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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 아파트를 어떻게 2억만 주고 내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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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 아파트를 어떻게 2억만 주고 내쫓나

[기고] 가짜 사실주의가 만들어낸 사실

은평뉴타운이 다시 '재개발'에 들어간다. 뉴타운 들어선 지 엊그제인데 다시 또 재개발이다. 45평 이상 되는 대형 평수만의 재개발로 9개 동이 철거될 예정이다. 서울시는 개발독려를 위해 이태 전에 이미 고도제한을 해제한 상태다. 그 자리엔 25평형 40층짜리 11개 동이 들어선다고 한다. 벌써 분양문의가 빗발치고 있지만 원주민들의 반발이 만만찮다. 원주민대책위원회 이치수 씨의 말이다.

"처음엔 25평형 아파트 두 채씩 돌아온다고 쾌재를 불렀다. 너도나도 조합설립에 참여하고 재개발에 동의한 이유다. 하지만 1차 감정평가서 받고 정신이 들었다. 4년 전 입주할 때 이 아파트 분양가가 4억5000만 원이었다. 2억5000만 원짜리 단독 팔고 2억 대출받아 입주한 아파트다. 현재 이 아파트 공시지가는 2억7000만 원이다. 그런데 1차 감정평가액이 얼만 줄 아나? 놀라지 마라. 2억3000만 원이다. 감정평가액을 그대로 수용하면 대출금 2억 제하고 손에 쥘 돈은 3000만 원뿐이다. 불과 4년 만에 2억5000만 원짜리 내 집 날리고, 월세보증금밖에 안 되는 3000만 원 쥐고 서울하늘을 떠돌아야 한다. 그러니 1차 감정평가를 죽어도 수용 못한다. 현시세가 5억인 아파트다. 5억이 과욕이라면 분양가 4억5000만 원이라도 보상해줘야 나갈 수 있는 거 아니냐? 이대로는 도대체 갈 곳도 없고,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끝까지 투쟁할 거다. 공시지가만도 못한 감정평가액 받고선 죽어도 못 나간다. 대책 없는 재개발에 쐐기를 박기까지 우린 끝까지 투쟁으로 맞서겠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실은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분양가 4억5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2억3000만 원 던져주면서 내쫓을 수 있단 말인가. 대출금 2억 갚고 나면 3000만 원 들고 서울하늘 아래 셋집인들 어찌 구하겠는가? 이건 말이 안 되지만 가짜 사실주의가 만들어낸 사실이다.

그런데 충분히 말이 된다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 2억3000만 원이면 괜찮은 보상이잖아, 얼마나 더 받고 싶어서 지랄이야, 하는 인간들이 의외로 부지기수다. 정말 그런 자들이 있느냐고? 불행히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삼성물산 래미안이 시공하는 은평구 녹번동 재개발 현장을 돌아보자. 빌라촌인 그곳의 빌라 시세는 대략 1억8000만 원에서 2억3000만 원 정도였다. 공시지가는 9000만 원 어름이었다. 1차 감정평가액이 나왔다. 공시지가만도 못한 8000만 원 내외였다.

▲ 은평구청 앞에서 대책 없는 재개발에 맞선 녹번동 원주민들의 기자회견. ⓒ유채림

조합을 탈퇴하는 주민이 생겨났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비상대책위는 삼일교회에서 마련해준 교회옥상에다 사무실을 차렸다. 물론 삼일교회 역시 같은 처지다. 한데 교회가 현금청산 대상으로 쫓겨나게 된 이유는 매우 희극적이다. 삼일교회 부지가 종교부지 대신 그냥 '대지'로 돼 있기 때문이란다. 뉴타운 바람이 불면서 생겨난 단어 중 하나가 '종교부지' 아닌가? 그전까지는 '종교부지'란 단어를 굳이 쓸 이유조차 없었다. 그러니 40년 역사를 가진 삼일교회의 터전이 '종교부지'일 리 없다. 그건 서울시내 역사 깊은 교회들이면 다 그렇다. 역사 좀 있는 교회라면 한결같이 '대지'로 등재돼 있다는 얘기다.

다시 감정평가액 문제로 돌아가자. 비상대책위는 앞뒤 가림 없이 1차 감정평가의 부당성을 알려나갔다. 은평구청 앞이든 감정원 앞이든 시청 앞이든 가리지 않았다. 덕분에 2차 감정평가를 받게 됐지만 결과는 1차나 2차나 였다. 1차 때보다 고작 500여 만 원 오른 게 다였다. 비상대책위는 항변한다.

"2억짜리 내 집 빼앗고 7000만~8000만 원 던져준다는 거다. 심지어 빌라 마련할 때 3000만~5000만 원씩 대출 끼고 마련한 주민들도 많다. 그런 이들은 손에 쥐는 돈이 3000만~4000만 원뿐이다. 이보다 더한 야만이 있는가."

비상대책위에 속한 원주민들은 현재의 내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삼성물산 래미안이 가만있을 래미안이 아니다. 그들은 조합을 앞세워 무차별 명도소송을 진행했다. 무려 백 세대가 넘는 가옥이 그 대상인데, 여기엔 삼일교회도 포함됐다. 결과는 빤하고, 삼성물산은 그 결과에 따라 지난해 10월16일 세 집만 우선 강제집행을 단행했다.

▲ 길바닥에서 예배드리는 삼일교회 교인들. ⓒ유채림

아이들 유치원시절 앨범부터 숟가락까지 훑어가는 강제집행에 공포를 이겨낼 원주민들은 많지 않았다. 삼성물산이 노리는 것도 그거 아닌가. 끝내 버틴다던 각오는 표표히 날아가 버렸다. 원주민들은 부랴부랴 녹번동을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길을 택했다. 일부는 삼일교회 옥상 사무실에서 더욱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의도는 힘의 의지에 압도되는 법이다. 그나마 교회는 괜찮으려니 믿었던 차에 삼성물산 래미안은 아예 교회를 치고 들어왔다. 지난해 11월18일 부슬비 내리던 오후의 일이다. 교회와 원주민들을 분리하기 위한 삼성물산의 저급한 폭력이다. 삼성물산이 보낸 용역들은 교회를 포위했다. 교회 안으로 아무도 발길 할 수 없도록 막아선 뒤, 그들은 교회조차 강제집행을 단행했다.

녹번동 재개발지역 철거는 그걸로 끝났다. 삼성물산 래미안은 래미안을 지을 일만 남았다. 덤프트럭이 드나드는 꼴로 보아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날 이후 교회는 입때껏 길바닥에서 예배드리고 있다. 원주민들은 여태껏 은평구청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 중이다. 그러니 끝난 것 같지만, 실은 끝나지 않았다. 삼일교회는 대토부지를 마련해주고 교회를 새로 건축해주기까지 삼성물산 래미안에 맞서겠다고 선언한다. 원주민들은 삼성물산 래미안이 설득력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기까지 은평구청 앞 천막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은평뉴타운 재개발이 말이 안 된다면 녹번동 재개발도 말이 안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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