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 넘은 정치학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생 한국 민주주의 연구에 몸을 바쳐온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한국 정치의 현실을 진단하는 장문의 에세이를 공개했다.
최 교수는 <문학과사회>(문학과지성사 펴냄) 2016년 봄호(제113호)에 기고한 에세이(한국 정치의 문제,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를 논한다)에서 한국 정치를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plebiscitary/plebiscitarian democracy)"로 명명하고, 그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失政)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책임의 의무' 없는 대통령, 전제 군주보다 강력해"
"나는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를 대표 내지 통치자의 선출만 있고, 그를 선출한 시민 유권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 체제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는 유권자로서 시민이 한 번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으로 그 이후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최장집 교수는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책임이라는 두 측면으로 구성된다"며 "그러나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상황은, 선출된 대표는 있지만, 그 대표가 자신을 선출해준 시민 유권자에 대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변형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지칭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최고 통치자로 선출됐다 하더라도 그/그녀의 권력 행사에는 분명한 조건과 한계 내지 범위가 있다"며 "만약 대표-책임 연계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모든 성인 남녀 시민들의 선거로 선출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 사람의 군주나 전제적 통치자를 선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게 책임의 의무를 저버린 최고 통치자는 전제 군주("군주/왕")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다.
최 교수는 "현대의 대표-책임의 연계의 원리에서 자유로운 권위주의적 통치자는 전통 사회의 군왕처럼 유교의 도덕적 규범이 부여하는 강한 내면적 제약에 의해 구속될 필요도 없고, 전통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이 거대하고 잘 발달된 현대의 강력한 행정 관료 체제를 관장할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최 교수는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선출된 대표로 하여금 어떻게 그/그녀 자신의 권력/권한 행사를 통한 통치 행위에 대해 책임지도록 만드느냐 하는 문제 즉 선거에 의해 대표를 선출하는 것과는 달리 책임지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이 민주주의에서 가장 애매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토로했다.
최장집 교수가 이렇게 민주주의에서 '책임의 문제'를 거론한 것은 처음은 아니다.
그는 2007년 6월 27일 <프레시안> 등이 주관한 한 강연에서도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가 견제되지 않는 대통령 권력"이라며 "민주화 20년간 강력한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할 관료와 오히려 결탁해 대의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대표-책임의 원리를 경시하는 방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출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박근혜 정치 행태, 북한 체제의 거울 이미지"
그렇다면, 최장집 교수가 다시 이 문제를 한국 정치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북한 체제의 거울 이미지"라 할 만한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행태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는 "우리는 지난 2012년 대선 시기에 새누리당과 그 후보가 제시했던 크고 작은 주요 선거 공약들이 그 이후 공공연하게 파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며 "그 가운데서도 경제 민주화, 복지 국가, 국민 통합과 같은 공약들은 선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던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공공연하게 파기되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국내외적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를 기다렸다는 듯이 떳떳하게 그 폐기를 공언하는 것은 시민 투표자들에 대한 기만이자, 데마고그적 정치 행태(자기 이익을 위하여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 행태)가 아닐 수 없다"며 "그러한 행태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규범에 배치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최 교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 심정을 털어놓았다.
