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전 수석은 1963년 6.3 한일회담반대투쟁의 배후 인물로 구속된 이후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김지하 양심선언 발표,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조사 및 폭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 폭로 등 한국 현대사에서 굵직한 여러 사건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김 전 수석은 구속 인사에 대한 변론자료 준비와 구명운동, 구속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 각종 성명서 작성, 해외 지원 세력과 연대, 수배자들을 위한 은신처 마련 등 민주화 운동을 배후에서 뒷받침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 전 수석이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 <이 사람을 보라>다.
<이 사람을 보라>는 격월간지 <공동선>(발행인 김형태 변호사)에 '그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지난 2006년 1권이 발행됐고 이어 올해 초 2권이 나왔다. 2005년에 출간된 김 전 수석의 <진실, 광장에 서다>(김정남 지음, 창비 펴냄)가 사건을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되새겨 봤다면, <이 사람을 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민주화 운동사를 짚어보는 책이다.
책의 출간에 즈음해 <프레시안>과 만난 김 전 수석은 김지하·김재규 구명 운동 과정을 비롯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생생한 과정을 풀어 놓았다. 특히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박종철 사건의 진실이 천주교 김승훈 신부에 의해 폭로된 과정은 그의 말대로 "사람의 힘만 가지고 무언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에 민주화가 찾아올 줄 알았지만, 민주화의 거목이었던 YS는 3당 합당을 통해, DJ는 JP와의 연합을 통해 대권을 거머쥐면서 사실상 민주화 세력의 적통성은 사라져버렸다.
김 전 수석은 "이러한 과정은 민주화의 대의를 역사 속에 각인시키지 못하고 혼재하게 만들었다. 만약 1987년 선거 때 민주화 세력이 단일화를 했거나 승리했다면 민주화 흐름이 역사의 대의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정쩡하게 타협의 산물로 왔다 갔다 했다" 며 "그러다 보니 박근혜 정권도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나"라고 진단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보통 '민주화'라는 단일 목표에만 매달린 경우가 많았다. 지금 이 공동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며 "그러다 보니까 무능과 부패, 도덕성 등이 국민한테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박정희 같은 예전 독재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전 수석은 "야당에 대해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정치라는 것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자유를 보장해줘야 하는데, 야당에 이럴 능력이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가장 큰 결함"이라며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수 있다, 이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인터뷰는 지난 23일 서초동 김 전 수석의 사무실에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김정남 :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린 것 같다. 민주화운동에 빠져들었던 것도 아니고, 저절로 거기에 젖어버렸다고 하는 게 가장 맞는 표현 같다.
그럼에도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면 친구인 시인 김지하가 잡혀갔던 일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지하는 학년은 위였지만, 학교를 워낙 오래 다녀서 편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안 보면 그립고 보면 지겨운 그런 사이였다.(웃음)
당시 나는 <만추>를 찍은 이만희 감독과 친분이 있었는데, 이 감독이 <청녀>라는 영화 촬영차 흑산도에 갔을 때 김지하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흑산도에 다녀오는 길에 김지하가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갔다.
이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일인데, 김지하 어머니인 정금성 여사와도 잘 알고 있어서 어머니가 지하를 만나러 서울에 오실 때마다 우리집에 들르셨다. 어머님이 지하 면회한 이야기, 구속자들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결국 지하를 구명하는 일에 뛰어들게 됐다.
얼마 되지 않아 천주교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갔다. 김지하 등에게 자금을 주었는데, 유신 당국이 이를 문제삼은 것이었다. 지 주교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학생들에게 자금을 준 것이고 자신은 떳떳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쨌든 지학순 주교한테 책도, 돈도 넣어주고 면회도 다녀야 하는 등 소위 '옥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당시 천주교에서는 원주에서 서울까지 이동을 해야 하는 데다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이 힘을 합했다. 예전에 명동성당 옆에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엑스레이과에 근무하는 박영자 수녀가 있었다. 이분이 지학순 주교의 열렬한 팬이었다. 박 수녀의 방이 일종의 옥중 수발을 준비하는 장소였는데, 당시 군종단에서 일했던 박의근(야곱), 원주교구의 양대석 신부, 지학순 주교의 동생인 지학삼 씨, 김지하의 어머니인 정금성 여사, 신현봉·최기식 신부, 후에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한 이창복 등이 함께했다.
