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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우리들 몫은 "세월호 기억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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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우리들 몫은 "세월호 기억 싸움"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담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 북 콘서트

304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75명의 학생은 죄인이 됐다. 희생된 학생의 형제자매만 280여 명이다. 모두 한 동네에 살던 아이들이다. 4월 16일. 단 하루 만에 700여 명의 아이들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삶의 경로를 밟게 됐다. 가만히 있으라. 이 말은 남은 자들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

상처를 헤집는 것 같다. 정부는, 언론은 이 사건을 다시 입에 올리는 건 고인에게 예가 아니라 한다. 그리고 빨리 잊자, 일상으로 돌아가자 한다. "굳이 아이들에게..." 아이들에게 이 비극을 되새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연민으로 대체하자고 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가. 유가족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팽목항에서, 그리고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침묵할 자격이 있는 이는 생존자뿐이다.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집중해 들었는가. <다시 봄이 올 거예요>(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펴냄)는 새삼 읽는 이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1주기에 맞춰 나온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펴냄)에 이어 2주기를 맞아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쓴 이 책은 세월호 생존 학생, 침몰한 아이들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는 그들의 비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나. 책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화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 비감을 배가한다. 일상의 작은 틈에서 돌연 눈물을 켜 올리곤 하는, 차가운 시선과 맞서 싸워온,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에 시달린 그들의 이야기가 날 것 그대로 수록됐다. 작가기록단은 11명의 생존학생, 15명의 희생자 형제자매의 목소리를 최대한 진솔하게, 남김없이 기록하는 데 집중한 듯하다. 그러니 '읽다'라기 보다 '듣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책에 등장한 구술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사람들이 함께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책의 출간을 기념해 21일 오후 7시 서울 조계사 전통문화예술 공연장에서 북콘서트가 열렸다. 이지애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가수 요조가 공연한 이번 행사에는 이 책에 이야기를 담기도 한 고 남지현 학생의 언니 남서현 씨, 고 박성호 학생의 누나 박보나 씨가 참석했다.

▲21일 조계사 전통문화예술 공연장에서 열린 북콘서트에 유가족 남서현 씨(사진 중앙)와 박보나 씨(사진 오른쪽)가 참석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희생자 형제자매에서 엄마아빠의 동지로

"저도 단원고를 나왔거든요. 이 사건 때문에 제 동생만 잃은 게 아니라 후배들, 저와 함께 제주도 수학여행 갔던 선생님도 잃었어요. 저는 분노로 2년을 견뎠어요. 힘들 때도 '내 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을 텐데 내가 힘들면 되겠어' 하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힘들 때마다 곁에서 손 잡아주는 시민들 덕분에 힘 얻었어요. 2주기 행사 때 비가 많이 왔는데, 끝나는 시간까지 같이 비 맞아주시는 모습이 위로가 됐어요."

박보나 씨는 비극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세월호가족대책위에서 활동한다. 유가족을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에 대응한다. 익명의 그늘에서 짐승으로 전락해버린 이들의 배설물을 상대해야 한다. 그는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도 구술자로 참여했다. 책에는 그날의 비애가 생생히 담겼다. 사건이 나고, 부모님은 진도체육관으로 내려갔다. 보나 씨는 동생들을 재웠다. 그리고 씻으려 했다.

"씻을 때도 나 혼자 따뜻한 물로 씻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몸에 물이 닿는 것 자체가 슬프더라고요. 4월이라 좀 추울 때였잖아요. 성호는 이불도 못 덮고 있겠구나 생각하니까 미안해서 보일러를 못 켰어요."

▲"이 싸움이 1년, 3년, 5년 안에 끝날 게 아니라고, 30년 이상 가리라는 걸 이제 알거든요." ⓒ프레시안(최형락)
비극은 보나 씨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형제자매도 바꿨다. 이들은 사건 1주기를 맞아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냈다. 형제자매가 본격적으로 조직화한 계기는 기억교실 존치 논란이다. 아이들이 사용하던 교실을 남기자는 이들의 목소리는 재학생 부모와의 갈등 끝에 안산교육청 이전이라는 결론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갈등을 계기로 형제자매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보나 씨는 생생히 증언했다.

