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4.13 총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수도권 지역 및 영호남 지역 10곳을 선정, 선거가 끝날 때까지 해당 지역의 이슈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른바 '스윙 보터' 지역이다. 지난 총선 결과 등을 토대로 수도권에는 서울 은평, 마포, 종로, 용산, 노원, 경기 수원.용인 등 6개 권역을 '스윙 보터' 지역으로 선정했다. 수도권 지역의 상당수가 '스윙 보터' 지역으로 볼 수 있지만, 이번 선거의 상징성, 출마자의 면면 등을 참고해, 6곳을 '샘플'로 정했다. 이 지역의 인물, 구도, 이슈를 따라가다 보면 수도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특별히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대구 동구, 대구 수성을, 창원 등 영남권 3개 권역과 호남권의 광주 등 총 4곳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지역들은 수도권 선거 판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이다. <프레시안>은 10곳과 관련된 상세한 리포트를 10회에 걸쳐 순차적으로 내보낼 계획이다. (편집자)
# 의리와 배신
으리(의리). 대구를 관통하는 정서라고 한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에서 '의리'는 타 지역에 비해 사용 빈도가 제법 높은 단어다. 반대말은 배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 '배신'이란 표현을 쓴 데에도 이런 이유가 있을 테다. 대구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아 온 박 대통령은 그 스스로가 배신에 예민한 것 이상으로, 이 지역 시민이 의리와 배신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게다. 그래서 그는 선택했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는 강렬하면서도 단순하고 원초적인 표현을.
각종 이해 관계와 갈등이 3차, 4차, 고차 방정식 속에서 뒤엉키는 복잡한 정치 세계에서 이야말로 얼마나 화끈하게 똑 떨어지는 논리던가. 대구의 '의리 정치'에 대한 긍정·부정 평가를 하기 이전에, 의리와 배신이 대구 정치를 휩쓸고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시작된 이 두 단어는 총선을 코앞에 둔 지금에 이르러서는 적(赤), 백(白) 양쪽 모두에게서 쓰이며 대구 총선 민심을 뒤흔들고 있다. 꼭 후보들의 입에서뿐 아니라 각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입에서도 의리와 배신이 쏟아진다.
우선 적(赤)의 '의리' 사용법부터 보자. 1일 오전 대구 동구청 담벼락에 붙은 선거 벽보를 유심히 보던 이 모(72세·무직) 씨는 "이 벽보 띠라, 여기는 새누리당 동네다"라고 말했다. 약간은 성이 난 듯해 보였던 그의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은 대구 동구갑 현직 의원이자 친박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컷오프(공천 배제)' 이후 탈당한 무소속 류성걸 후보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이 씨는 류 의원의 "출마 자체가 배신"이라고 했다. "4년 전 공천을 줘 국회의원을 만들어 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이번엔 백(白)의 의리론. 같은 날 동구 효목동 동구시장에서 만난 박 모(43·자영업) 씨는 "밥상 다 차려놨는데 저기 경주 기웃거리던 사람이 친구 지역구에 들어와 그거 다 엎어버린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공천을 받고 동구갑에 출마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을 겨냥한 얘기다. 잘 알려져 있듯 류 후보와 정 후보, 그리고 유승민 후보(동구을)는 경북고등학교 57기 동문이다. 더욱이 류 후보와 정 후보는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자신을 경북고 출신이라고 밝힌 한 대구 시민(수성구 거주·52)은 이번 경북고 동문 대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긴 남자들끼리 그런 정서가 있거든요. 친구 있는데 와서 이러면 안 된다 이거지."
양쪽 후보들 모두 이런 민심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알고 있다기보다 이런 민심의 직접 '생산자'이자 '유통자'이다. 양쪽의 거리 유세를 가만히 살펴보면 새누리당 정종섭 후보 쪽이 좀 더 노골적이다. 정 후보는 이날 동구시장 앞 거리 유세에서 "이번 총선은 영남의 의리 정치를 바로 세우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또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국가가 위험한 이런 상황에서 정치하는 인간들이 자기 이익만 찾아가며 이합집산하고 있다"면서 "이런 것을 경상도 의리 정치가 용서할 수 있겠나"라고도 했다. 무소속 출마는 배신이며, 새누리당으로의 투표야 말로 의리라는 식이다.