처음에는 제가 면회 계획을 짜는 일종의 교사 역할을 했다. 그 인연으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일에도 관여하게 됐다. 당시 원주교구에서는 지학순 주교 구명을 위해 전국에서 기도회를 조직했는데, 최기식, 신현봉 신부 등이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게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활동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이 지학순 주교를 구명해달라는 운동을 하고 다니는 과정에서 젊은 사제들의 호응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사제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학순 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주교의 입장은 '우리가 쌓은 담 밖으로 나가지 않을 테니 너희들 (사회)도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학순 주교가 잡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담이 헐렸고, 사제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1970년대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거룩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의 개입'이었고, 신구교회가 민주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세력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 : 결국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민청학련 사건이었던 것인데, 교회와 민주화 세력이 하나로 모이게 되는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다.
김정남 :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지방 경찰서에서는 구속자들의 부모들에게 "당신 아들이 하던 공부는 안 하고 나라를 전복하는 일에 참여했다"면서 공안 사건으로 위협했다. 그래서 대개의 가족들이 자식을 면회하러 와서 "왜 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여기에 부모들은 '내가 아이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민청학련 사건 당시 잡혀들어갔던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 선생을 비롯해 구속자들 가족 중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는 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구속자들 가족이 단결하기 시작했다. 박형규 목사의 부인인 조정하 여사가 처음 구속자 가족 대표 격을 맡아 '구속자 가족 협의회'를 결성했고, 김한림 선생, 김지하 어머니, 유인태 의원 어머니 등이 중추 역할을 맡았다.
이때 내가 이분들이 해야 할 일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면 당시 평균 정치범들이 1년에 100명 정도 있었는데, 내복값이 10000원 정도 했을 때였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면 내복값이 100만 원정도 들었다. 지학순 주교가 감옥을 갔다가 나온 뒤에는 이 돈을 마련해줬다. 그러면 그 돈을 가지고 내복을 사다가 안에 있는 정치범들에게 넣어주고, 지 주교가 해외에 나가 있으면 해위 선생한테 글씨를 좀 써달라고 해서 그걸 팔아서 사서 넣기도 했다.
프레시안 : 당시 주로 수배자들이나 구속자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많이 맡으셨는데,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이었나?
김정남 : 쫓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숨기느냐의 문제였다. 가령 민청학련 사건 때는 장기표, 조영래, 김근태가 모두 쫓기는 상황이었다. 이들을 숨기기도 하고 생활비도 대주는 등의 일을 했다. 이와 함께 구속자들이 돈을 주고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변론 자료의 상당 부분을 뒷받침해줬다. 그래서 변론 자료 수집이나 변론 보조 활동 등을 통해 인권 변호사들이 좀 더 쉽게 변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그 다음에 중요했던 것이 해외 언론 활동이었다. 김지하의 경우 국내에서는 보도가 거의 안되기 때문에, 구명하려면 해외에 보도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해외에 보도가 나가려면 소위 '꺼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김지하 집에 가서 김지하가 쓰다만 일기, 습작한 시 등을 찾아서 일본으로 보냈고, 그러면 김지하 구명운동을 벌이는 단체에서 번역을 해서 싣는 활동 등을 했다.
'고독한 혁명'을 했다는 김재규, 그를 구명한 이유는
프레시안 : 이 책에서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소개돼 있어서 유심히 읽어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김재규는 본인이 스스로 혁명가라고 이야기했는데, 김재규 구명 운동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신 걸로 알고 있다.
김정남 : 나는 김재규를 살릴 수 있다면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가능할 것이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민주화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민주화 세력의 거목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쪽에서 이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 쪽에서는 새롭게 권력을 잡을 것으로 보이는 신군부 눈 밖에 나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절대 김재규 구명 운동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사발통문까지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영삼 쪽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천주교, 학생, 해위 선생 정도만이 김재규 구명에 참여했다.
프레시안 : 김재규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고민이었는데 그런 방식으로 민주화 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었다. 책에 선생님께서 "오늘날 박정희의 부활은 역설적으로 김재규 덕분" 이라고 쓰시기도 하셨다. 사실 유신 정권을 끝내는 과정에서 타협이든 투쟁이든 민중이 주체가 됐어야 했는데, 박정희 사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귀결돼버렸다.
김정남 : 김재규 측에서는 제대로 변론해줄 사람을 만나기를 희망했는데 김재규의 사돈댁이 예전에 이승만 정권 때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내고 2공화국 때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던 전예용이었다. 이 집안이 가톨릭이라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김재규를 변론할 사람이 없겠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변호사이면서 국회의원도 했던 김정두 씨가 구미에 있을 때 김재규와 이웃사촌으로 지냈다. 부인들끼리 교류가 있었는데, 10.26 이후 김재규 부인이 김정두 씨 부인에게 남편의 구명을 요청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이돈명 변호사가 김재규의 변호를 맡게 됐다.
