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근대적인 민영 기업이 최초로 출현한 시기는 청일 전쟁 직후였다.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淸) 정부는 1895년에 일본과 시모노세키(馬關) 조약을 체결하고 외국인이 중국에 공장을 세우는 것을 허용했다.
당시에 청나라의 기업은 민간의 자본을 모집하여 관료가 경영을 하는 일종의 국영 기업인 관독상판기업(管督商辦企業, 줄여서 관판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양무파의 지지를 받고 있던 광서제는 시모노세키 조약 직후 외국 기업에 대한 역차별의 압력 때문에 관판기업을 민영화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청일 전쟁의 패배 덕에 중국에서 민영 기업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때 62개의 기업이 설립됐는데 총자본금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억 원 이상에 달하는 꽤 규모가 큰 기업들이었다. 1898년 무술정변과 함께 양무파가 제거되고 서태후가 정권을 잡았을 때도 민영 기업은 꾸준히 증가하여 청나라가 망하던 1911년에는 340개의 기업이 새로이 설립됐다.
신해 혁명 성공 부른 불공정한 정부의 철도 국유화
민영 기업에 대한 청 정부의 태도는 온정적이지 않았다. 특히 철도에 대해서는 민영 기업과 이익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압적이었다. 그 중에서 위에한(粤漢) 선 철도와 관련한 정부의 정책은 청의 멸망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위에한 선은 광둥(廣東) 성 광저우(廣州)와 후베이(湖北) 성 우창(武昌)을 연결하는 철도이다. 이를 1905년 가을에 후베이, 후난, 광둥 3성의 민간인들이 출자하여 미국 회사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했다.
청 정부는 처음에는 이를 허가하는 듯 했지만 1908년에 서태후는 독판(督辦) 대신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게 하고, 곧이어 쓰촨(四川) 성의 청두(成都)와 후베이 성의 우한(武漢)을 잇는 촨한(川漢) 선도 그의 관할에 넣도록 했다. 이후 출자한 사람들의 반발 때문에 잠시 민영화로 돌아서기도 했지만 결국 1911년 초에는 모든 철도를 완전히 국유화했다.
문제는 단순히 민영 철도를 국유화한 것에만 있지 않았다. 주식 투자 형태로 창업한 위에한 선 철도의 주주들로부터 원래의 투자액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투자자 중에는 어렵게 돈을 모아 투자한 농부도 꽤 많이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약속했던 민영화를 순식간에 뒤엎고 국유화를 단행했으니 정부에 대한 민간의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철도를 국유화한 그 해 청나라는 신해 혁명으로 멸망하고 만다. 물론 나라가 망한 원인이 철도의 국유화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 위에한 선의 종착역이 있는 우창(武昌)에서 신해 혁명이 시작됐을 때 자신들의 권익을 한순간에 박탈당한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청나라 정부가 민영 기업을 장려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했다면 신해 혁명의 양상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개혁 개방 이후의 시기를 돌이켜보면 민영 기업이 중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동력이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민영 기업은 세계의 공장이 되어 수많은 중국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삶을 책임졌다. 그러나 지금 그 민영 기업이 난관에 봉착해 있다. 난관의 시작은 세계 금융 위기였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정부의 정책에 있다.
2008년 말 중국 정부는 세계 금융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다. 그 규모가 4조 위안(약 720조 원)에 달한다고 해서 주로 '4조 위안 계획'으로 불렸다. 이 프로젝트와 더불어 2009년 말에는 '10대 산업 진흥 계획'이라는 산업 구조 정책이 발표됐다. 따지고 보면 이 계획이 현재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조 위안은 주로 도로, 철도, 공항 건설 등 국유 기업으로 투입됐다. 특히 고속철도 부문에 상당액이 할애됐다. 또 10대 산업 진흥 계획을 추진하면서 1년 만에 9조 2500억 위안(1665조 원)에 달하는 신규 대출이 발생했는데 10대 산업이라는 것이 철강, 자동차, 선박, 석유화학, 방직, 경공업, 유색 금속, 장비 제조, 전자 정보, 물류 등 국가 기간 산업이거나 전략 산업이었기 때문에 주로 국유 기업으로 대출되었다. 또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산시(山西) 성 2840곳의 민영 석탄 광산이 국유화되는 등 국유화의 열풍도 불었다.
돈 잔치 벌이는 국유 기업과 대출 어려운 민영 기업
2008년 약 43조 위안이던 국유 기업 자산이 불과 2년 만에 100조 위안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돈이 국유 기업에 집중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동안 민영 기업은 대출을 받고 싶어도 대출 조건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는 정부 방침 때문에 긴급 자금조차 쓰기 어려웠다.
그러나 국유 기업은 예외였다. 예를 들어 민영 기업이었던 동싱(東星)항공은 자금 압박으로 파산했지만(현재 재심 중) 큰 적자를 내고 있던 국유 기업 동팡(東方)항공은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로부터 70억 위안을 지원받았다. 또 독점적 영업을 하는 중국석유와 중국석유화학은 매년 500억에서 1500억 위안의 이윤을 내는데도 50억~100억 위안의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국유 기업은 돈 잔치를 벌였다.
부패도 극심해졌다. 류즈쥔(劉志軍) 철도부 장관은 6400만 위안(1150억 원)의 뇌물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현재 감형 추진 중), 국가 발전 및 개혁위원회 부주임이자 국가에너지국 국장이던 류티에난(劉鐵男)과 중국석유집단 회장을 역임하고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주임이던 장지에민(蔣潔敏) 등은 뇌물 수수와 직권 남용 혐의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각각 무기징역과 16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결국 저우융캉(周永康) 사건도 따지고 보면 '4조 위안 계획'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의 헌법 11조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개체 경제, 사영 경제 등 비공유 경제는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유 기업은 사실상 이런 법률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사회주의의 적장자로서 군림해왔다. 국유 기업에는 과잉 투자되고, 민영 기업은 대출도 받기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상황을 중국인들은 국진민퇴(國進民退)라고 부른다. 국유 대기업은 발전하고, 민영 중소기업은 퇴보한다. 좀 더 확대하면 국가는 발전하지만 민간은 퇴보하는 현상이 중국 사회 곳곳에서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4조 위안을 시장에 투입했으니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은 사회 보장 제도가 빈약한 중국에서 빈곤층이 더욱 빈곤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4조 위안 프로젝트 덕에 2008년 이후 중국에 고속철도의 길이가 약 1만 킬로미터나 늘어났다. 있는 사람들은 안락한 여행을 즐기게 됐을지 모르지만 민영 기업은 경쟁력을 잃어갔다.
민영 기업의 불안은 취업의 불안을 의미한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민영 기업은 정부를 불신하게 됐고, 생존을 위해 창의력과 혁신을 추구하기 보다는 더욱 더 꽌시에 매달리게 됐다. 중국 역사에서 늘 보아오던 관상(官商)의 폐해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개혁이 동반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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