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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세대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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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세대와 교육

[민들레] "정답은 없고 물음만 있다"

그 많던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천지가 아름답다. 향기로운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사람들은 들뜬 맘으로 봄나들이를 떠나는데, 여행가는 아이들을 태웠던 낡은 배는 이태째 검푸른 바닷속에 잠겨 있다. 우리는 이렇게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배가 가라앉은 후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이 쏟아지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다.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을 느낀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거리로 나올 만큼 이 일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곳곳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2년이 지난 지금, 그 많던 말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망각을 종용하는 자'들의 노력은 끈질기고 철저하며 집요했다. 시국선언을 한 1만 7000여 명의 교사들은 징계의 위험에 처했고, 1주기 추모식으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맞았다. 책임자를 찾아 '엄벌'에 처하겠다더니 공직자 중에서 법적 처벌을 받은 것은 구조 당시 123정장을 몰던 힘없는 경위 한 명뿐이다. 해체하겠다던 해경은 이름만 살짝 바꿔 국민안전처 산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조직 개편됐다(그들은 여전히 경찰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조직명에서만 경찰이라는 단어가 빠져, 경찰인 듯 아닌 듯 기이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건 초기, 기자들은 왜곡보도를 반성하며 양심선언을 했지만 그럼에도 언론은 바뀌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보상금 기사가 떠돌며 사건의 본질을 호도했고, 1년 8개월 만에 가까스로 열린 세월호 청문회를 생중계한 지상파 방송은 한 군데도 없었다. 진도체육관에서부터 잠복하던 사복경찰들은 유가족들을 미행하고 도청했으며, 얼마 전엔 국정원이 유가족들의 통화내역을 조회한 사실이 드러났다.

'언제까지 당해야 하나'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다음 날, <동아일보> 1면의 헤드라인이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이후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씨랜드 참사 등등 한국사회에는 20여 년 사이 4~5년에 한 번꼴로 다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국가적 재난이 일어났다(무슨 올림픽도 아니고!).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배가 가라앉은 이 참사를 '인재(人災)'라 부르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난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재난은 항상 보이지 않는 사회적 선택들, 물에 빠져 죽거나 돌무더기에 깔린 이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선택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주노 디아스(Junot Diaz))

그러나 망각의 힘은 무섭다. 참사가 터지면 '언제까지 당해야 하나?' 하면서 슬퍼하다가도 기억을 방해하는 자들의 모략에 휘말려 이내 '말 잘 듣는 국민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참사'들을 겪으며 반복적으로 확인한 것은 켜켜이 쌓아온 이 사회의 병폐와 환부뿐인데도 말이다. 배가 가라앉은 후 더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말이 물 위로 떠올랐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살아남은 말은 별로 없는 듯하다.

세월호 세대와 교육

배가 가라앉은 후 '교육'에 대해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변화를 꾀하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교육을 틀어쥐고 있는 국가는 더욱 통제를 강화했다. 형식적인 안전교육과 인성교육이 강화되고, 수학여행과 체험학습은 취소되었으며, 아이들은 더욱 꽁꽁 학교 안에 갇혔다. 집회에 참석해 의사를 표현하는 어린 학생들을 연행하고, 출석요구서도 없이 고등학생의 집이나 학교로 경찰이 들이닥쳐 다신 집회에 나오지 않도록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압승을 거둔 결과가 그나마 세월호 여파로 얻어낸 교육적 성과인데, 교육부 지시사항에 교육청이 고분고분하지 않자 슬며시 교육감 직선제 폐지 얘기를 흘려보내고 있다. 노란리본을 달지 못하게 학교현장에 공문을 내려보내고 시국 선언을 한 교사들을 색출해 압박하던 교육부는 이번에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전교조가 제작한 '기억과 진실을 향한 416교과서' 사용 금지에 관한 공문을 내려보냈다. 경기도교육청이 교육자료 사용은 학교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금지처분을 거부하자, 교육 중립성을 훼손하면 법의 절차에 따라 '엄정히' 대처하겠다며 재차 엄포를 놓았다.

교육부는 416교과서가 "현 정권에 대한 편향된 시각과 의견 제시로 학생들에게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중 하나를 예로 들면 '국회 앞에서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유가족을 외면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란 문구와 사진이 "사진에 포착된 정황만을 가지고 전체적인 정황을 왜곡하는 것으로 학생들에게 정부를 불신하게 하는 의도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그러나 영화 <나쁜 나라>(김진열 감독, 2015)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살려주세요, 대통령님!" 하며 울부짖는 유가족 곁을 유유히 지나던 대통령의 태도가 과연 포착된 정황만으로 전체적인 정황을 왜곡하고 있는 건지.

