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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대신 제비뽑기로 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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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회의원, 선거 대신 제비뽑기로 정하자"

[독서통]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 이 말 의심하는 분 있으세요?

선거가 나쁘다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독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타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알리는 뉴스 꼭지를 한번 떠올려 보시죠. 투표율 걱정, 금권 선거 걱정, 흑색선전 비판, 색깔론·지역론 비판이 곧바로 생각나실 겁니다.

나쁜 건 고쳐야지, 선거 자체를 부정하는 건 민주주의 부정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선거가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왔습니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입니다.

이 책은 선거가 민주주의를 오히려 해친다는 내용과 함께, 대안까지 제시했습니다. 추첨제입니다. 간단히 말해, 민의의 대변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소리입니다.

무책임한 말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운영하는 큰일에 어찌 아무나 뽑아 쓴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답니다. 오히려 유권자의 책임감이 커지고, 정치에 대한 현실적 관심이 살아납니다. 책임 정치가 살아나는 대신 정치인의 특권 의식은 사라집니다. 실제 현실 정치에서 작동하는 모델입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녹색당도 대의원 선거에 이런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헌법 개정에도 부분적으로 이 모델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김종배 <시사통> 대표와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독서통'은 16일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를 놓고서 추첨 민주주의 모델을 연구하는 이지문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입니다.

▲ 군 부재자 투표 비리 개혁을 이끈 이지문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선거 수호자, 선거 비판자로

김종배 : 매주 화요일 오후 방송되는 독서통입니다. 설 연휴 때문에 한 주 쉬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무엇인가요?

강양구 : 조만간 선거잖아요? 올해(2016년) 총선부터 시작해서 내년(2017년) 대선까지,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는데요. 마침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나와서 골라봤습니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는 책입니다. 좋은 책을 많이 펴내는 출판사 갈라파고스에서 냈습니다. 원제가 더 도발적이에요.

김종배 : 선거에 반대한다!

강양구 : 네, 출판사에서 원제를 왜 안 살렸는지 궁금할 정도로 도발적인 제목이죠.

김종배 : 저자는 누구입니까?

강양구 : (네덜란드 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지역인) 플랑드르 지방의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작가 겸 활동가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자를 모시지는 못했고요. (웃음) 대신 우리나라에서 '선거'하면 연상되는 분 가운데 중요한 인물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이지문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입니다.

김종배 : 애청자 여러분은 아마 '이지문 중위'로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강양구 : 네. 1992년 현역 장교로서 군 부재자 투표 비리를 세상에 고발하고 수난을 많이 겪으셨죠. 우리나라 공익 제보자의 상징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 뒤에는 공익 제보자를 지원하는 여러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런 활동을 하시면서 정치학을 공부하셨습니다. 박사 학위도 받으셨고요.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고자 그토록 고초를 겪으셨는데, 정작 박사 학위를 받으신 내용은 선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찾자는 겁니다. 이지문 박사께서 수년간 천착하신 제도는 '추첨 민주주의'입니다. 이 주제가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는 책 내용과 공명해서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이지문 중위의 군 내부 고발

1992년 3월 22일, 백마부대에서 복무 중이던 이지문 당시 중위는 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부재자 투표에서 부대 상관이 부하와 병사에게 민주자유당(새누리당의 전신) 후보를 찍으라고 요구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공개 투표를 진행했다는 부정 선거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이 중위는 고초를 겪다가 법정 다툼 끝에 중위로 전역했다.

이 사건으로 입대 전에 예정되었던 삼성그룹 취업은 취소됐다. 이 중위의 고발을 계기로 군대 내에서 시행되던 부재자 투표는 영외 투표로 개선돼, 1992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부정선거 문제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이 중위는 1995년 서울시의원을 지냈으며, 공익 제보자 모임, 호루라기 재단 등에서 시민운동가로 일하는 한편,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이지문 소장님, 어서 오십시오.


이지문 : 예. 반갑습니다.

김종배 : 공익 제보 지원 활동을 계속하고 계시죠?

이지문 : 예. 사단법인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와 호루라기 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종배 : 한편으로는 학문 연구의 길을 걷고 계시고요. 특히 추첨 민주주의를 국내 최초로 주장하셨는데요. 이 추첨 민주주의가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와 연결됩니다.

