "탈레반의 제노사이드를 저지한다"는 명분 아래 파병을 정당화하였다. 아베의 '적극적 평화주의'와 상통하는 궤변이다.
한편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의 우선 과제는 '일본군의 해체, 비군사화'였다. 일본에게는 무장력을 가질 수도 없고, 국권의 발동인 무력행사를 금지하는 헌법 9조를 안겨주었으며, 미군의 점령‧주둔 보장을 일본의 '주권 회복' 이후에도 확보했으며, 과거 청산은 2차적인 과제로 밀려났다.
그 이유는 일본이 과거 청산을 해야 하는 침략의 주된 피해자인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공산국가 영역으로 들어가서 적대 세력이 되었기에 미국은 독일처럼 일본에게 이웃 나라들과 화해를 강요할 필요가 없었으며, 일본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과거 청산을 할 리가 없었으니, 오늘까지 미제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의 쌍방에 인종주의적인 편견에 기초한 아시아 멸시가 있었고, 일본의 패전의 성격을 규정하고 책임을 확인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 한국 참석을 반대하는 일본의 요시다 수상의 말이 수용되고 중국의 국제적인 위치가 동요하고 있었기에 중국도 초청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지배의 책임이 추궁 받는 주객관적인 조건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이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그 민주주의도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편향된 반공주의적인 '싸우는 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런 면에서 사상의 자유가 향유되는 '관용'이 독일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는 것은 1990년 이후의 이야기다.
강요받은 '과거 청산'이기는 했어도 독일은 과거 청산을 위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오랜 세월을 통해 일상화되었다. 2015년 3월에 방일한 메르켈 수상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1945년 5월 8일은 해방의 날입니다. 그것은 나치의 만행에서부터의 해방이며,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에서부터의 해방이고, 그리고 홀로코스트라는 문명의 파괴에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나치스의 패망을 독일 패망의 치욕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공식화된 태도는 독일에서 교육을 통해 공유되고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영원한 속죄"에 지치거나, 불공평함을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다. 과거 청산과 '죄의식'마저 미국의 국익과 유태인들의 이기주의적인 이용물이 되어 있는 구석도 있다.
문제는 유태인만이 다른 소수자보다 특권화되어 있으며 독일 사람들 속에 겉으로는 유태인에게 정중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반감을 느끼는 이중적인 태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에 대한 속죄 의식을 자발적으로 내면화시된 것이라기보다 미국의 국익의 관점에 의해 강요받은 데 기인하며, 독일 극우파의 정신적인 온상으로 되어 있다.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을 건국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 영토의 병합이나 국경의 변경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국제법의 원칙에 위배되는 무리를 강행한 것이다. 전쟁 후에 미국 의회와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유태인 로비를 배경으로 미국은 친 이스라엘, 반 팔레스타인, 반 아랍, 반 이슬람 정책을 세계 규모로 추진해 왔다. 미국에서의 유태인 미디어 자본을 축으로 세계 미디어를 지배해 온 유태인들은 미디어 지배를 향유하면서 과거의 제노사이드의 수난의 역사를 망각하고 오늘날에 가자지구, 레바논 피난민구 등에서 집단 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즉, 미국에 의한 과거 청산의 강요가 독일 내의 과거 청산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있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7. 인권에서부터 제노사이드로
인권이란 개인의 독립과 평등을 전제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며,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필요악인 국가 폭력을 구사하는 공권력을 통제할 수 있으며, 항상 공권력의 변덕과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보장 장치이기도 하다. 근대 헌법은 주권자인 인간을 사회조직의 최고의 존재임을 선언하고, 인권이 공권력을 통제하는 모든 규범의 기초에 있음을 정교하고 구체적인 장치로 규정한 메뉴얼이다.
인권은 애당초 자유와 평등을 무기로 중세 신분사회를 뚫고 출현했기에 보편주의를 속성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특수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났다. 18세기 파리에서는 주권자임을 주장한 시민은 남성 쁘띠 브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매우 특수한 존재였으며, 무산자, 여성, 외국인 등은 주권자로부터 배제되어 인권의 보편성은 전혀 결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권은 자유와 평등을 조직원리로 하고 있었기에, 저항권을 마지막 담보로 삼아 끝없는 지평을 향해 스스로 만든 우리를 차례차례로 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인권의 '해방적 속성'이다.
