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홍기'는 특이하게도 한 평범한 '인민'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민당과의 사투 끝에 대륙을 접수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6월 국기와 국가 휘장 등에 대한 도안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를 전국에 공모했다. 석 달 남짓이 걸려 모두 3012개의 국기 도안이 응모됐고, 이 중 38개가 예심을 통과했다. 마지막 후보로 오른 시안은 저장성(浙江省) 루이안(瑞安)이라는 곳에 사는 쩡리안쑹(曾聯松)의 작품이었다.
쩡리안쑹은 갓 스무 살이 넘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지하 혁명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난징 대학교의 전신 중앙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이긴 했지만 당내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던 사람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상하이시 정치협상회의 위원을 역임하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시안 중에는 유명한 인물이 응모한 것도 적지 않았다. 작가이자 혁명가였던 궈모뤄(郭沫若)는 중국 민족의 발상지인 장강과 황하를 상징하는 두 선을 그린 시안을 내놓았다. 마오쩌둥과 혁명을 주도했던 주더(朱德)는 왼쪽 윗 편에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 직사각형과 붉은 별 다섯 개를 그려 넣은 시안을 응모했다. 쩡리안쑹의 시안이 채택된 것은 '인민'을 중시한다는 공산당의 이념을 널리 보여주고 싶었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결정된 중국 국기는 그해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처음으로 게양됐다. 붉은 바탕은 혁명을, 노란별은 중국 민족의 인종을, 작은 별은 각각 노동자, 농민, 소자산 계급, 민족 자산 계급을, 큰 별은 중국 공산당을 상징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혁명과 인민의 대단결을 나타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 국기는 시간이 가면서 세밀한 규정에 의해 게양과 하강 등의 의례를 진행해 왔다. 특히 천안문 광장의 '오성홍기'는 중국 국민의 자존심 역할을 담당했다. 1949년 당시 게양대는 22미터에 불과했으나 오늘날에는 32.6미터로 높아졌고, 게양과 하강 의식을 치르는 인원도 3명에서 36명으로 대폭 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성홍기'는 국민 통합을 위한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오성홍기'도 국가적 인물이 사망한 경우 조기를 게양한다. 그런데 그 역사가 자못 흥미롭다. 처음으로 조기가 게양된 건 1950년 당시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인 런비스(任弼時)가 사망했을 때다. 그 이후 1970년까지 모두 15번의 조기가 더 게양됐는데, 이들 중 1963년 뤄룽환(羅榮桓) 중국 원수(元帥)만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으로 공산 국가의 지도자를 애도한 경우였다.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53년 사망 당시는 물론이고 1954년 사망 1주기에도 조기를 게양했다. 몽골,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베트남 등의 지도자들도 그 대상이었다.
1970년대부터는 저우언라이(周恩來)나 주더, 마오쩌둥, 궈모뤄 등 중국의 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 주로 조기가 게양됐다. 류사오치(劉少奇) 전 국가주석은 1969년에 사망했으나 1980년에 이르러서야 복권되면서 조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이런 관례는 1990년대까지 이어져 오다가 2000년대 들어서는 원촨(汶川) 대지진 희생자(2008년), 아이티 대지진 희생자(2010년), 홍콩 여행객 마닐라 납치 희생자(2010) 등을 위해 조기를 게양했다.
중국의 국기는 국제적 공산당 연대를 중시하던 데서 나아가 자국 지도자를 존중함으로써 민족주의적 단결 심리를 형성하는가 하면, 이제는 평범한 국민과 '조국'으로 귀환한 홍콩인들은 물론, 세계 '인민'들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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