이지문 : 똑같은 결론이죠. 이 책은 선거 제도 자체가 대의 민주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안으로써 추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로 대표자를 뽑는 방식을 선거에만 의존한다는 걸 문제라고 보았죠. 그리고 그 대안으로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의 원형이었던 추첨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했고요.

강양구 : 선거 제도를 정상화하고자 그렇게 고초를 겪으셨는데, 정작 선거 제도를 회의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이지문 : 제가 부정선거를 고발한 이유는 우리가 잘못 찍은 한 표 때문에 엉뚱한 대표자가 선출되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저 역시 선거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공명한 선거를 하는 게 대표자를 잘 뽑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 이후에 여러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제가 잠깐 서울시의원을 경험해봤어요. 또 정당의 공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회의하게 되었죠. '선거라는 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죠. 그러다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천착한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를 읽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종배 :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의 저자 역시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받은 영감을 기술하고 있죠?

강양구 : 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를 쓴 레이브라우크도 그 책(<선거는 민주적인가>)을 읽고서 받은 충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저자 이름이 '버나드 마넹'으로 소개되었는데요, 사실은 프랑스의 정치학자인 '베르나르 마넹'이 이 책의 저자입니다. 1995년에 프랑스에서 이 책이 처음 나왔고, 1997년에 미국에서 영어판이 나왔죠.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는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죠. 마침 베르나르 마넹이 미국 뉴욕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라서 '버나드 마넹'이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소개되었고요.

▲ 선거는 유권자를 정치에서 배제하는 장치?! ⓒwikipedia.org

선거는 민주주의의 적?

김종배 : 이제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죠.

이 책은 우선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이라는 광범위한 정치 불신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 원인을 찾는 데서 시작합니다. 정치인이 문제인가? 민주주의가 문제인가? 대의 민주주의가 문제니 직접 민주주의가 답인가? 여러 후보를 하나씩 짚다가 결국은 정치인도 민주주의도 대의 민주주의 그 자체도 문제의 원인은 아니라고 결론내리죠.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를 선거와 등치하는 고정관념이야말로 문제의 진짜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지문 소장께서도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하세요?

이지문 : 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홍보하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학교에서도 초등학교부터 선거로 반장을 뽑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민주주의=선거'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국회의원이나 정당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선거 제도 자체를 바꿔보자는 생각은 못 합니다.

김종배 : 선거가 얼마만큼 잘 관리되느냐, 모든 포인트가 여기에 맞춰졌었죠. 그런데 설사 선거를 잘 치른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는 거죠?

이 책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했던 유명한 말의 본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영국 인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한다.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단지 의회 구성원을 뽑는 선거 기간뿐이다. 일단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영국 인민은 노예가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저는 이게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의 기만성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루소가 제기한 문제의식의 본질은 선거 제도 자체가 가진 한계였습니다. 루소도 선거가 곧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에서는 제비뽑기, 즉 추첨으로 선거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강양구 : 책을 읽은 분은 아시겠지만, 여기서는 왜 선거가 문제인지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지문 : 올해 국회의원 선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선거가 두 달도 안 남았는데, 아직 선거구도 획정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런 문제가 정치인, 정당만의 문제일까요? '주권자에게 자유가 없다'는 루소의 이야기에서 본질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루소가 말한 자유, 그리고 고대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유'는 '자기 통치의 자유'입니다. 내가 직접 내가 속한 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빌리자면 '오늘은 내가 지배하고, 다음날은 지배받는' 겁니다. 다스림을 교대로 한다는 게 이들이 말하는 자유의 의미입니다.

당장 보기에는 우리의 선거 제도가 만 25세가 넘으면 누구나 출마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까? 지금 우리의 국회를 보면 고학력자, 속칭 좋은 대학을 나온 교수, 검사, 변호사와 같은 엘리트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노동자, 농민, 주부, 젊은 세대의 목소리는 국회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자기 통치의 자유를 잃어버렸죠.

김종배 : 이 책의 한 구절이 참 인상적입니다.

"선거에서 뽑힌 선량들을 경멸하면서도, 선거 자체만큼은 숭배하는 이율배반."