인권은 그 자리를 서구 시민사회 속에서 확립해 갔지만, 국가권력에 의지하면서 국가 권력을 통제/구속하는 일국 안에서 완결되고 소비되는 폐쇄 회로였기에 신분, 계급, 계층, 성으로 이루어진 벽을 깨고 나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국경의 벽을 넘는 일이었다. 종전에는, 그리고 지금도 아직도 인권은 법적으로 주권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보장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선점이라는 현실정치 속에서 구동되는 인간의 정치적/경제적 욕망이 자기만의 벽을 쌓아 올리고 깨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서구사회가 일단 서구사회를 벗어나자 그 원리를 잊어버리고 부정하고 만다. 지배하는 측의 제국주의와 지배 받는 측에 과해지는 노예제도와 식민지주의다. 서구 산업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탈을 쓰고 비유럽 세계로 지배자로서, 착취자로서 팽창해 나갈 때 보편주의는 사라지고 '문명과 야만'의 이중잣대를 구실로 하고 지배하는 자의 권리와 지위가 정당화된다.
독립되고 평등하고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주권국가론으로 치장한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나타났을 때 동아시아는 서구의 '문명'과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야만'의 지역이기에 '불평등이 평등'이라는 논법으로 '불평등조약'을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방대한 조사사업을 통해서 조선인의 열등성, 후진성, 형질적인 결함을 증명하려 했듯이, 식민지주의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위해 피지배자들의 온간 미개함과 야만성을 발견하고 실증하려고 든다. 우생학, 신다위니즘이라는 '사이비 과학'에 근거를 둔 선택된 민족론, 우수한 인종론이 필연적으로 '가치 없는 생명', '이등국민'이라는 담론을 만들어, 제노사이드라는 참화를 결과했다. '지배는 차별이고, 차별은 지배'이기에 명치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의 패권 확대의 과정이 바로 인종주의와 민족우월론의 유포 과정이었으며, 그 결과 난징 학살로 상징되는 3500만 명에 다다르는 중국인 전체에 대한 제노사이드 범죄가 저질러지게 된다. 일제는 동아시아의 이름으로 동아시아를 침략하고 지배해 온 역사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라는 지역 개념은 이 지역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고, 외부에서 침략자 또는 정복자로서 등장한 외세에 의해 규정된 타자 개념이고 그 자체가 지배와 피지배의 이중구조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8.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파괴-보편성이라는 허위의식을 넘어서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전야에 저질러졌던 '인도에 대한 범죄'가 비극적인 세계대전을 결과를 준비했으며, 도입곡 구실을 했다는 인식을 전제로 다시는 파시즘의 태두와 그들의 폭력과 파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의 아래 유엔이 조직되었다. 유엔의 목적인 평화는 추상적인 비폭력 인도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파시스트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유엔에 있어서, 국가폭력에 대한 통제력으로서의 인권이 대항력을 가지지 않는 곳에서는 파시즘의 대두를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엔은 파시즘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전쟁의 불법화라는 소임도 다 하지 못했다. 이 지상에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지배를 낳게 하는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를 원리적으로 척결하는 작업도 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엔을 주도한 미국 등이 세계의 패권 장악에 뜻을 두는 제국주의 국가고, 그 체내에 파시즘을 온존‧내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세계 패권을 옹호하고 확장하기 위한 냉전 상황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광범위한 내적인 정치연합이 형성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파시즘 세력에 대한 관용, 이용, 육성, 등용이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천황 제군국주의의 뿌리가 끊이지 않고 보존되어 육성된 까닭이다. 미국과 일찍 '문명'의 편에 선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제국의 지배 정당화론과 우리 민족을 열등시하는 인종주의가 우리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즉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계기로 명치유신 이래 저질러 온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가해를 청산하고 동아시아 민중들로부터 빼앗은 생명과 재산, 권리에 대한 원상회복이라는 역사적인 과거 청산의 요구를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세계의 기득권자들의 옹호에 힘입어 철저히 외면을 해왔다. 이 구조는 12월28일 '합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6.25 전쟁에 종결짓고 한반도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평화협정의 체결이 불가피할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초강대국의 오만이 드러나 보인다. 이 오만의 근저에는 근대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문명과 야만'이라는 인식의 이중구조, 패권주의적인 미국의 국익론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식민지가 되어 분단되어, 핵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동아시아 평화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바로 세계와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구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적인 서구중심, 제국주의 중심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문명국'들이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청산을 통해 인권과 평화의 보편성에 다가설 필요가 있다. 힘에 의한 평화론,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보편적이지 못한 인권론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치와의 결별과 단죄만이 아니고, 히틀러 출현 이전의 독일의 국가 범죄에 대한 청산, 미국의 핵우산과 막강한 무력 아래서 평화를 구가해 온 일본이 그 포장 아래서 덮어져 있는 헤이트 스피치나 조선, 오키나와, 중국 등 동아시아에 대한 변견과 차별, 증오 의식을 극복하고, 한반도 식민지화와 분단, 전쟁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인정할 때 미국이 입혀준 평화의 겉옷을 벗고 진실된 평화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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