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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월호 이후'를 개척하지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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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월호 이후'를 개척하지 못하나

[건축신문] 세월호 사태, 그 이후

① 재난, 이 말 하나를 곰곰이 살펴보고 싶다. 먼저, 이 말은 왜 필요할까. 아마도 사고, 사건이라는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사태를 가리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재난(disaster)의 어원은 '잘못된dis- 별astro', 즉 별의 불길한 모습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비롯된 해로운 무엇. 재난에는 어떤 운명론적 뉘앙스도 가미되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재난은 대체로 "특별하고 예기치 못한 자연적․인위적 원인에 의해 인간의 사회생활과 인명이 급격히 교란되고 피해를 입는 경우 그 원인과 결과"라고 정의되고 있다. 덧붙여 자연재난으로는 지진, 해일, 홍수, 가뭄 등이, 인공재난으로는 방사능 오염, 기름 유출, 전력 마비, 폭발 사고 등이 통상 열거된다. 이런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재난의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 돌발성, 피해의 심각성이다. 이것이 확실히 재난에 관한 상식일 것이다. 자, 위의 세 가지 특징을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자.

▲ 서울 광화문 광장 한 켠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 ⓒ프레시안(최형락)

첫째, 예측 불가능성이다. 재난은 예기치 않게 엄습해오는가. 분명 재난이 언제 일어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재난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은 예상할 수 있다. 어디서 일어날지는 알기 어렵지만, 어떻게든 일어나리라는 것만은 자명하다. 이제 재난은 밖에서 닥쳐온다기보다 안에서 배양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원인이든 인위적 원인이든 그것이 재난으로 치닫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축적된 탓이다. 2008년 8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쓰촨성 대지진은 진앙지 주변에 있던 지핑푸 댐의 물 무게 때문이었다. 2011년 3월 11일의 지진과 쓰나미는 후쿠시마 사태로 번져 재앙을 초래했다. 지금 겪는 남한 하천의 생태 변화는 4대강사업이 만들어낸 재난이다. 그 안의 베스는 이윤을 탐하다가 저지른 작은 종말이다.

매일 새벽 골목으로 흘러넘치는 막대한 쓰레기에서는 차곡차곡 갖춰져 가는 재난의 조건이 보인다. "관측사 상 최고"를 어느덧 매해 되풀이하는 기상캐스터의 말에는 재난의 도래가 들린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과 인간을 끝없이 빨아들여 가동되더니, 이제 자기 붕괴를 양식으로 삼아 죽음을 연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진, 해일, 태풍 등 천재지변과 빈부격차, 난민화, 테러, 폭동, 범죄, 전쟁 등 사회 문제가 복합적이고 연쇄적으로 결합해 더욱 새롭고 강력한 재난이 출현하고 있다. 재난은 예측 불가능할지언정 예외적이지 않다. 장기지속적 차원의 구조적 위기다.

둘째, 돌발성이다. 재난은 불현듯 닥쳐오는가. 현상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현상이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 대표 지식인들이 3.11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태에 대해 얘기한 <사상으로서의 3.11>(그린비 펴냄)에서 '원전에서 봉기로'를 쓴 히로세 준은 현실을 두 층위로 나눠서 접근한다. 정지와 운동, 안정과 불안정처럼 대비해 파악할 수 있는 현세적(現世的) 현실과는 별도로, 힘과 에너지로 구성되는 잠세적(潛勢的) 현실이 있다. 가령 물이 응고점인 섭씨 영도 아래로 냉각되었는데도 고체화되지 않고 액체 상태로 머무는 때가 있다. 이처럼 전이점을 지나도 상전이(相轉移)가 일어나지 않을 때의 상태를 준안정(metastability)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응고점 아래서도 액체로 머물던 물은 미미한 외부 자극에도 즉시 빙결한다. 눈사태를 떠올려보자. 눈사태는 경사면 위에 쌓여 멈춰 있던 눈이 외부에서 진동이 조금 가해지자 한꺼번에 쏟아지는 현상이다. 여기서 과냉각수와 경사면 위의 적설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잠재적 에너지의 과포화라는 문제를 품고 있었다. 외부에서 자극이 주어져 이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때 빙결, 눈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진과 해일 역시 현상적으로는 문제의 발생이지만 문제의 해결이기도 하다. 지진은 지각 사이, 해일은 물결 안에 자리한 문제의 해결이다. 어느 경우든 잠세적 현실에서 잠재적 에너지의 과포화가 현세적 현실에서 상전이라는 형태로 해소된 것이다.