이지문 : '추첨 민주주의'라는 말을 저와 손우정 새세상연구소 연구원이 처음 썼습니다. 미국 하원을 추첨제로 바꾸자는 내용을 담은 외국책이었는데, 책 제목이 우리말로 하면 '시민 의회' 정도가 되었죠. 저희가 그 책 제목을 <추첨 민주주의>(마이클 필립스·어니스트 칼렌바크 지음, 이지문·손우정 옮김, 이매진 펴냄)로 바꿨죠.

우리 사회를 보면, 보수나 진보 가릴 것 없이 추첨 민주주의에 냉소적입니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술자리에서 국회의원을 안줏거리로 삼지만, 막상 국회의원을 추첨으로 뽑자고 하면 "말이 되는 소리냐" 하기 마련입니다.

강양구 : 이 책은 좋은 정치를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으로 정당성과 효율성을 제시하더라고요. 그 기준에 따라서 우리나라 정치를 한 번 따져 보았어요. 일단 효율성 면에서는 꽝이죠. 선거 두 달 전까지 선거구도 제대로 정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합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건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드러나죠.

그렇다고 정당성은 있느냐? 투표해서 뽑힌 국민의 대표니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회의적입니다. 새누리당이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출신성분을 살펴보면, 보통 사람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슈퍼 엘리트가 다수죠. 그들이 과연 보통 사람을 대변하는 정당성을 갖고 있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종배 :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내홍을 겪고, 수습 과정에서 외부 영입이 이뤄지고 있죠. 보수 언론을 보면 '결국 운동권 영입이냐'는 식으로 공격 지점을 찾아요.

이런 색깔론에 현혹되는 사람이 많겠습니다만, '운동'을 시민 사회에서 보통 사람과 같이 뭔가를 개선하려고 현장에서 뛰는 일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치권에 들어가야죠. 이른바 테크노크라트, 전문가도 필요하지만, 정치의 본령은 보통 사람이 시민의 대변자로서 일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지문 : 우리나라 국회의원 절반 이상이 서울대 출신입니다. 연세대, 고려대까지 넓혀보면 그 비중이 더 커지겠죠.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 나온 사람, 국민 다수가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자가 국회의원이 되는 거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엘리트가 국회의원이 되게끔 하는 선거가 과연 정당한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에는 유럽 사례가 나옵니다만, 우리나라 투표율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이 겨우 50%를 넘었습니다. 유권자 둘 가운데 한 명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죠. 유권자 50%가 투표한 사람 가운데 고작 30~40%를 득표한 사람이 당선되죠. 전체 유권자 넷 가운데 한 명 정도의 지지를 받고도 국회의원이 된다는 겁니다. 특히 재·보궐 선거 투표율은 10%대로 떨어지잖습니까. 과연 이런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는 것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대표성 면에서도 국회는 문제가 많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국회의원이 없잖습니까? 노동자 출신, 농민 출신 국회의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업가 출신 국회의원은 당연히 법안을 만들 때 노동자 편에서 만들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입맛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만들기 때문에 대표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효율성 면에서도 마찬가지죠. 보통 사람과 다른 초엘리트로 구성된 국회인데,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아무나 국회의원 돼야 한다

강양구 : 그런데 추첨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반대 논리가 '아무나 국회의원 되면 나라가 엉망 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개'나 '소'나 아무나 하면 되겠느냐고요.

김종배 : 얼마 전 국민 참여 재판 배심원 제도 논란 때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죠. 법을 모르는 일반 시민이 판결에 참여하는 건 문제 있는 것 아니냐는 거죠.

강양구 :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을 정치 엘리트들이 입에 달고 살면서도, 속으로는 일반 시민을 '개'나 '소'처럼 생각하는 거죠. (웃음) 보통 사람을 자신과 같은 지위로 생각지 않고요.

이지문 : 국민 참여 재판 제도가 2008년부터 도입됐는데, 이 제도의 결과를 보면 엘리트주의만이 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대법원 조사 결과를 보면, 배심원 판결과 판사 판결이 91% 정도 일치합니다. 더 재미있는 결과가 있는데요, 2심 파기율을 보면 배심원이 참여한 재판보다 1심에서 판사가 내린 재판이 더 높습니다.

국민 참여 재판 제도에 참석한 사람들의 설문을 보면, 참석 전에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법 집행에 참여하겠느냐'며 거부감을 가졌다는 대답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경험해 보면, 공적인 일에 참여한 데 자부심을 느끼고, 기회가 된다면 또 참여하고 싶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직접 참여가 민주주의의 훌륭한 교육이 되는 거죠.