"가치판단이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을 심어줘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416교과서 사용금지 처분을 내린 교육부는 여전히 아이들을 미성숙한 대상으로 바라보며,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는' 국민으로 길들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 '세월호 계기수업' 중 한 학생이 세월호 기억 카드를 작성하고 있다. ⓒ프레시안(서어리)

그러나 슬픔을 틀어막아도 이미 이 사건을 목격한 청소년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경향신문>이 2015년 12월 진행한 '청년 미래인식 조사'에 따르면, '자신에게 가장 충격이 컸던 사건'을 묻는 주관식 질문에 응답자의 42%가 '세월호 참사'를 꼽았다. '사회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에 대해서도 가장 높은 23.9%가 ‘세월호 참사’를 꼽았다. 서명을 받으러 다녀보면, 멀리서 흘깃거리며 갈등하는 건 주로 어른이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그 아이들처럼 교복 입은 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걸어와 서명하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노란리본을 한 주먹씩 집어가기도 한다.

작년 4월 18일. 이틀 전인 1주기 추모행사 때 서울 시청광장에 모인 3만 명 추모객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광화문 앞에 유가족들을 고립시킨 것에 항의하는 2차 집회가 열렸다. 옆에 있던 앳된 청년에게 무심코 말을 걸었다. 대학 이름이 새겨진 잠바를 입고 있기에 "대학생들은 중간고사라 바쁘다던데, 어떻게 나왔네요?" 하자, 조금 머뭇거리던 학생이 입을 열었다.

"제가 작년에 단원고 3학년이었어요."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하겠다며 왕왕거리는 경찰의 확성기 소리에도 그 친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하루아침에 텅 비어버린 열 개의 교실이 거짓말 같았고, 후배들의 죽음이 너무나 슬펐다고. 그런데 자신은 고3이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은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 몰두하라고 독려했단다. 스스로도 '수능 잘 봐야지' 하면서 슬픔을 참고 공부해 대학생이 되었다고. 억눌렀던 감정들이 밀려와 이제라도 후배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렇게라도 '빚'을 갚고 싶다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얘기하던 학생의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그 눈을 보며, 이 슬픔을 가슴에 품은 수많은 젊은이들은 분명 '국가'와 '국민'에 대해 다른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겠구나 싶었다.

얼마 전 선생님 한 분이 세월호 2주기를 맞아 학교에서 아이들과 추모행사를 하려는데, '어떤 활동이 좋겠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리본을 만드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나는 아이들과 '세월호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03년 3월 20일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동맹군들과 함께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나는 대안학교 교사였다. 교사들은 참담했고 긴급하게 모여 회의를 했다. 정해져 있던 모든 수업을 취소하고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평화수업'을 했다. 예정된 수업보다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배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 같이 모여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영상을 보며 상황을 나누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밤늦게까지 수업을 준비했다. 국어, 영어, 수학 등 과목은 그대로였지만, 내용이 달라졌다. 사회 시간에는 최근 보도 자료들을 보며,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공부했다. 국어 교사였던 나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단편소설을 함께 읽고 시를 썼다. 미술 시간엔 옷 만들기를 배우는 아이들이 바느질로 엮어놓은 천에 그림을 그려 커다란 걸개그림을 만들었다. 영어 시간엔 밥 딜런(Bob Dylan)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이나 존 레넌(John Lennon)의 '이매진(Imagine)' 같은 반전평화 팝송을 배우고, 음악 시간에 그 노래를 연주하며 전쟁으로 목숨 잃은 사람들을 추모했다.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중요성을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로 체득하게 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적과 싸워 이기는 법이 아니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작년 4월 대학교수들과 IT개발자, 디자이너들이 협력해 '세월호 교실'1)이라는 온라인 아카이브를 열었다. 이 온라인 프로젝트는 재난을 마주한 대학교수들이 '도대체 세월호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됐다.

"어떤 학문 분야도 어떤 이론도 세월호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지럽게 쏟아지는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읽을거리와 토론거리를 찾아내고 제안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학생들과 같이 질문하고 이야기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없고 물음만 있을 뿐인 수업을 해보자는 것입니다."('세월호 교실' 소개글 중)2)

한국의 근현대사와 정치, 경제를 이해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배우는 데 세월호만큼 살아 있는 교과서는 없다. 그 안에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철학, 그리고 법으로 제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인성교육까지 다 담겨 있다. 다만 우리에게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최근 드러나는 현상 중 하나는 함께 슬퍼하던 사람들도 조금씩 이 사건을 지겨워하거나 그만하자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리도 빨리 외면하는 것은, 이 일이 지극히 모든 사람에 보편적으로 가닿는 고통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혹한 사건의 기억은 남겨진 사람에게 참기 힘든 고통을 준다. '망각'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난 이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라고 말하기엔 가책이 느껴진다. '유가족들이 변했어' '이런 운동 방식은 아닌 것 같아' '이젠 충분히 애도하며 보내줘야 하지 않겠어?' 하는 합리화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에 더 부담 없는 방법이다.

