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이 '공포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도한 불안 심리가 확산되는 것을 적극 차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부의 태도는 불안 심리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청와대는 19일 오전, 예정에 없던 이병기 비서실장의 국회 방문 일정을 공지했다. 이 실장과 현기환 정무수석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 국회를 찾아 테러방지법 처리를 압박했다. 이 실장은 정의화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차례로 만난 후 기자들과 만나 "답답한 심경"이라며 "(테러방지법) 법안 처리 협조 요청을 하러 왔다. 법안의 시급성에 대해 말(요청)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정 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청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국정원이 북한에 의한 테러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청와대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전날 새누리당과 안보점검 긴급 당정협의 직후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논평을 냈다. 김성우 홍보수석은 "(지금 북한에서) 정찰총국이 이를(테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북한의 대남 테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국회가 테러방지법을 조속히 통과시켜 줄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당부 드린다"고 국회를 압박했다.
앞서 국정원은 당정협의에서 "납치·테러 대상자 명단에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윤병세 외교·홍용표 통일·한민구 국방부 장관 등 정부 외교안보 핵심 인사들이 포함됐다"는 내용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핵심 및 정부 고위층 납치설을 전 국민에 중계한 것이다.
또한 예상되는 테러 타깃으로 국정원은 지하철, 쇼핑몰 등 다중이용시설과 전력, 교통 등 국가기간시설 등을 지목했다. 모두 일상 생활과 직결된 장소들이다. 테러 유형으로는 반북 활동가, 탈북민 및 정부인사 등에 대한 미행, 종북 인물 사주 테러 등을 언급했다. 사실상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잠재적 테러 분자'로 규정했다. 테러 방식으로는 독극물 테러 등 자극적인 내용을 열거했다. 이런 브리핑은 그대로 새누리당에 의해 언론에 뿌려졌다.
테러 위협의 근거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정찰총국에 사이버테러 등 대남 테러 역량을 적극 결집하라고 지시했다는 국정원의 보고다. 그러나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국정원이 열거한 테러 타깃이나 유형, 테러 방식 등은 일반적인 테러 관련 매뉴얼 수준이다. 첩보 수준밖에 되지 않는 사안을 언론에 공개, 불안 심리를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테러 행위의 특징과, 그 행위로 인해 달성하려는 목적, 그리고 효과를 따져본다면, 북한 지도부가 국지전도 아니고 테러를 노골적으로 지시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참고로 미국은 2008년 북한을 테러 지원국에서 제외했고, 현재까지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하지 않고 있다.
"불안 심리 차단"하라더니, 오히려 불안 심리 부추기는 靑
테러방지법 처리를 촉구하는 근거가 없다보니, 공포심을 조장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국정원은 청와대 핵심 인사 및 장관에 대한 테러 가능성을 넘어, 아예 정부 주요 요인 인신 납치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요인 납치는 남한 내 반군 세력 규모의 단체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야 가능한 일이고, 전쟁, 혹은 내전 상태로 국가 시스템 자체가 붕괴된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과거 국방부 장관 등에 괴서한이 전달된 사례 등은 있으나 정부 핵심 인사에 대한 납치를 시도한 사례도 찾기 힘들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가진 한국에서는 벌어지기 힘든 일이다.
국정원이 전날 당정협의에서 밝힌 테러 대상, 테러 유형 등에 따르면 테러방지법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예상해 볼 수 있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발의해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테러방지법은 테러 대책 활동과 관련하여 기본계획의 수립·시행, 국내외 테러 정보의 수집·분석·작성 및 배포, 테러 징후의 탐지 및 대국민 테러 경보 등 테러관련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국가정보원장 소속으로 대테러센터를 설치(안 제11조 제1항)하고, 대테러센터의 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출입국·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조사할 수 있도록 하는(안 제17조)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국정원장에게 테러 컨트롤타워를 맡기고, 국정원이 통신 정보, 금융 거래 등을 원활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테러방지법 제정 요구가 분출된 계기는 IS 파리 테러 사건 때문이었다. 법안의 애초 목적도 IS와 같은 해외 테러 조직의 국내 입국 및 국내 테러 분자의 자금 차단 등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방점은 '반정부 인사 감시'에 찍혀 있다. 북한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정국을 타 '종북 세력 감시'의 목적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이 당정협의에서 언급한 테러 대상, 테러 유형 등에 따르면 결국 내국인 감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탈북자, 시민단체 등이 주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은 이때문에 내국인에 대한 불심검문이 일상화되고, 카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통신 등이 상시 검열대상에 오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논리가 떨어지다보니 새누리당도 난감한 모양새다. 김무성 대표는 이병기 실장과 면담 후 기자들과 만나 "IS같은 국제 테러단으로부터 국민 보호해야 하고 또 북한이 저렇게 호전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언제 어떤 방법으로 (IS와 같은) 국제 테러단과 손잡고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를 상황에서 국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법"이라고 테러방지법을 설명했다.
법안 취지가 제멋대로 바뀌다보니 "북한과 IS와 같은 국제 테러단과 손잡을 가능성"과 같은 근거 없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결국 국민의 불안만 증폭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날인 17일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경제 위기 상황을 언급한 후 "안보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대내외에 적극 알려서 과도한 불안 심리가 확산되는 것을 적극 차단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스스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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