최 교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대해 놀라게 되는 것은, 우리의 지적 사상적 자유를 포함하는 내면적 정신세계의 자유로움과 그 존엄성을 억압하는 것이 어떤 이념적 가치나 목적을 위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상 때문"이라며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수장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통령 권력에 대한 오해와 권력 남용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그것은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북한 체제의 거울 이미지라 할 만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독재 체제를 닮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며 "북한에 대한 비판과 부정은, 북한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자유로운 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서 최장집 교수는 "선출된 통치자와 정부는 선거에서의 승자와 패자를 포함하는 전체 사회의 공익에 봉사해야 한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는 정반대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현재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행사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선거에서의 패자들, 즉 선거 시점에서의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제적일 뿐 아니라, 이들을 대상으로 법을 사용하면서 공정하지 못했다"며 "또 그들이 소외와 배제, 억압에 항변할 때, 그들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소외와 배제의 결과가 정부에 대한 항변, 비판, 나아가서는 집단 시위로 나타날 때 그들은 쉽게 권위주의 시기에서의 공안 사범이라도 되는 듯 적으로 다루어지기 일쑤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적 갈등은 격렬해지고, 온 사회에 편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사회는 분열되고, 피폐화되었는데,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최장집 교수는 에세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서 이렇게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가 한국 정치의 지배적인 정치 행태가 된 원인을 추적한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분석은 '강한 국가'를 강조하는 대목이다. 최 교수는 한국 사회의 힘의 균형추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통상적인 분석에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떠올리며, "이 말은 일면 사실인 점도 있지만, 맞지 않는 면이 더 크다"고 반박했다. 최 교수는 "국가와 재벌대기업 사이의 힘의 관계는 엄연히 국가의 우위가 관철된다"며 "한국 경제는 '관치 경제적 신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적 표현으로 특징될 만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최 교수는 "한국의 재벌대기업은 국가권력에 의해 탄생하고 성장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특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도 국가권력에 대해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며 "또 한국의 대기업은 국가권력이 노동운동을 약화 또는 무력화시키는 환경 하에서 성장한 탓에, 노동을 자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즉, 국가권력은 아직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세월호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강한 국가'가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데에 있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강한 국가가 성립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서로 다른 이익과 목적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이고 작은 공동체" 즉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직업, 직능적 이익을 조직하고 그것을 대표할 결사체"의 부재를 꼽았다. 바로 농민, 노동자, 서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결사체의 부재를 꼬집은 것이다.
최 교수는 "사회 경제적 약자, 소외된 집단, 또는 국가 중심적 합의 구조에 대해 이견을 갖거나 거기에 포섭되지 않은 집단이나 부문들에 대해 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다"며, 당연히 "그런 다양한 집단들과 그들의 결사체를 하부 기반"으로 둔 "정당도 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이렇게) 특수 이익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조건 하에서 정당들 간의 경쟁과 그들 간의 정권 교체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가 속해 있는 특수 이익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한국의 경제 엘리트는 왜 국가에 굴종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변화를 추동할 것인가?
최장집 교수의 분석대로, 현대 한국의 사회 세력의 힘의 배열은 "권위주의 시기에서 기원한 두 집단" 즉 "민간 정치인, 관료 그리고 언론을 수단으로 하는 일종의 국가 엘리트 집단"과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재벌대기업에 기반을 갖는 경제 엘리트 집단"이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상황이다.
최 교수는 이런 "힘의 배열"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 사회를 실제로 움직이는 세 가지 힘, 즉 국가 엘리트, 자본, 노동이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각기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통해 한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대목에서 최 교수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대기업 집단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이다.
최 교수는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세계적 수준의 기업으로 성장했고, 국가 경제를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다"며 "그런데도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은 시장 경쟁이 아니라 관치 경제를 권력 자원으로 하는 국가권력에 종속되고 의존하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을 향해 줄서기에 급급한, 정치적으로 형편없이 무력한 집단"이라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나는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이 이 극단적인 부조화를 어떻게 감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탄한 뒤, "냉전 시기의 반공 이념, 격렬한 민족주의는 세계화의 이념과 가치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개방된 그들 경제 엘리트의 경제 활동 영역에 비해 너무나 폐쇄적"이라고 꼬집었다.
최 교수는 "지금은 경제 엘리트들이 정치적 선택과 역할을 할 시점"이라며 강조하며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자유주의적 정치 공간을 여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교수가 보기에 특히 그들에게 열려 있는 선택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냉전 시기의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평화 공존, 화해 협력의 지도적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 둘째는 노동 문제에 대한 관념, 이해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 내가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말했던 것은 (…) 정치적으로 문제일 뿐 아니라, 이러한 적대적 노사 관계는 생산자 집단으로서의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자기 파괴적 효과를 불러온다."
이런 최 교수의 제안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 부르주아에게 정치적,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할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독일의 고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목소리와 공명한다. 실제로 최 교수는 에세이 끝에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노(老)정치학자의 음울한 예언이다.
"독일 부르주아의 정치적 미성숙과 무력함이 1차 대전의 패전과 바이마르공화국의 붕괴, 나치의 등장과 2차 대전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것과 같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기업 엘리트들이 국가에 굴종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유익한 일이 되지 않으리라 본다."
"사회 세력의 배열이 민주화, 탈냉전, 세계화된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중심으로 재정렬되길 바란다. (…)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이 그에 대응하지 못할 때 정치의 현상적 변화가 어떤 것이든, 국민 투표식 민주주의의 위험은 제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권위주의와의 동거를 면치 못하게 되는 상황이 심화될 수도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