하지만 잠재적 에너지의 과포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시적 해소에 그친다. 더구나 잠재적 에너지의 과포화가 구조적으로 양산되어 일어나는 인공재난은 일시적 해소일뿐이다. 문제의 발생이라고 여긴 재난이 실은 문제의 해소이고, 더구나 일시적 해소이며, 과잉된 문제는 미해결인 채 지속된다. 달리 말해, 재난은 돌발적으로 닥쳐온 뒤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생산되어 불현듯 표출되지만, 이번 재난은 다음 있을 재난의 징후이자 미열이다. 재난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피해의 심각성이다. 재난은 여느 사고, 사건 이상의 큰 피해를 야기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재난이 외부에서 닥쳐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일어날 것이라면 피해의 심각성은 어떠한 시간대에서 측정해야 할 것인가. 흔히 재난은 단시간에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사태를 일컫는데, 그렇다면 그 자체로는 당장 별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피해를 양산하는 사고, 사건은 재난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 각도에서 오늘날 재난의 관건적(關鍵的) 속성은 불가역성일 것이다. 아무리 엄청난 태풍이라도 그로 인한 피해가 후쿠시마 사태보다 심각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워졌다. 후쿠시마 사태가 여느 재난과 달리 인류사적 재난인 까닭은 당장 초래된 피해의 규모 이상으로 그 불가역성에 있을 것이다. 어떤 문이 열리고 만 것이다. 후쿠시마 사태는 지진, 쓰나미, 그리고 방사성 물질이라는, 말 그대로 땅, 바다, 하늘에 걸친 것이었으며 언제가 이 사태의 끝인지 알 수 없다. 임계점을 넘어 일어났으며, 그렇다면 앞으로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와 도무지 견줄 수 없고 당장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임계점을 넘어선 불가역적 사건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내게 이 사건들은 양이 아니라 질의 차원에서 재난적이라고 여겨진다.

지난해 있었던 일이다. 한 여고생이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친구와 짜고 평소 알고 지내던 지적장애인 남성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다. 여관으로 유인해 성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사진을 찍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으나 응하지 않자, 여관방에 가두고 옷을 벗겨 그의 성기를 옷걸이로 때리고 항문에 칫솔을 꽂고 커피잔에 침을 뱉고 담뱃재를 넣어 마시게 했다. 실신하자 담뱃불로 팔을 지졌고 끓는 물을 배에 부었다. 의식을 잃은 그를 장기매매업자에게 팔려고 차에 싣고 다녔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여중생은 자신들의 성매매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선배를 붙잡아다가 냉면 그릇에 부은 소주를 먹이고는 구토를 하면 그 토사물을 다시 먹였고, 화분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사망하자 시신을 불태운 뒤 시멘트로 묻었다.

이 사건들을 접하며 무언가가 부러졌다고 느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떠든 것처럼 여중생, 여고생이 저지른 범행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언론이 표제로 '평범한 여고생', '어린 여고생'을 운운하고는 기사에서는 학생 비행, 청소년 문제, 흉악범죄라는 말로 덧칠하는 방식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어리고 평범한 여학생이 저지른 범행"이라며 예외적 사건으로 포장하고는 익숙한 용어들로 통례화한 것이다. 끔찍한 희생이 생겼으나 가십거리 이상의 무엇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지 못할 만큼 평범하거나 어리지 않았나 보다. 아니,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평범하고 어린 누군가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드러난 눈사태와 같다. 이 사건과 비슷한, 거기에 준하는 폭력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양산되고 있다. 층간소음으로 이웃을 살해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도, 맹목적 파괴충동이 '묻지마 범죄'라고 활자화되었을 때도 곪은 게 터져 나왔구나 싶었다. 이후로 그런 보도는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제 별스런 뉴스거리도 되지 않고, 나는 무뎌졌다. 이 사건들은 여느 재난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이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만든 조건은 불가역적이고 심각한 것이다.