'배신' 공격을 지속적으로 당해 온 유승민 후보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따뜻한 보수'와 '잘못된 공천 심판'을 앞세워 무소속 열풍을 일으켜 온 유 후보는 이날에는 정 후보를 겨냥한 작심 발언을 꺼내놨다. 그는 정 후보와 류 후보가 경북고 동기임을 거론하며 "저 같으면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오라고 해도 절대 출마를 안 한다. 사람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사람 도리 못하는 사람을 투표로 심판해 달라"고 말했다. 정 장관의 동구갑 출마가 아무리 대통령 지시었을지언정, 이 또한 분명히 의리를 저버린 선택이었다는 비판이다.
이렇게 의리와 배신이 뒤엉키고 있는 동구갑의 총선 판세는 각종 여론 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혼전 그 자체다. 지난달 26~28일 한국일보-코리아리서치가 한 여론 조사(신뢰도 95%, 표본오차 ±4.4%포인트)에서는 류 후보 지지율이 38.4%, 정 후보 지지율이 37.7%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SBS-TNS 여론 조사(신뢰도 95%에 표본오차 ±4.4%포인트)도 비슷하다. 이때에는 정 후보가 36.5%, 류 후보가 33.6%의 지지율을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 두 조사 모두 오차 범위 안 접전 결과를 보인다. (많은 언론이 1%포인트 전후로의 지지율 차이를 두고 누가 누굴 앞섰다고 쓰고 있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냥 '알 수 없다'가 통계적으로 옳은 말이다. 자세한 조사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참조)
물론 투표 결과에는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단 1표의 차이만으로도 승패가 갈린다. 그러나 어떤 결과이든 8일 후 이를 받아 들기 이전에 청와대와 새누리당, 그리고 대구의 정치인들이 절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은 대구의 '뿔난 민심'이다. 지난 20년 한결같이 새누리당에 표를 던졌던 이들에게서 생긴 '균열'을 한 번의 해프닝으로 지나치려 한다면 새누리당의 대구 정치는 미래가 없다.
"속 시원하게 정치하길 바라는데 여기는. 통이 좁잖아 좁아. 공천 마지막에 그 유승민 씨를 뜨거운 감자마냥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고.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거다. 무소속들 다 당선되고, 김부겸 씨(대구 수성갑 더불어민주당 후보) 당선되고, 홍의락 씨(대구 북구을 무소속 후보) 당선되고, 이래 돼서 박근혜 대통령 뒤통수 딱 때려야지."(대구 동갑 주민인 택시 기사)
억지로 찾으려 하지 않아도 손쉽게 포착되는 이런 '또 하나의 배신(=심판)' 정서가 이번 선거를 끝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경제와 정치
갱제(경제). 의리와 배신 다음으로 대구 유권자들의 입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단어는 경제였다. '미워도 새누리당' 20년의 대구 경제는 전망이 밝지 않다. 오죽하면 평생 새누리당에만 표를 던져봤다는 한 유권자(68세 여성·동구갑 주민)마저 "대구 경제가 엉망이다. 한 번 혼이 나 봐야 정신 차린다. 민주당하고 확 섞여야 여기 경제에도 누가 관심을 갖지 않겠나"라고 말할까 싶을 정도다.
어렵사리 만난 20대 유권자에게선 이런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 휴학 중이라는 강 모(27·남성) 씨는 "대구에서 살 생각이 단 1%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자리도 없고, 그래서 미래도 없는 대구에서의 '탈출'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강 씨뿐이 아니다. 대구경북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3년 기준 대구에서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은 6100명으로 전국 최대 규모였다. 특히 최근 10년간 대구 순유출자의 절반 이상인 53%가 20대 청년층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구 경제가 어렵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후보들은 경제 또는 개발 공약을 잇달아 내놨다. 새누리당 정 후보부터 보면, 그는 동대구역-파티마-유통단지 관통 프로젝트, 동대구 역세권 확장 프로젝트, 동대구 벤처 벨리 특화 프로젝트 등을 줄 세워 전면에 걸었다. 그러면서 정 후보는 1일 유세에서는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면 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면서 "박근혜 정부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모두가 실행이 불가능하 얘기"라고 말했다. 지역 건설 경기를 띄우는 개발 사업이 곧 대구 동구의 '발전 전략'이며, 이는 집권 여당 소속의 의원이 해야만 가능하다는 얘기로 요약된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지적한 대구 경제의 문제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다. 각종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 대구 경제 문제의 핵심은 '양극화'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2015년 가계 금융·복지 조사 결과' 자료를 보면, 2015년 3월 말 대구의 가구당 순자산 평균은 3억155만 원이었다. 전국 평균 2억8065만 원을 한참 웃돌고, 순위로 따지면 서울(3억8988만 원) 다음이다. 그런데 대구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형편없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2015년 지역별 사업체 노동력 조사' 결과를 보면, 그 해 4월 기준 대구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 총액은 267만8000원이었다. 전국 16개 시·도에서 제주(245만5000원) 다음으로 낮다. 전국 평균은 330만5000원, 1위인 울산은 423만 원, 2위인 서울은 370만8000원이었다.