이 밖에도 류택형 변호사 역시 김재규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그런데 류 변호사가 김재규와 만나면서 녹음을 했는데, 이 녹음이 김재규가 왜 이런 사건을 저질렀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이후 김재규는 보안사령부에서 계속 고문을 당했다. 이후 변호사를 처음 만난 것이 11월 31일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서 였다. 이 때 류택형 변호사가 김재규를 만나러 들어갔는데 녹음기를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당시는 피고인과 변호사가 만날 때 녹음기를 들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육군 교도소가 겉으로 보기엔 무서워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정치범을 어떻게 관리할지 잘 몰랐던 상황이라 녹음기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녹음 내용을 들어보면 그는 시종일관 진지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각하께서...하셨다"라는 경어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을 키우고 여기까지 이끌어 온 대통령을 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김재규는 이렇게 대답했다.
"각하께서 돌아가실 운명이었던 것 같다. 나도 기회를 노렸지만 내가 먼저 아무 까닭 없이 총을 들이댈 수는 없는 상황이었는데 7시 뉴스에 김영삼이 나오니까 각하가 '저걸 잡아 넣었어야 했는데, 유혁인이가 미국 브라운 국방부 장관 다녀가고 나서 어떻게 하든지 하자고 해서 미뤄놨던 것이 잘못됐던 것 같아. 미국 놈들, 지들은 안 잡아 넣나?'라고 말했다. 이걸 계기로 나는 '각하, 대국적인 정치를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차지철을 쏘고 대통령을 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았는데 꿈틀거리자, 대통령이 부상을 입은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계엄령을 내릴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군인이다보니 이런 생각을 먼저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 박선호 당시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에게 총을 달라고 했고 확인 사살을 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나중에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녹음을 들어보면 김재규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절절한 말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 용어 선택까지 그는 상당히 정갈했다.
김재규는 5.16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쌓인 모든 적폐를 청산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한 뒤 본인을 알아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 가서 시묘하는 것이 마지막 임무라고 말했다. 그런 그의 말을 거짓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김재규의 거사를 '고독한 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재규와 변호사가 만난 이 녹음 파일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다.
프레시안 : 1936년 일어났던 일본의 2.26사건을 보면 주모자만 처벌했고 아래 지시받은 군인들은 다 풀어줬다. 그런데 김재규 사건의 경우 본인에게만 죄가 있고 나머지는 딱히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김재규 부하의 상당수가 사형을 당했다.
김정남 : 인혁당 사건 같은 경우는 개신교 쪽에서도 구명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주교 사제단 통해서 제가 구명 운동 문안도 쓰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죽고 나서 보니 어설픈 구명 운동이 오히려 저들을 빨리 죽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김재규도 마찬가지로 제가 구명 운동을 했는데, 이것 때문에 빨리 죽은 것 같다는 회한이 있다. 대신 김지하 같은 경우, 양심선언을 기획하고 결국 감옥에서 빼내고 구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기분은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사람 하나 살렸다는 보람이 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묻힐 뻔했던 진실
프레시안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및 진실은폐 사건.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후 정부는 하급 경찰의 소행으로 진실을 축소·은폐하려 했으나 당시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증언을 김정남 수석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편집자) 에서 선생님이 진실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신다면?
김정남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람의 힘만 가지고 무언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우연과 기적 같은 일이 상당히 많았다.