"우리 형제자매에게 기억교실은 특별한 의미가 있거든요. 우리는 어디서도 울 수 없어요. 집에 가면 부모님이 계시니 못 울고, 바깥에서 울면 왜 아직 우느냐고 해요. 기억교실을 찾아가 형제자매를 만날 때만 맘 편히 울 수 있어요. 그런데 이때도 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어리다는 이유로 우리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더라고요. 지금이라도 재학생 부모님, 학교 관계자가 우리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부모의 마음은 같다. 망각하려는 자들 앞에 목소리를 높이던 부모들은 형제자매가 조직화하자 우려했다. 너희들이 더 큰 상처를 입으면 어떡하느냐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2주기 행사를 치러내면서 부모는 아이들을 동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책에서 아이들은 "엄마아빠의 동료가 된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2주기가 지나고 부터는 부모님들도 저희를 기대하시는 것 같아요. 이 싸움이 1년, 3년, 5년 안에 끝날 게 아니고, 30년 이상 가리라는 걸 이제 알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들도 우리 많이 응원해주세요."

"이게 제 삶이에요"

남서현 씨 역시 대책위에서 활동한다. 그의 삶은 2년 전 4월 16일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저한테 이런 말 많이 해요. '니 삶을 찾아라.' 니 삶을 살고 너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해요. 그게 아니에요. 저는 2014년 4월 16일에 그 일을 겪었어요. 이제 이게 제 삶이에요. 저는 제 삶을 너무나 최선을 다해 살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4월 16일 이전의 제 모습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이건 숙명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제 삶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안쓰럽게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참사는 서현 씨가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들었다. 책에서 그는 말한다. 이 말은 우리 모두를 겨냥한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어요. 제가 정치·사회 관련 기사를 잘 보고 그랬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있게는 아니었다는 것을. 겉핥기였죠. 지현이 사고 나기 딱 1년 전, 태안에서 해병대캠프 사고가 났잖아요. 지현이 또래 애들이 그렇게 됐을 때, 제가 포털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진짜 안 본 게 없었어요. (...) 진짜 관심이 엄청 많았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 사건에 대해서 슬프고 자극적인 기사들을 그냥 소비했던 거더라고요. 오열하는 부모님들, 실려 나오는 애들, 그런 것들만 보고, 이후에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 416을 겪으며 보니까 해병대캠프 사건도 아직 처벌도 제대로 안 됐고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더라고요. 그니까 제가 사람들한테 뭐라 못하겠는 거예요. 왜 슬퍼만 하고 행동하지 않느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나쁘다고 말 할 수 없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서현 씨 역시 엄마아빠의 동료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책에서 동생의 시신과 마주한 정황을 묘사한다. 옮겨 적기 고통스러울 정도다. 서현 씨는 무너져내릴 뻔했다. 형제자매를 위한 공간이 생겼다. 서현 씨는 이곳을 찾았다. 이런 비극을 겪은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뭉치고,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 이들을 엄마아빠와 함께 싸우는 투사로 만들었다. 어린 영혼들이 투사가 됐다는 것만큼 세월호 참사가 낳은 더 큰 비극이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그날, 1주기, 2주기가 지나면서 형제자매가 많이 변했어요. 한참 시행령이 많이 나올 때였는데, 우리(형제자매)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도 엄마아빠의 동료가 되어서 더는 숨죽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1주기 때 형제자매의) 성명서를 썼어요. 엄마아빠들이 밤낮없이 싸우다 보니, 너무들 지쳤어요. 희망을 잃어가는 게 제 눈에 보여요. 그런데도 계속 싸우시는 뒷모습을 보니까 저 뒷모습만 보고 따라가도 진상규명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엄마아빠들이 자랑스러워요. 저도 저렇게 살고 싶다 생각해요."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이건 숙명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제 삶이에요." ⓒ프레시안(최형락)
서현 씨는 북콘서트에서 유가족을 단순한 '희생자의 가족'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세상은 세월호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절규였다.

"사람들이 저한테 (위로만 건네지 말고) '요즘 세월호 어때?' '정부가 이렇게 하는 데 네 생각은 어때?'라고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도 (다른 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친구가 많아요. 그런데 (제가 그들과 다른 건) 저는 아직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범인을 못 잡았어요. 제 동생 하나가 죽은 사건이 아니라 304명이 희생된 사건이에요. 아직 진상규명되지 않은 사건이에요."