우리가 중요한 점 하나를 착각합니다. 국회의원은 전문가여야 한다는 겁니다. 의학박사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의학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있겠죠. 그러나 그가 남북문제, 실업 문제, 복지 문제 전문성을 가지지는 않겠죠?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도 결국은 자기 영역 밖에서는 보통 시민일 뿐이죠.

김종배 : 더구나 전문성은 이해관계에 얽히는 족쇄가 될 수도 있죠. 당장 이 책에도 전문성의 함정을 지적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선거로 뽑히는 국회의원은 또 얼마나 전문적인가요?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을 만나보면 우리나라처럼 행정부 우위인 나라가 흔치 않다고 합니다. 국회가 행정부와 만나면 판판이 깨지죠. 그 주된 이유가 정보 부족이라는 겁니다. 정부는 부처별로 산하 연구기관 여럿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탄탄히 구축된 정보 인프라에서 실탄이 계속 공급됩니다. 그러니 기껏해야 몇몇 보좌진을 거느린 국회의원이 상대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입법부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문가 국회의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입법부 기능을 보좌할 수 있는 정책, 정보 제공 부문이 강화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국회에 입법조사처, 예산정책처 두 곳이 있지만, 이 두 곳으로도 턱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입법부에 그렇게 정책, 정보 제공 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지금의 엘리트 국회의원이 아니라 추첨으로 선출된 시민 국회의원이 그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는 식으로도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전문성을 들어서 추첨제를 반대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죠.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를 보면서 우리의 편견 하나가 깨지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 그렇죠.

"제비뽑기는 민주주의이며, 선거는 과두정이다."

또 선거 제도의 역사가 오래됐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선거는 시민 혁명 이후 배신의 역사"일 뿐이라고 합니다. 특히 미국에서요. 기껏해야 200년밖에 안 된 제도죠.

▲ 추첨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에서 훌륭히 작동한, 민주주의의 원형이다. ⓒwikipedia.org

추첨해야 민의가 반영된다

강양구 : 실제로 선거 제도 도입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 정작 민주주의자라기보다 민주주의를 싫어한 자들이었죠.

김종배 : 미국 독립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던 사람들, 정치학에서 민주주의의 원조로 이야기되던 사람들이 사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배신한 사람들이었죠. 재미있는 포인트예요.

이지문 : 제가 2008년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책을 보고 큰 지적 충격을 받았다고 얘기했죠. 그간 배워온 교과서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 제비뽑기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배운 건 아테네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였고, 시민이 민회에 모여서 의사를 결정했다는 정도였어요.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대의제 민주주의로 이행했다는 거죠.

강양구 :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직접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이야기하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사실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였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와 달랐던 점은 민회에 참석하는 시민, 행정에 참석하는 시민 등을 전부 다 제비뽑기로 뽑았다는 겁니다.

이지문 : 좀 더 설명해 봅시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게 민회입니다만, 당시 전체 시민은 3만 명 규모였습니다. (물론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은 그 시민에 포함되지 않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회 의석은 6000석밖에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도 전체 시민의 5분의 1 정도만 모여서 의사 결정한 거죠. 대의제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지금과 다른 결정적인 점이 있습니다. 민회는 자원이었지만 민회에 법안을 제출하는 500인 평의회, 지금의 법원과 헌법재판소 기능을 결합한 시민 법정, 그리고 600여 명의 행정관을 다 제비뽑기로 추첨했다는 겁니다. 다만 군사, 재무 담당 등 소수의 전문가 100명 정도만 선거로 뽑았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추첨뿐만 아니라 선거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테네 사람들은 100명만 선거로 뽑고 나머지는 다 추첨을 했느냐는 거죠? 당시 아테네도 지금과 유사한 문제점을 이미 알았던 거죠. 선거하면 돈 많은 사람에 의한 금권 선거가 횡행하고, 이름이 알려진 유력 가문 출신만 대표가 될 거라는 것을.

추첨 제도, 과연 가능한가

김종배 : 이 책이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이유는 추첨 민주주의를 이론에 한정하지 않고 실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는 예를 여럿 제시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고정관념 때문에 추첨 민주주의가 실제 작동한다는 걸 믿기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문제 제기는 이런 거겠죠. '그게 가능할까?'