1986년 5.3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쫓기던 때, 당시 이부영은 갈 데가 없어서 고영구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다. 고영구 변호사는 본인이 민주화 운동을 못할지라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며 흔쾌히 이부영을 받아줬다. 그런데 그 집을 가만히 보니까 고영구 어머니가 여든이 넘었고, 부인은 신경성 위경련을 앓고 있었다. 이부영은 만약 이 집에 있다가 본인이 잡힌다면, 고영구 변호사는 범인 은닉죄로 구속 당할 거고 그러면 집이 파탄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부영은 나를 만나 고영구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잡힐 때 다른 집에 있었던 것으로 할 수 없겠냐고 문의를 했다. 당시 이돈명 변호사 사무실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인연으로 이 변호사에게 "이부영이 선생님 댁에 있었던 것으로 하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변호사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했다. 본인이 65세 가까이 되다 보니 당국이 본인을 구속시키기는 힘들지 않겠냐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부영이 나와 만나는 길에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이돈명 변호사와 지리산을 가기로 돼 있었는데 결국 가지 못했고, 후에 쫓아 내려가서 이돈명 선생님한테 "이부영이 선생님 댁에 있었다고 진술할지도 모르겠으니 선생님도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이돈명 변호사는 결국 붙잡혀 갔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주위의 인권 변호사들을 모두 불러서 경위를 이야기했다. 이돈명 구속은 전부 내 탓이라고. 고영구 변호사는 왜 노인네를 잡아가게 하느냐며, 본인이 자수하겠다고 길길이 뛰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했다. 위계(僞計, 거짓 계략)에 의한 공무집행방해로 이돈명 변호사도 구속되고 고영구도 구속될 수 있으니까 이중피해를 보는 것보다는 이대로 덮고 나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결론을 냈다. 그러면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부영이 잡힐 때 호주머니에 30만 원 정도가 있었다. 이선휘라는 사람한테 도피 자금으로 받은 뒤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돈의 출처가 나라고 해서 내가 공개 수배를 당했다. 범인 도피 및 은닉으로 수배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정치범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서대문과 영등포 교도소, 구치소 등으로 분할했고, 이부영은 영등포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다. 이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강진규 경사와 조한경 경위가 영등포 교도소에 들어왔다. 강진규 경사는 진주 사람인데 아버님이 강직한 분이었다. 그 아버지가 강 경사에게 면회 와서 "나는 너 같은 놈을 아들로 둔 적 없다. 내가 언제 너에게 사람 죽이라고 했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강진규는 자기가 박종철을 죽인 게 아니라고, 본인 담당도 아니었고 발 한번 들어줬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걸 면회 자리에 입회한 교도관들이 이부영한테 옮기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치안본부에서 강진규, 조한경을 면회할 때 교도관이 입회하게 돼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안유 보안계장이 있었는데 치안본부장이 직접 강진규, 조한경을 만나니까 여기에 배석해서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듣게 됐다. 그는 여기서 들었던 이야기를 이부영에게 옮겼고, 이부영은 여러 달에 걸쳐서 나에게 편지로 이를 전달했다.
안유 외에도 한재동 교도관 역시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진규와 조한경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이부영에게 낱낱이 알려줬고, 이부영이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필기도구도 제공했다. 또 이 편지를 전병용에게 전달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이부영은 나에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세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당시 나도 수배 중인지라 편지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3월이 됐는데, 미국에서 친구가 와서 시내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루는 전병용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가 지금까지 왔던 이부영의 세 통의 편지를 한꺼번에 나에게 줬다. 그리고 나서 사나흘 후에 전병용이 잡혀 들어갔다. 만약 전병용이 먼저 잡혔거나 내가 이걸 전달받지 못했으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편지를 받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정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홍사덕, 김덕룡 등에게 연락을 해서 강삼재가 발표하기로 했는데 겁이 나서 못 하겠다고 하더라. 할 수 없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천주교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함세웅 신부에게 편지를 쓰고 고영구 변호사 부인이 가톨릭 신자라서 이 분을 통해 성명서 문안과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함세웅 신부한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도망 다니느라 전후사정이 어떤지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는데 5월 18일 오후 6시 30분, '광주민주항쟁 7주기 기념미사'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폭로가 나왔다.
미사를 집전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군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후에 '반금곤'으로 수정), 경장 이정오(후에 '이정호'로 수정)로서 이들 진범들은 현재도 경찰관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승훈 신부가 이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다. 함세웅 신부에 따르면, 함 신부가 김 신부에게 미사에서 발표 부탁을 위해 원고를 가지고 가면, 김 신부의 어머니가 어떻게 알고 둘이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함 신부가 5월 17일 김 신부를 찾아갔는데 이때 김 신부의 어머니가 "함 신부, 중요한 일 있어서 자주 오는 거지? 오늘은 비켜줄테니까 이야기 해"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 신부의 어머니는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제 꿈을 꿨는데 김승훈 신부가 큰 함정에 빠졌을 때 성모님이 나오셔서 손을 붙잡고 끌어 올려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김 신부의 어머니는 이렇게 좋은 꿈을 꿨기 때문에 본인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라고 말했고, 결국 김승훈 신부는 역사적인 발표를 하게 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돌아보면 전병용이 나에게 편지를 전해준 것, 이부영이 옥중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 이야기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 등등이 모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너무나 절묘했고 우연히 잘 맞아 떨어졌다.