나는 이런 사건들까지 재난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재난의 재정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장의 피해 규모로만 재난과 사건을 가르면, 사건은 피해가 대단치 않으니 심각해 보이지 않고, 재난은 머잖아 지나갈 일이니 주목할 일이 못 된다. 그래서 양자 모두가 보이지 않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일간베스트'(일베)는 고모라다.

▲종이 나비와 촛불을 든 세월호 유가족. ⓒ프레시안(최형락)

② 심각한 재난, 참혹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언론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과연 그랬던가. 단 한 번이라도 그 적나라함을 온전히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그 경험을 하고서도 저 상투구는 이토록 번번이 등장할 수 있단 말인가.

재난은 끊임없이 연쇄한다. 우리는 재난의 막간극을 살아간다. 분명 우리는 다가올 어떤 재난 이전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겨났던 어떤 재난 이후를 살고 있는지는 사실상 의심스럽다. 종지부(마침표)를 경험하지 못한 채 휴지부(말 줄임표) 만이 잔뜩 쌓인다는 느낌이 드는 자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사태를 말하자. 우리는 세월호 사태 이후를 살고 있는가. 세월호에서 있었던 일만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로부터 파생된 일, 드러난 일을 가리켜 세월호 사태라고 한다면 세월호 사태는 결코 끝난 것 같지 않다. 대체 언제부터가 그 이후일 것인가. 세월호가 인양되고 시신이 수습되면 이후가 되는가. 유족들 모두에게 보상금이 지급되면 이후가 되는가. 유족들이 광화문에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이후가 되는가. 아직 그러한 최소한의 이후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만이 세월호 사태 동안 우리가 바랐던 이후는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이제 세월호 사태 이후, 아니 세월호 사태 이후마저도 끝나버린 이후의 이후인 것 같은데, 그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있었던가. 세월호 사태야말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그 적나라함을 겪고 그로부터 무엇을 얻었기에 이후일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세월호 사태 이후에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세월호 사태 이후를 개척해낸 것이 아니라 세월호 사태가 우리에게 과거지사가 되었을 뿐이다. 재난은 닥쳐왔다. 재난 이후도 망각과 함께 번져왔다. 재난과 마찬가지로 재난 이후도 주어졌다.

재난 이후를 열어내지 못한 우리는 재난 이전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반복하지만, 앞선 재난은 다가올 재난의 선례요 예표다. 이윽고 재난은 이름을 달리해 찾아올 것이다. 이 사회는 단 한 번이라도 그 병폐와 모순이란 것을 끝까지 응시할 수 없는가. 희생을 끝 간 데까지 새겨 이후를 열어낼 수 없는가. 세월호 사태에서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대체 얼마나 더한 재난과 희생을 기다려야 그 과제에 나설 수 있는가. 재난에는 찾아 나서야 할 사회의 이미지, 미래의 조짐이 있다. 우리는 여러 차례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경험은 왜 축적되어 재난 이후를 개척하지 못하는가. 재난의 반복보다 이 무력함이야말로 지겹고 쓰라리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이 2012년 창간한 계간 <건축신문>은 건축의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논의들을 균형 잡힌 눈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특정 이익 대변이나 건축 내부만의 닫힌 소통을 지양하고, 시각예술, 디자인, 공연예술 등 다양한 분야와의 교류로 건강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소통의 창구로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가기 : 정림건축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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