그는 이 비극으로 세상을 다시 조준하게 됐다. 더 넓은 시각으로 모든 희생자들의 누나, 언니, 동생이 됐다. 그리고, 어른들을 다시 보게 됐다. 괴물이 된 어른들과 달라지기 위해 그는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계속 '공감'을 말했다.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이 많아요. 한 부모 가정, 장애 아동을 둔 가정이 있어요. 우리가 그 사람들의 아픔도 봐야 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하고, 연대할 줄 알아야 돼요. 공감할 줄 모르면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고위층 사람처럼 괴물이 돼요.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공감하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감하지 않으면 관심이 가지 않고, 그러면 행동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라고 생각하면 공감하기 쉬워요. 여러분이 관심 갖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가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세대

돌이켜 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헬조선'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발 디딘 곳이 지옥임을 일깨웠다. 우리가 발 디딘 곳이 양심이란 없는 야수의 소굴이 되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1997년의 외환위기처럼 대한민국을 되돌아 갈 수 없는 어떤 곳으로 옮겨놓았다. 이 세상은 어른들이 만들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보나 씨와 서현 씨는 2년을 견뎌내며 이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른들이 한 일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전부였다. 몇몇은 2014년의 아이들을 두고 '세월호 세대'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세상을 바꾸라 했다. 이들은 그 목소리에 반박한다.

"세월호 세대라는 말을 어른들이 만들었어요. 그 표현이 불편해요. 제가 많은 청소년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그 아이들은 세월호 세대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세월호 참사는 어른들이 저질렀는데, 왜 우리한테 책임을 떠넘기나요? 어른들은 미안하다고만 하고 하나도 바꾸지 않았어요. 우리(형제자매)는 '우리 미래 세대에게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말자'고 다짐해요." (박보나)

"우리(형제자매)끼리 어떤 일을 하려고 이런저런 계획을 많이 했어요. 그때 도움을 구한 상대가 어른이 아니에요. 대학생, 청년단체를 찾아갔어요. 이 책을 청년들이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이 나라를 바꾸기 위해 저희와 함께 싸웠으면 좋겠어요." (남서현)

북콘서트의 2부에는 김은지 단원고등학교 스쿨닥터, 김중미 기찻길옆작은학교 교사, 박래군 인권중심사람 소장이 참석했다. 이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조언했다. 무엇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열심히 들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조언했다.

김은지 스쿨닥터는 "이 사고는 (살아남은) 아이들의 일부"라며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라고 강조했다. 김중미 교사는 "우리의 역할은 손을 잡고 같이 버티는 것"이라고 단언다.

박래군 소장은 그러면서도 "(당신이) 당사자는 될 수 없다는 거리를 자각해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과도하게 마치 제 일인 양 나서는 사람이 되어 살아남은 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박 소장은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노란 리본 달기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도 언급했다.

기억 싸움

▲<다시 봄이 올 거예요>(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펴냄) ⓒ프레시안
콘서트에서 남서현 씨는 이 책의 의미를 '기억 싸움'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들이 '우리는 진상규명을 위해 싸울 테니, 너희는 기억 싸움하라'고 했다"며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잊히지 않도록 싸울 것이고, 이 책은 기억 싸움의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망각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계속 되물어야 한다.

도대체 왜 "라이프 링(구명튜브)이라도 착용케 해 탈출 시켜라"는 세월호 인근 둘라에이스호 선장의 말은 묵살되어야 했는가. 왜 어부들이 아이들을 구할 때 배의 책임자들은 먼저 도망쳐 나왔는가. 왜 다급한 시간에 청와대에서는 "VIP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며 구명 작전을 방해했는가. 왜 해경은 인력 구조보다 구조된 인원을 헤아리는 데 더 집중했나. 왜 그날 대통령의 동선 7시간은 미스터리가 되어야 했나. 왜 대통령은 눈물 연출 후 유가족의 애원을 묵살했나. 왜 세월호특별법은 표류했나. 왜 "유가족이 보상금 8억 원 씩을 요구한다"는 악성 유언비어가 무차별 유포되었나. 왜 유가족을 헐뜯던 언론들은 총선 후 태도를 바꾸나. 왜 짐승이 된 이들은 절규하는 사람들 곁에서 닭다리를 쥐어뜯었나.

2년이다. 단 하나의 해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의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모두의 시계는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에 멈췄다. 우리는 이 사회가 왜 어린 유가족에게도 서슴없이 비정한 야수의 송곳니를 드러내는 지옥으로 변했는가를, 왜 어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되었는가를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조계사의 북콘서트에 참석한 모든 이가 마음속으로 힘줘 말했다.

이천십사년사월
/ 권나무

가슴아픈 일들을 빨랫줄에 널어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말려라
비겁했던 맘들을 빨랫줄에 널어
소용없는 마지막 눈물도 말려라

(후렴)
모두 잊겠지만 몸이 기억하여
이맘때면 잠깐의 감기라도 나눠 앓아서
사랑했고 잊혀졌던
정말 사랑했고 이내 잊혀졌던 것에 노래를

무너지는 일들을 도화지에 뉘어
채색되지 않는 마음을 입혀라
비겁했던 맘들을 도화지에 뉘어
소용없는 눈물을 덧칠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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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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