이지문 : 저는 한국 사회에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 40대 이하 대부분이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학력이 가장 높고,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또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이 있습니다. 더구나 시민의식도 이제는 높은 수준으로 올라다고 봐야죠.

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 결정 과정, 합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각자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 끝에 하나의 결정을 이뤄나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수의 의견도 받아들이고, 최종적으로 합의된 결과에 승복해야죠. 이게 바로 민주주의 문화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이 다양한 공간에서 참여할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참여할 기회는 투표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관심이 없어지죠. 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추첨제를 통한 참여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루소가 말한 것처럼, 좋은 제도가 좋은 덕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강양구 : 우리나라 시민은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정치하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드물죠. 정치는 이른바 '직업 정치인'만 하는 거로 생각하죠. 예를 들어 제비뽑기로 2년에서 3년 정도 국회에서 직접 정치를 할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다면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이 정치를 바라보게 되겠죠. 그렇게 직접 정치를 경험해본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 거고요.

김종배 : 국가적 차원에서의 제비뽑기, 추첨 민주주의를 생각하면 그림이 잘 안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모델을 제시하죠. 당장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는 방식을 폐기하자는 게 아닙니다. 양원으로 가면서 하원은 제비뽑기로 구성하고, 상원은 선거로 뽑을 수도 있죠. 아니면 특정한 행정 구역에서만, 우리나라로 치면 기초의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할 수도 있죠. 한번 실험해 볼 만합니다.

강양구 :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직 선거구 획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기 때문이죠. 선거관리위원회나 교수 같은 전문가 권고안을 내도 국회의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거구 획정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구성원을 제비뽑기로 뽑아서 이들이 전문가와 정치인의 조력을 받아서 선거구 획정(안)을 내놓으면 정당성도 있고, 국회의원도 수긍할 수밖에 없죠.

이지문 : 실제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선거 제도를 바꾸기 위해 추첨으로 시민 160명을 뽑아서 1년 가까이 운영한 사례가 있습니다. 선거구 획정, 선거 제도와 같이 민감한 문제의 경우 추첨을 통한 시민 총회를 만들어 최소 선거 1년 전에 규칙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선거 두 달을 앞두고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세요.

김종배 : 추첨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문제 제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른바 보수 성향, 아니면 진보 성향 사람만 무더기로 추첨될 수 있고, 특정 계층 사람만 무더기로 추첨이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이지문 : 그런 가능성은 선거가 훨씬 크죠. 세대별, 계층별로 다른 투표율을 떠올려 보세요.

강양구 : 많은 통계학자나 전문가가 여론 조사를 신뢰합니다. 통계 기법이 발전하면서 충분히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표본을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라면, 여론 조사에서 습득한 노하우를 통해서 가능하면 계층, 세대, 지역, 직업 등 다양한 시민을 제비뽑기로 뽑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이지문 : 한 자기 짚고 넘어갑시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국회의원 후보나 대통령 후보를 뽑을 때 여론 조사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제비뽑기는 안 됩니까? (웃음) 말씀하신 대로 여론조사 기법을 활용해서 계층별, 지역별, 연령별, 직업별, 성별 차이를 고려해서 추첨하면 됩니다.

국민 참여 재판 제도는 무작위거든요? 그런데 2~3년 지나서 참석자 통계를 돌려보면 거의 비슷해집니다. 성별도 5대 5에 가까워지고, 연령대도 인구 통계에 근사치로 갑니다.

누군가는 추첨제를 하다가 히틀러와 같은 자가 대표자가 되면 큰일 아니냐고도 합니다.

강양구 : 아돌프 히틀러를 대표로 만든 게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선거였죠! (웃음)

이지문 : 추첨하더라도 당연히 최소한의 기준은 갖죠. 지금도 피선거권 제한은 두잖습니까? 추첨 민주주의를 시행하더라도 당연히 최소한의 제한 기준은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도 유능한 사람도 있고, 반대도 있습니다. 양자가 서로 보완하면서 평균에 수렴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지금 국회는 엘리트, 사법 고시 출신 같은 비슷한 사람만 모였기에 결정에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이 모여야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추첨 민주주의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도입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양원제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있지 않습니까? 이때 상원은 선거로 하고 하원은 추첨으로 하는 식으로 구성하면 지금보다 훨씬 견제의 원리가 잘 작동할 것이고, 민의가 잘 반영될 수 있습니다.

