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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자 서구이며, 중국도 서구도 아닌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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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자 서구이며, 중국도 서구도 아닌 곳은?

[김윤태의 중국은 하나?] 초국가적 공간으로의 부활, 상하이

중국에서 회자되는 말 중에 "중국 역사 100년을 보려면 상하이(上海)에, 1000년을 보려면 베이징(北京)에, 2000년을 보려면 시안(西安)에, 5000년을 보려면 허난(河南)에 가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상하이가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말로 이해 할 수도 있겠다.

춘추 전국 시대의 상하이는 오(吳)나라에 속한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고, 송(宋) 말기에는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그 역할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편 전쟁을 계기로 상하이는 세상에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된다. 1842년 아편 전쟁의 패배로 맺어진 난징 조약에 의해 상하이는 중국의 5대 대외 무역항 중 하나로 개항되었다. 이때부터 상하이가 서구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상공업 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다.

상하이는 이러한 발전 역사에 걸맞게 여러 가지 별칭도 갖고 있다. 현대 중국의 '경제 중심지', 뉴욕과 런던 다음 가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 '극동의 가장 큰 상업 도시', '대중문화의 중심지'와 같은 별명은 상하이가 갖고 있는 정치 경제적 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초국가적 공간의 근대 역사

하지만 상하이는 외국과의 인연이 가장 깊은 도시로서 '초국가적 공간'으로 일컬어질 때 가장 적절하게 느껴진다. 난징 조약에 의해 개항을 한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은 상하이를 경제적으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농업 중심이던 상하이 경제가 빠른 속도로 상공업 중심으로 변화되었으며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투를 위한 주요 기지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국가 기구는 매우 취약했으며, 상하이는 부분적 식민지라 할 수 있는 '조계(租界)'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하이는 "중국이지만 중국이라 할 수 없는 정치적 공간"으로 재구성되었다. 하지만 조계 거주의 중국인들은 중국인 주권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정치 체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자치와 법치의 원칙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공간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상하이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당시 상하이의 주요 산업은 침략자였던 외국 자본에 의해 성장하게 되었으며, 경제 활동의 중심인 무역과 상업도 외국인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하이의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버리고 자본주의 시장 체제 및 국제적 감각에의 적응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상하이는 그렇게 최신의 자본주의 경영 기법과 금융 기법을 배우는 공간으로 중국인들에게 선망의 도시가 되었다.

상하이는 전통적으로 오(吳) 문화라는 지역 문화의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주변 인구의 유입으로 이민 사회로 변화했으며, 토착 문화는 정체성을 잃어가며 새로운 문화와의 접합을 시도했다. 마침 밀려들어온 서구 문화의 전파로 상하이는 매우 복합적인 문화 공간으로 재구성되었다.

1934년의 경우 상하이에는 중국 주권 지역과 공공 조계 및 프랑스 조계를 통틀어 8만 명에 가까운 외국인이 거주했다. 당시 상하이 전체 인구가 약 350만 명이었으니 외국인은 여전히 소수이긴 했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은 임시 체류자까지 합하면 꽤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 국적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한국 등 매우 다양했다.

'화양잡거(華洋雜居)'라고 당시의 상황을 표현했을 정도로 상하이의 중국인들에게 외래 문화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상하이의 외국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문화적 장벽이 제거되었고 혼혈 문화가 지배적 문화로 자리 잡아 갔다. 미국의 독립기념일, 성탄절, 신정 등 서구의 시간표는 손문 탄신일, 중추절, 춘절과 함께 상하이 사람들에게 삶의 일상이 되었다.

분초 단위로 관리되는 시간 관리 체제, 공장 안에서의 노무 관리 체제를 비롯한 근대적인 노동 환경, 서구적 학교 교육, 서구적 생활 습관 등의 보급으로 이미 상하이에서는 문화적 국적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중국식도 아니고 서구식도 아니며, 중국식이기도 하고 서구식이기도 하다(不中不西, 亦中亦西)"라고 표현되는 동서 융합의 대중문화가 상하이의 대표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서구식 삶과 서구 문화의 상대적 합리성은 이민 사회적 상하이의 개방성과 결합되어 독특한 성격의 대중문화로 형성된 것이다.

초국가적 공간의 현대적 부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어둡고 얼룩진 역사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상하이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도시로 화려하게 성장했고 중국 자본주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사회주의 건설의 구호 아래 한동안 맥을 잇지 못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상하이는 중앙 인민 정부의 무거운 세금과 외국 기업 축출, 공유화 추진으로 상공업의 발전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 개방 정책의 실시는 상하이에 다시 찬란했던 과거의 자본주의 경험을 되살려 주었다. 1990년대 초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개혁 개방 초기의 경제 특구였던 광둥 지역을 능가하며 중국 경제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상하이는 세계의 금융 및 무역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최첨단의 공법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국제 항공과 항만을 통해 국제와 국내를 연결하는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또한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세계의 유수 기업들이 상하이에 집결하고 있다. 2013년 말까지 상하이에 투자한 국가는 모두 157개 국가에 달한다.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도 445개나 된다. 상하이를 중국 시장 공략의 중심지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상하이에 영사관을 설치한 국가도 73개 국가에 달한다. 또한 세계 53개 국가 75개 도시의 자매 결연 도시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세계 언론사의 집결지이기도 하다. 세계 75개 언론사에서 114명의 기자를 파견하여 상하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상하이는 개혁 개방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옛날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전통 산업과 외국인 투자 기업이 함께 어우러져 활동하고 있고, 전통 문화와 서양 문화의 융합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국경과 종족을 뛰어 넘는 초국가적 생활 경험은 상하이의 문화를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로 성격지우고 있다. 상하이 사람들에 대해 합리적이고 개방적이며, 꽌시(關係)보다는 법과 제도를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한다. 이러한 성향은 그들의 초국가적 생활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황푸 강(黃浦江) 서쪽의 와이탄(外灘)에는 조계의 역사가 숨 쉬고 있고, 황푸 강 동쪽의 푸둥(浦東)에는 개혁 개방의 역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상하이는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며 초국가적 생활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근대의 경험이 수동적이었다면 현대의 호흡은 매우 역동적이고 능동적이다. 근대는 제국주의의 침탈로 얼룩졌지만 현대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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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서 중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외교부 재외동포정책 실무위원이며, 동덕여대 한중미래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재중한인연구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다. 국립대만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슈뿐만 아니라 조선족 및 재중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재중 한국인 사회 조사 연구>, <臺灣社會學想像>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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