27년 전 세월호와 비슷한 사건이 영국에서 있었다. 요즘도 영국 프리미어리그 34라운드 경기는 6분 늦게 시작한다. 1989년 4월 15일 '힐스보로 참사(Hillsborough disaster)' 때 목숨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당시 힐스보로경기장에는 FA컵 준결승전을 보기 위해 2만 5000여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는데, 한꺼번에 많은 이들을 입장시키는 바람에 96명이 압사하고 760여 명이 부상당했다. 경기는 시작한 지 6분 만에 중단되었다. 사망자 중 절반은 10대 청소년이었다. 사건 직후 정부, 경찰, 언론이 힘을 합해 사실을 은폐했고, 경찰은 "피해자들은 입장권도 없이 밀고 들어온 술 취한 관중들이었고, 이들의 난동으로 통제가 불가능해 참사가 났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기나긴 투쟁 끝에 참사 발생 20년 만에 독립조사위원회가 출범했고 45만 건의 문서를 분석해 경찰의 무능, 판단 착오, 대처 미흡이 대참사의 원인임을 명백히 밝혀냈다. 그리고 23년 만에 유가족들은 정부, 언론, 정당의 사과를 받아냈다. 사고 전부터 관중 안전을 위해 시설 보수공사가 필요하다는 전문가 의견을 힐스보로 경기장 측이 무시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더 놀라운 것은 사후 검시보고서를 분석해 초기 대응이 제대로 되었다면 96명의 희생자 중 41명(40명도 아니고, 정확히 41명!)이 살 수 있었다는 정확한 사실까지도 밝혀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며 진상규명은 계속되고 있다.

그 긴 조사과정은 생존자와 유가족들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들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을 확인하면서, 유가족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도왔다.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왔느냐?'라는 질문에 한 유가족은 말했다.

"진실 없이는 슬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죠."3)

이 사건도 세월호처럼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조롱당하고, 긴 시간 진통을 겪으며 아주 조금씩 전진했다. 끝내 진상규명이 가능했던 것은 긴 세월의 호도 속에서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시민들의 꾸준한 동참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세월호 교실'은 대학교(또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세월호 문제를 가르치고, 배우고, 토론하는 사람들과 수업계획안을 공유하는 온라인 프로젝트다. 이미지는 '세월호 교실' 중 '포토에세이'를 갈무리한 것.


이제 고작 2년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치적인 색깔을 입었다고 치부되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이어서가 아니라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도 팽목항에서 물에 잠긴 가족을 기다릴 때, 그들에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챙겨주며 무너진 마음과 몸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부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세력과 '계란으로 바위 치는' 긴 싸움을 시작한 지금, 그들에겐 함께 정치적 의사를 밝히고, 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하고, 진상규명의 절차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연민과 애도, 함께하는 방식은 그들의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세월호를 통해 무능하고 무책임한 '나쁜 나라'를 확인했지만, 지난 2년은 그 나쁜 나라에서 살아가는 '좋은 시민'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남자원봉사센터의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를 수습하는 동안 진도 팽목항에는 약 7000여 단체와 6만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함께했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하는 유가족들을 위해 함께 곡기를 끊고, 길을 걷고, 거리에 나서서 서명을 받으며 그 곁을 지키는 시민들이 있었다. 안산에서 만난 유가족 한 분은 "평생 내 새끼, 내 가족만 챙길 줄 알았지 남을 위해 나서본 적이 없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은 줄 모르고 살았다"며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사건 초기, 각계각층에서 쏟아졌던 자성의 목소리는 이 일을 '무능한 정부'나 '국가‘만의 책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정부패를 방관하며 동조한 자신에게도 책임을 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참사는 우리의 선택이다. 이 사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고,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며,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존엄을 보여주었더라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겪을 비극 혹은 희망도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에 돌덩이 같은 짐을 올려놓고 노란리본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와 사소하지만 용기 있는 그 무엇을 당장 하는 일이다.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한 척의 배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다. 세월호 2주기, 우리에겐 너무 많은 말과 너무 적은 움직임이 있다.

"무엇을 인양하려는가 누구는 그걸 진실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걸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진실을 건져 올리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고 희망이 세상을 건져 올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희망으로 은폐된 폐허다 인양해야 할 것은 폐허다 인간의 폐허다."(백무산 시인의 시 '인양' 중)

각주

1) 근래에 급박하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교육자들이 인터넷을 활용해 공동으로 대응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 아카이브 교실은 1965년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함께 밤새워 강의하고 토론하는 '티치-인(teach-in)'을 진행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전쟁, 환경, 여성 문제 등에 대한 '티치-인'이 행해져 왔고, 3.11 후쿠시마 사고에 관한 아카이브도 여러 나라 언어로 활발히 공개되고 있다. Teach 3.11(http://teach311.org)

2) 세월호 교실(http://teachsewol.org)

3) 다음 '스토리 펀딩 : 26년, 엄마는 오늘도 싸운다'(박상규·김나나 글, 2015)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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