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국가부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미국은 한일 양국과 같은 부자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더 이상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리고 한일 양국은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스스로 무장할 능력이 있으니, 오히려 무장하라. 만일 그렇게 되면, 미국보다 훨씬 빨리 북한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한일 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면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이 전쟁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위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가 자신이 집권할 경우 취하게 될 한일 양국에 대한 정책 관련 발언 요지다. 비록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지만, 한일 양국과 맺은 동맹을 통해 미국이 얻고 있는 막대한 유형·무형의 이익에 대한 부인, 한일 양국의 핵무장 허용, 한반도와 동북아에서의 전쟁 방치 및 불개입 등 기존의 금기사항들을 모두 깨뜨린 것이어서 연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트럼프 진영에는 전문가들인 그의 외교 안보 참모들도 있는데, 왜 그가 그러한 불편한 외교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을까. 선거는 기본적으로 국내 정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집권세력과 워싱턴 기득권 세력에 속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도전자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판을 뒤집어야 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트럼프 후보는 민주당 후보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상원의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진행돼온 경제양극화의 희생물이 되어 좌절하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의 분노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그는 일생을 돈을 버는 데 바친 사람답게 외교관계도 구체적인 액수와 숫자로 손익계산을 하여 유권자들의 손에 쥐어 주고 있다. 그는 외국에 대해 미국주둔 비용의 '공정한 부담'(fair share)을 요구하면서, '부자인 한국'은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을 100% 부담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공정한 분담은 객관적으로는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미 동맹, 미군주둔을 통해 유형·무형의 막대한 경제적·군사적·정치적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현재 한국은 미국 무기의 최대 수입국이며, 미국은 무기판매를 통해 돈을 벌고, 또 한국에게 판매한 무기를 한미 양국 간 무기 체계의 '상호운용성'을 통해 북한, 중국,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안보 이익 확보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한국의 대미 (국제)정치적 의존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트럼프의 발언은 그의 개인적인 선거 전략과 성향 외에도, 미국의 경제력이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 미국이 더 이상은 세계 경찰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참고로, 트럼프는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나토(NATO)에 대해서도 미국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나토국가들이 공정한 비용을 부담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소련도 멸망한 상황에서 나토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입장이 전통적으로 군사안보를 보다 더 강조하는 공화당의 제1후보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의 힘, 특히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외교에서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하면, 필자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트럼프는 필자가 유학했던 미국 대학교의 경영학과 졸업생이었는데, 그는 30년 전인 1980년대 후반 당시에도 부동산, 카지노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사람으로 유명했다. 당시 대학들마다 기부금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어떤 사람이 우리 학교에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하느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학교와 지역의 신문과 방송이 기부자와 기부액에 대해 보도하곤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월터 아넨버그(Walter Annenberg)가 필자가 다닌 대학교의 언론대학원에 미국 대학 기부 역사상 단일 기부금으로는 최대 금액인 2500만 달러를 기부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2500만 달러는 정말 큰 돈이었다. 학생들은 트럼프는 모교 졸업생인데도 불구하고 한 푼도 기부하지 않았다고 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는 무관하게 돈을 번 그가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 기부할 리가 없다고들 웃었다.
필자에게 요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30년 전 모습 그대로다. 한 가지 차이는 지금은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극화의 구조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미국사회가 '계급전쟁'을 치르고 있다고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정치가 도와주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정치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다. 그는 냉혹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돈의 생리와 작동방식, 또 그 힘을 철저히 터득하고 이용하여 큰 돈을 벌어 그 돈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세계관으로써 미국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만일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미국 사회와 국제사회는 조지 W. 부시 시절보다 더욱 심각하게 쪼개질 것이다. 정치지도자와 집권세력이 시민들과 하나 되는 '우리'가 되지 못하고 시민들로부터 유리되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들'이 되는(us vs. them) 상황, 그렇게 되어 민주주의의 근간이 훼손되는 상황이 될 것이 눈에 뻔하다.
그리고 강대국의 지위와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부담해야 할 몫을 스스로 치르지 않고,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여 자신이 치러야 할 몫의 비용을 국제사회에 떠맡기는 미국에 대해 국제사회는 분노할 것이다. 설령 미국의 언론계, 정치계, 정책서클, 학계의 인사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여 그의 잘못된 국내외 정책을 어느 정도 막아낸다 해도, 미국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그러한 변화가 전 세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 제대로 된 지도자 한 사람이 온전히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리더가 없는 세상이 암흑천지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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