지방 의회는 가능성이 더 큽니다. 지금 우리의 지방 선거 제도는 모든 지역이 같습니다. 특정 지방자치단체가 "우리는 비례대표를 추첨으로 뽑겠다"는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는 게 오히려 지방 자치 정신에 부합할 수도 있습니다.

추첨제를 운용하는 다양한 아이디어

▲ 추첨제는 현실 정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지문 :
지금 국회의원이 왜 제대로 못 할까요? 국회의원이 좋은 정책,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게 표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당장 자기 지역구에 가서 악수하는 게 표가 되기 때문에 굳이 입법 활동에 열과 성을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양구 : 국회의원 아래 보좌진이 8~9명 된다면, 그중 상임위원회 활동을 보좌하는 보좌진은 고작 소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지역구 관리, 미디어 관리에 더 집중하죠. 왜냐하면,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 데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제비뽑기로 국회의원을 뽑되, 역임한 이는 재임하지 못한다는 단서가 있다면 그 국회의원은 임기 동안 선거는 신경 쓰지 말고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죠.

이지문 : 이 대목에서 추첨에 대한 다른 반론 한 가지를 더 살펴보죠. 책임 정치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선거로 뽑히는 정치인은 재선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비뽑기로 국회의원이 된 이가 책임감을 느끼겠느냐는 거죠.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드린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선거 개혁 시민 총회가 1년 가까이 운영됐어요. 그런데 160명 가운데 한 명만 중도 사퇴했고, 평균 출석률은 95%였습니다. 시민에게 정치 참여 기회를 주지 않고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오히려 지금 국회 본회의장을 보십시오. 지방 의회를 보십시오. 텅텅 비어 있잖습니까?

김종배 : 이 책도 여러 의혹을 놓고서 효과적인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생업을 포기하라는 말이냐"는 반론에는 대우를 제대로 해 주면 된다는 겁니다. 국회 정원이 300명이라면 300명을 일거에 뽑지 말고, 100명씩 차례로 뽑아서 경험을 처음 해보는 데서 생기는 오류를 극복할 수도 있죠.

지금 문제는 "우리가 한 번 (추첨 민주주의 운영) 해보자"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거겠죠.

강양구 : 상상력이 꼬리를 무는데요. 만일 양원 체제를 구성해서 제비뽑기로 구성했는데 정치인으로서 특출난 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공장 노동자였는데 국회에서 일을 해보니 노동자를 비롯한 보통 사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누구보다도 더 열성적인 정치인으로 일을 잘해낸 거죠.

그렇다면, 이런 분은 아예 직업 정치인이 될 수도 있겠죠. 추첨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정치 신인 발굴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심하면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기인이 되면 곧바로 정치인 후보가 되잖아요? 지금의 정치인 선발 과정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죠.

이지문 : 그렇죠. 제비뽑기 제도 도입과 함께 일종의 시민 정치 대학을 상설화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죠. 제비뽑기로 누군가가 국회의원에 뽑혔다면 그런 기관에서 일정 기간 훈련받을 수 있겠죠. 지금도 초선 국회의원 가운데 국회 운영 방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경험 많은 보좌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추첨제 + 선거제

김종배 : 추첨 민주주의, 제비뽑기 민주주의를 계속 파고들다 보면 근본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정당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정당 체제는 선거 제도를 전제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 추첨 민주주의가 전면화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정당이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이지문 : 저는 입법부는 추첨하되,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 기관의 장은 선거 제도로 뽑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대통령은 한 명이기 때문에 그 한 명이 추첨으로 뽑힌다면 정말 엉뚱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행정부와 입법부의 견제를 위해서도 이런 방식이 필요하고요.

지금의 지방을 보면 상호 견제가 되지 않잖습니까. 같은 당 출신이 지방자치단체장과 의회를 장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방자치단체장은 정당 출신이 선거로 뽑히더라도, 의회는 제비뽑기로 구성된다면 제대로 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구현되겠죠.

강양구 :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도 국방이나 재무 담당 전문가는 선거로 뽑았었죠.

김종배 : 그런 식으로 정당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겠군요.

이지문 : 예. 또 하나 유념해야 할 게, 예를 들어 제가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A 정당을 지지하지만, 환경 문제에서는 B 정당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이 다양한 사회에서 한 정당이 특정 시민의 의견을 모두 대표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착각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정당 체제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합니다.