그렇다면 대구의 (상대적으로) 많은 자산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 걸까. 통계청의 2015년 가계 금융·복지 조사 결과를 다시 보면, 대구는 전국 평균보다 사업 소득, 재산 소득(임대료 등) 비중이 큰 도시다. 2014년 한 해 전국의 평균 가구 소득은 4767만 원으로, 이 가운데 65.62%(3128만 원)가 근로 소득, 23.98%(1143만 원)가 사업 소득, 3.96%(189만 원)가 재산 소득, 6.44%(307만 원)가 이전 소득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대구만 뽑아서 보면, 한 해 평균 대구 가구 소득(4462만 원)의 60.42%(2696만 원)가 근로 소득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나머지 사업 소득 비중(25.28%·1218만 원), 재산 소득(4.54%·203만 원), 이전 소득(7.33%·345만 원) 비중이 모두 전국 평균보다 높다.
종합하면 이런 얘기가 된다. 대구가 (상대적으로) 가난한 도시는 아니다. 그런데 노동자가 살기는 정말 어려운 도시다. 임금 수준은 박하고, 근로 시간은 길다. 고용노동부의 같은 자료에서 대구 5인 이상 사업체의 상용 노동자 1인당 근로 시간은 2015년 4월 기준 190.5시간이었다. 전국 특별·광역시 중 울산 다음으로 길다. 전국 평균은 187.9시간이었다. 또 다른 지역보다 근로 소득 비중이 낮고 사업 소득, 재산 소득, 이전 소득 비중이 높다. '대구에는 자영업 하는 사람이나 먹고살고 좋은 일자리는 별로 없다'는 지역민들의 말이 어느 정도는 통계로 입증되는 셈이다. 또 임대료와 같은 불로소득 비중이 높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이런 대구 경제의 '발전' 전략으로 개발 공약이 정말 맞는 걸까. 물론 개발 공약을 통해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또 무엇보다 그 일자리들이 유지된다면 좋은 대안이다. 그런데 건설 현장에서 생기는 일자리란 것들은 대체로 한시직, 비정규직, 일용직들이다. 개발 사업이 끝나면 사라질 일자리들이기도 하다. 정 후보는 앞서 지난달 24일 '대구 혁신 10대 공약'을 발표하며 그중 하나로 '청년 일자리 창출'을 내걸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로드맵은 제시된 게 없다. '대기업 유치를 통한 대구 경제 살리기'가 함께 제시된 것으로 보아, 기업 유치가 사실상 유일한 해법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소속 류성걸 후보의 공약은 어떨까. 류 후보는 3일 유승민 후보와 대구 동갑의 권은희 후보와 함께 '금호강 성장 벨트'라는 이름의 대구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금호강으로 분절되어 있는 동·북구를 연결하는 교통인프라를 대폭 확대해 대구 경제의 미래를 여는 성장 벨트"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또 검단 지역에 도심형 첨단 복합 산업 단지를 조성하고 이 '금호강 벨트'를 대구 산업 부문의 중추적 역할 기지로 키우겠다고도 했다. '무소속' 후보들의 의기투합 공약이자, 실제의 '일자리'를 만드는 산업 부문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눈길은 간다. 그러나 여전히 일자리 '질'이나 지역 내 양극화와 관련한 공약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은 정 후보와 마찬가지로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따뜻한 보수'를 외치는 유승민 후보가 지난 1일 한국방송(KBS) 대구 동을 후보자 토론회에서 '경제 민주화'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 것은 다시금 짚어볼 지점이다. 유 후보는 "보수 정당이 경제 민주화 문제나 사회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 외면하고 방치하면 앞으로 보수 정당의 생명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정책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새누리당이 그런 정신을 잃으면 정당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대구 경제 상황에 비추어서도 의미가 큰 지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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