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는 무산되었다. 그 다음 날부터 연수원은 김경욱 씨가 제작한 소식지로 도배가 되었다. 회사는 김경욱 씨를 어떻게든 연수원에서 내보내야 했다. 결국, 회사가 부천에 노조 사무실을 마련해 주기로 약속했다. 김경욱 씨의 완승이었다. 김경욱 씨는 누구의 감시나 통제도 받지 않는 노조 사무실을 얻었다. 김경욱 씨는 작전 거점을 얻게 된 셈이었다. 이제 활동 무대는 연수원이 아니라 수도권 일대로 넓혀졌다.
노조 사무실을 중동점으로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인 노조 활동이 시작됐다. 부천, 인천 등 서쪽 일대는 여기를 기반으로 조직화가 시작됐다. 70일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게 노조를 조직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기존 가입자들은 노조가 얻어 낸 게 있으니. 노조 활동을 하면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파업이 끝나고 현장에 복귀한 뒤,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직원들이 출근했는데 부장들이 일일이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직원들이 부장에게 인사했다. 70일간 파업을 하면서 노조가 회사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지속해서 지적했었다. 삼겹살을 직원에게 집어 던지는 일부터 다양한 인격 모욕 사례를 낱낱이 공개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어이쿠' 싶었다. 직원들이 노조에 가입하는 이유가 그러한 인격적 모독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거꾸로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면 노조활동을 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회사의 실수였다.
'우리가 뭉쳐 싸우니 부장이 거꾸로 우리에게 인사 하는구나'
되레 노조원들은 회사의 변화를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자연히 복귀한 조합원들은 더욱 노조활동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까르푸 노조 간부로는 위원장인 김경욱 씨와 사무국장인 이경옥 씨(현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둘 밖에 없었다. 김경욱 씨와 이경옥 사무국장 단 둘이서 밤새도록 소식지, 피켓 등을 만들었다. 그나마 김경욱 씨는 반 전임이라도 됐지만 이 사무국장은 그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일하는 곳은 노원구 중계점이었다. 일이 끝나면 거의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중동점까지 와서 피켓을 만들었다.
김경욱 씨는 그때가 정말 열심히 노조활동을 했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위원장이 된 이후 추석, 설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소식지 한 장 만들면 수도권은 매일 2~3개 매장을 돌았다. 출근 전 새벽이나 일 끝난 저녁에 돌아다녔다. 이 사무국장도 일과가 끝나면 혼자 중계점, 면목점 등을 돌아다녔다.
수도권은 그나마 나았다. 지방 매장 돌아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식지 하나를 지방 매장에 뿌리는 게 일주일 넘게 걸렸다. 그래도 다 못 돌렸다. 전국 곳곳에 있는 매장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돌아다니는 매장에는 지부가 세워진 것도 아니고, 노조원이 가입해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근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활동 여건도 열악했다. 조합비가 거의 걷히지 않았다. 조합원의 30%가 조합비를 안 냈다. 월 100만 원도 안 걷힐 때가 많았다. 그 돈으로는 필기구 외에는 살 수도 없었다. 노조비로 밥을 사먹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그렇게 적게 걷히는 조합비였지만 조합비 10%는 연대단위에 항상 기부했다. 힘든 와중에도 이것만은 꼭 지킨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김경욱 씨가 예수를 영접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강의에서 연대의 중요성을 배웠다. 사실 교회에서 배운 십일조를 노조 활동에 적용했다. 연대방식은 '몸'으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몸'으로도 많이 연대했다. 학습지노조, 골프장 캐디노조 등 서비스연맹 투쟁사업장 집회는 대부분 참여했다. 까르푸 노조가 속해 있는 경기도 지역, 부천 지역 파업 사업장도 웬만하면 모두 방문했다.
그런 와중에도 까르푸 매장을 방문하면서 적극적으로 노조 홍보에 나섰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김경욱 씨는 매장을 돌아다니는 게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성격상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 못하기도 하고, 수줍음도 많았다. 생면부지 사람들에게 선전지를 돌리고 노조에 가입해달라고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매장 보안요원은 번번이 매장 출입을 막았다. 옥신각신 끝에 매장에 들어가도 늘 그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어렵게 매장에 들어가면 직원 휴게실을 찾았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는 장소다. 거기에서 소식지를 나눠줬다. 만약 휴게실에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곧바로 ‘약장수’로 변했다. 의자 위에 올라가 약장수처럼 노조를 선전했다.
"안녕하십니까. 까르푸 노조 위원장 김경욱입니다."
이렇게 시작했다.
"회사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건 노동법을 위반하고 있는 일입니다. … 혹시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노조에 연락해 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협력업체 직원도 협력업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연락 주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까르푸 매각설도 노조 조직화에 이용했다. 2006년 초, 회사에서 쉬쉬하고 있던 까르푸 매각설을 노조에서 먼저 공론화했다. 매각설이 나오자 노동 현장이 불안해졌다. 이것을 이용했다. 사내 게시판에 매각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회사의 해명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니 불안해하던 직원 상당수가 노조에 가입했다. 단체협약에 비정규직 가입이 허용된다는 내용도 선전지 등을 통해 지속해서 알렸다.
그렇게 해서 2007년까지 조직된 비정규직이 600명이었다. 2006년 초 매각에 대비해 18개월 이상 근무한 자의 고용보장 등을 골자로 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할 때, 하루 파업을 했는데 500명 정도가 모였다. (* 2006년 3월 31일 까르푸 노동조합은 사측인 까르푸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회사를 매각할 경우 고용승계와 단협 승계를 회사가 약속했다. 특히 '18개월 이상 된 계약직 직원의 신분보장'이 명시돼, 계약이 만료된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해고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하지만 이랜드로 매각된 이후, 이 합의안은 사실상 소용없게 됐다.)
이랜드 그룹으로 까르푸가 넘어간 이후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2007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노조원 조직화를 위해 돌아다녔다. 이슈는 분명했다. 'oo매장에서 o명 해고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그 매장으로 달려갔다. 매장 휴게실에 가서
"여기서 00명 해고됐습니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해고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불안해하는 많은 이가 노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4월부터는 조합원도 해고되기 시작했다. 레퍼토리를 바꿨다.
"조합원은 반드시 복직시킵니다. 지금까지 복직되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조합원은 방법이 없습니다. 노조에 가입하면 반드시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 밀알 줍는 식으로 노조를 조직했다. 지부가 없는 매장에 조합원이 2명만 가입하면 곧바로 지부를 만들도록 했다. 그 둘 중 한 명을 지부장, 또 다른 한 명을 간부로 임명했다. 감투가 있어야 더욱 열심히 노조 활동을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지부를 만들다 보니 조금씩 조합원이 늘었다. 지부라는 씨앗을 곳곳에 뿌려 놓으니 점차 지부를 중심으로 조합원이 모였다.
* 이 기획은 현재 미디어 다음 '스토리펀딩'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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