김승훈 신부의 발표 이틀 뒤 경찰은 고문 치사 사건이 조작됐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결국 6월 항쟁으로 번지게 됐다.
민주화 운동 세력, 어정쩡한 타협으로 정통성 잃어
프레시안 : 김재규의 사형을 보며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박정희가 칭송받고 부활하는 이유는 김재규의 덕일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당시 민주화 세력 측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역량의 한계가 드러난 것 아니었을까?
김정남 : YS가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한 것, 또 DJP연합으로 DJ가 집권한 것 등을 보면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대의를 역사 속에 각인시키지 못하고 혼재하게 만들었다. 만약 1987년 선거 때 민주화 세력이 단일화를 성사시켰거나 선거에서 이겼다면 민주화 흐름이 역사의 대의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정쩡하게 타협의 산물로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보니 박근혜 정권도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보통 '민주화'라는 단일 목표에만 매달린 경우가 많았다. 나도 마치 좌우의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민주화만 되면 모든 일이 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공동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까 무능과 부패, 도덕성 등이 국민한테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박정희 같은 예전 독재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프레시안 : 민주화 세력들은 김재규를 제대로 평가하지도 못했고, 그를 구명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분열하면서 1987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 다음에 YS의 3당 합당, 이후 DJ의 DJP 연합 등이 민주화 운동의 정통성, 정당성을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 : 민주화 운동의 적통성도 확보하지 못했고 무능만 노출된 셈이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이 사람을 보라> 책에 YS는 있는데 DJ는 안보인다.
김정남 : 1975년 5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김지하는 '양심선언'을 통해 유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해 8월 영어, 일어 등으로 번역돼 일본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이렇게 옥중에서 지식인들이 양심선언을 통해 유신을 부정하고 투쟁하고 있을 때, 김대중이 민주화의 교과서가 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무엇인가를 하길 바랐다. 그래서 김대중에게 편지도 여러 번 보냈다.
전태일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가 창동에 사는데 김문수니 단병호니 하는 노동 운동가들 수십 명이 그 집에 거의 매일 드나들 듯했다. 내 집에 온 손님들인데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이소선 여사는 그 사람들에게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이기 위해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소선 씨는 미군 PX에서 물건을 떼다가 가져다 팔아서 남는 돈으로 운동가들 밥해 먹이곤 했다. 구속자들 가족 일부도 옥바라지를 한다며 이와 비슷한 일을 했다.
그래서 김대중 씨한테 가서 전태일 어머니가 이렇게 애쓰신다고 도와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냉정하게 거절했다. 김대중 씨는 본인이 빨갱이로 몰릴 것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있었다.
이후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만들어서 활동할 때도 김대중 씨는 되도록 하지 말자는 의견을 많이 개진했다. 정권이 폭력적으로 나올 때 맞서면 피해만 본다는 논리였다. 이런 시국에는 일단 몸을 움츠리는 게 지혜라는 주장이었다.
사실 김대중 씨가 민주화 과정에서 본인이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선언한 적은 없다. 오히려 어떤 상황을 돌파한 것은 YS였다. YS는 민주적 신념이라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본인한테 위해가 오는 것에 대해서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반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대중과 유사한 생각은 당장의 난관을 헤쳐나가는데 현명할지는 모르겠지만 올바른 지도노선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김대중 같은 사람들이 앞장서지 않으니까 노동자나 학생들이 희생당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많이 냈다. 당신(김대중) 같은 사람이 앞장서면 방패막이가 돼서 민주화 운동 전체가 일보 전진할 수 있는데, 당신이 매번 이런 식으로 하니까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대중 씨 말대로만 하면 독재 정권에서 민주 진영이 항상 밀리기만 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런데 김대중 씨는 전혀 굽히지 않았다. 아마 전태일 열사 쪽을 비롯해서 당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은 김대중 씨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프레시안 : 그럼에도 1987년 당시 김근태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단체들은 DJ를 지지했다.
김정남 : 김대중 씨는 글로 본인의 의견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 상당한 경륜도 있었고. YS는 약간 단순하고 무식하다는 이미지도 좀 있었다.(웃음)
프레시안 : 김일성이 죽었을 때 조문 파동 사건은 아쉬웠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조문 사절을 보냈는데. 어찌 보면 이게 YS의 한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정남 : 사실 우파가 집권할 때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좋은 측면이 있다. 실제 노태우 정부 때는 상당히 많이 나가지 않았나.