김종배 : 이건 대한민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세계적 추세인데, 정당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정당 체제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 원조인 유럽에서 오히려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거든요. 그런데 대한민국 정치는 모든 게 정당이 기준이라는 사고가 거의 당위론 비슷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강양구 : 그리고 현실에서는 정작 정당 체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고요. 분명히 변화가 필요합니다.

지방의회부터 추첨으로

김종배 : 이지문 소장께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추첨 민주주의로 학위 논문을 쓰셨잖아요? 만일 소장께 모든 전권을 준다면 '이 부분은 바로 추첨 민주주의를 시도해볼 수 있겠다' 싶은 곳이 있나요?

이지문 : 현재 국회의원 선출 방식은 헌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습니다. 헌법에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선거가 명시돼 있으니까요. (대한민국 헌법 제41조 ① 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지방 의원 선출은 지방자치법만 바꾸면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법률만 바꾸면 바로 제비뽑기할 수 있다는 거죠. 지방자치단체 중 한 곳이 "우리 비례대표는 제비뽑기로 하겠다"는 식으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생활 정치인 기초 단체에서부터 충분히 추첨 민주주의 방식을 도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강양구 : 그런데 도대체 추첨이 사라진 진짜 이유가 뭡니까? 진짜로 소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인가요?

이지문 : 이 책에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유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중요한 이유입니다. 추첨하나 선거하나 내가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 무슨 제도를 운용하든 사람들에게 안 와 닿겠죠?

제가 국회의원, 지방의원 재직 기간을 2년으로 가정하고 평균 연령을 80세로 가정해 단순 통계를 내봤더니, 추첨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의원으로 뽑힐 확률이 0.2% 정도입니다. 의원으로 뽑힐 확률이 로또 수준으로 되어 버리면 '내가 되든 누가 되든 마찬가지지' 하며 관심이 떨어지게 됩니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는 이런 문제를 놓고서 제비뽑기로 구성할 수 있는 6가지 기관을 나누고, 이들 기관 구성원의 상당수를 제비뽑기로 구성하자는 대안을 소개합니다. 의제 결정 기관, 이익집단 대표 기관, 검토 기관, 정책 심사 기관, 규정 심의 기관, 감독 기관을 모두 제비뽑기로 구성하자는 거죠. 이러면 제비뽑기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커지죠.

제가 번역한 <민주주의 구하기>(케빈 올리어리 지음, 글항아리 펴냄)를 보면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선거구마다 100명씩을 (추첨으로) 뽑고, 이들이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돼 '(상원, 하원에 이은) 제3원'을 만들자는 대안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도 내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확률이 훨씬 커지는 거죠.

저는 이런 아이디어도 생각해 봤습니다. 국회의원을 뽑을 때 같이 일할 사람도 함께 추첨으로 뽑는 방안도 고려해 봄 직하죠. 아무튼 제비뽑기 방식을 놓고서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만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예전 노동자, 여성, 흑인에게 선거권을 주자는 목소리에 미친 소리라고 반응한 것과 같다고 봅니다.

강양구 : 책을 안 읽은 청취자께서는 여전히 추첨 민주주의를 놓고서 '무슨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그런데 이 책에 보면 아이슬란드의 사례도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추첨으로 뽑은 시민위원회가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전문가, 정치인과 진행하고 있지만, 주력은 제비뽑기로 뽑힌 시민들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열고 상상력을 발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멋진 사례가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거죠.

고정관념을 깨자

▲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김종배 :
이 책을 보면 정치적 고정관념을 깨는 여러 내용이 있어요. 분명한 것은 선거 대의 민주주의가 가진 본질적 한계가 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써 민주주의의 원형인 추첨 민주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초적인 인식 공유가 넓어진다면, 실험적으로 시행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은가.

강양구 :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 저자는 정치학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민운동가라고 할까요? 적극적인 보통 시민의 관점에서 지금의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고민하다가 쓴 책이라서, 자기가 공부한 과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고민을 한 번 따라가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종배 : 오늘은 이지문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을 모시고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는 책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강양구 : 세계적으로도 드문 추첨 민주주의 전문가이기도 하시죠. (웃음)

김종배 :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문 :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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