그런데 실제로 이뤄놓은 업적을 보면 YS가 역할을 한 측면이 많다. 단기 필마로 이뤄낸 것들이 많은데, 군부 세력의 힘을 빼놓은 이른바 '하나회' 척결을 비롯해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등등은 YS가 아니었다면 아마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신중한 DJ는 이렇게 밀어붙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정치인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프레시안 : 1970~80년대 대항세력이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이 거의 죽은 것 같다. 요즘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서 1970년대 공화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김종인 씨가 제1야당의 대표가 되고 박정희 정권에서 정치를 시작한 윤여준 씨가 국민의당에 환영을 받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열심히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으로 이를 계승할 세력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서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한국을 이끌어가는 집단으로서의 의미가 거의 없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정남 : 수련을 못한 것이다. 야당에 대해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정치라는 것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자유를 보장해줘야 하는데, 야당에 이럴 능력이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가장 큰 결함인데,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수 있다, 이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왔다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현재 정치인들 중에 손학규 전 민주당 고문이 우리 공동체가 어디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인 같다. 그런데 세력이 없으니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제가 국민후보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인데, 정당에서 내세우는 것보다 국민이 후보를 끌어내서 키우는 운동이 좀 일어나야 하지 않나 싶다.
프레시안 : 386세대 정치인들은 어떤가? 이들이 사실상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대중운동부터 시작해 정치인까지 간 일련의 그룹인데.
김정남 : 박정희 말기에서 전두환 때까지는 독재의 양태가 너무 혹독해서, 가치 측면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느냐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386 정치인들 중 일부는 '종북세력'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거침없는 발언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라도, 386 세력 중에 상당 부분은 잘못 훈련된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에 우리 공동체가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 고민해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부당한 권력에 의해 옥고를 치렀을지는 몰라도,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정치권에는 이명박 정부 때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박근혜 대통령에 아첨하던 사람들, 그리고 386 출신 중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 맞춰 정계에 진출한 이른바 '탄돌이' 등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현재 정치판이 가장 저능하고 저질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는 국회의원이라면 남의 눈이 두려워서라도 신중하게 행동했는데, 요즘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앞뒤 재는 것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절망감 같은 것을 느낄 정도다. 대체 저런 사람들한테서 어떤 정치가 나오겠나 싶다.
제가 보기에는 YS 집권 초기 때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도덕성 때문이었다. '나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고 실천이 뒤따른다면 이걸 가지고 개혁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난 대선 때 그렇게 정치를 개혁하겠다고 국회의원 세비를 깎고 특권을 내려놓고 보좌진 진용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금은 여야 누구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프레시안 : 암울한 상황인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김정남 : 안철수 의원이 탈당 이후 만든 정당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해서 정치 지형을 바꾸는 기폭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제1야당과 누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면 더 나은 정치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건 이미 끝난 것 같다. 이번 총선이 끝나고 난 이후 야권이 통절한 반성을 하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각성을 통해 새롭게 정치 지형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에게 기대를 걸기도 한다.
김정남 : 누구에게 기대를 걸든, 정치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 남북문제, 성장과 분배, 교육, 노동, 외교 등등의 문제를 놓고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반성이 필요하고 도덕성을 채워 나가야 한다. 이번에 야당이 총선에서 져서 그러한 통절한 반성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권은 어떻게 보나?
김정남 : 논리적이나 역사적으로 보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다. 박근혜라는 존재 자체로 국민 통합은커녕 국민이 분열될 수밖에 없는 자기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실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총선이 끝나면 여권 분열이나 레임덕이 오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있지만 고목도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쓰러지는 법이다.
지금 야당이 제대로 하지를 못하니까, 오히려 박근혜가 "야당 복은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박근혜 물러가라고 하면 오히려 박근혜는 공고해지고 물러가라는 사람이 이상해지는 꼴이 되기도 한다.
프레시안 : 1987년 6월 항쟁을 비롯해 한국에서 민주화나 정의를 세우는 주체는 10, 20대 였다. 그런데 요즘 20대는 취직하기가 바빠서, 세대 전체가 도덕성이나 정의, 자유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둔감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라>와 같은 책을 어떻게 봤으면 좋을지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린다.
김정남 :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저절로 온 것이 아니라는 점,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고,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했다는 점을 알고 있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보니 결국 내가 변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젊을 때는 혁명도 생각하고 사회를 바꾸는 것도 생각했지만, 결국 내가 변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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