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다고 파업과 같은 거창한 싸움은 아니었다. 컴퓨터를 주지 않는 회사에 컴퓨터를 달라고 요구하는 싸움이었다. 한마디로 '찌질한' 싸움이었다.
컴퓨터는 몇 차례 요구에도 주지 않았다. 인사과에 문의했으나 '줄 의무는 없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70일 파업기간 동안 까르푸 프랑스 본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까르푸가 여러 국제 기구와 체결해 놓은 협약이나 헌장 같은 자료들을 다운받아 한국어로 번역해 둔 적이 있었다. 혹시 파업할 때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국제 협약과 인권 헌장 등의 주요 골자는 노조 활동을 보장해야 하면 노조원은 물론이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까르푸와 협약을 체결한 국제 상업 연맹(UNI)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노동 관련 담당자 이메일을 찾아내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한국 까르푸 노조 위원장이다. ~~ 해서, ~~ 왔는데, (컴퓨터를 주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다. 까르푸가 협약을 위반하고 있으니 조사해서 조치하기 바란다. (중략) ~'
며칠 후 반응이 있었다. 메일을 보낸 며칠 후, 국제상업연맹 한국지사 담당자가 김경욱 씨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그쪽에서는 노조 위원장이 탄압받고 있다 길래 무척 큰 사단이 일어난 줄 알았다.
한국지사 관계자가 '어떻게 탄압받고 있느냐'고 김경욱 씨에게 묻길래, '컴퓨터를 안 준다'고 답했다. 그러자 고작 그런 일로 이메일을 보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말없이 '알았다'는 답변을 들은 뒤 헤어졌다.
그러나 그 뒤에도 컴퓨터는 지급돼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김경욱 씨는 줄기차게 물고 늘어졌다. 까르푸가 국제상업연맹과 체결한 협약 내용을 노조 소식지에 넣어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인권을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 지키고 있다. 이건 인종차별이다'
그러자 한국까르푸 본사에서 난리가 났다. 프랑스인에게 가장 민감한 게 인종차별이었다. 결국, 국제상업연맹 한국지사 담당자가 유럽 본사에 연락했고 그쪽에서 다시 한국 까르푸에 연락하는 과정 끝에 김경욱 씨는 컴퓨터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김경욱 씨에게 컴퓨터는 최첨단 무기나 다름없었다. 김경욱 씨는 컴퓨터를 이용해 노조 소식지를 제작했다. 노조위원장은 반전임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루 4시간 동안 노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근무시간인 오전에는 노조 홍보 소식지를 만들었다. 연수원에서 김경욱 씨에게 아무런 일도 주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자연히 아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만든 소식지는 노조 활동하는 오후 시간에 뿌렸다.
회사가 김경욱 씨를 연수원에 보낸 이유는 현장 노동자와 그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였다. 연수원에는 노동자를 교육하는 공간으로 평상시 일하는 노동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착각이었다. 연수원이 현장 노동자를 만나지 못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생각을 조금만 다르게 하면 매일 100명 넘는 전국 매니저들이 교육받으러 오는 곳이 연수원이었다. 김경욱 씨는 이들에게 매일 노조 홍보 소식지를 나눠줬다. 휴게실 테이블에도 노조 소식지를 올려놓았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소식지를 나눠줬고 식당 벽에도 소식지를 붙였다.
연수원 이사는 미칠 노릇이었다. 교육시간에는 까르푸가 '좋은 회사‘라고 하는데 김경욱 씨가 뿌리는 소식지에는 '노동 착취하고 노조 탄압하는 나쁜 회사'라고 쓰여 있었다. 연수원 교육의 실효성이 문제가 됐다. 직원들이 회사 교육 받으러 왔다 되레 노조 교육을 받고 가는 식이었다. 한국까르푸 본사에서도 이를 모를리 없었다. 김경욱 씨 귀에도 한국까르푸 인사상무가 사장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인사상무가 이를 바득바득 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얼마 안 가 일이 터졌다. 김경욱 씨가 출근했는데 덩치 큰 보안요원이 사무실을 막았다. 그 옆에는 인사상무가 서 있었다. 그가 대뜸 김경욱 씨에게 '당신 대기발령이니 여기서 나가라'고 통보했다. 무슨 소리냐며 사무실로 들어가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보안요원이 몸으로 그를 막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김경욱 씨는 한국까르푸 인천 계산점 지부에 연락했다. 당시 연수원은 인천 계산점 매장 맨 윗 층에 있었다. 잠시 후 노조원 몇 명이 연수원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노조 위원장이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다른 노조원들에게도 전화했다. 곧바로 10여 명의 노조원들이 더 올라왔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대치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사이 김경욱 씨는 인천지방노동사무소에 신고했다.
"난 노조위원장인데 회사가 사무실에 들어자지 못하게 막고 있다. 부당노동행위 현장에 출동하여 조치를 취해달라“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해 전화했는데, 십여분 쯤 지나서 근로감독관이 달려왔다. 알고 보니 인천지방노동사무소가 회사 바로 앞에 있었다. 인천 북부지청이 연수원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었다. 근로감독관은 상황을 보자마자 인사상무를 불러 질타했다. 근로감독관이 김경욱 씨를 빨리 들여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보안요원을 철수시켰다. 그러자 김경욱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실로 들어갔고 노조원들은 박수를 치며 다시 매장으로 돌아갔다. 김경욱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소식지를 만들었다.
회사의 강제 인사 조치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궁지에 몰린 인사상무는 김경욱 씨를 인천 계산점으로 정식 발령을 내버렸다. 재미있는 점은 김경욱 씨 반응이었다. 김경욱 씨는 못 가겠다고 버텼다. 사실 굳이 갈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도 충분히 노조활동을 할 수 있었다.
김경욱 씨가 버티자 회사는 '인사명령을 거부하면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징계가 쉽지 않았다. 단체협약에는 '노조 위원장 인사임명은 노사 간 충분한 협의 하에 결정한다'고 돼 있었다. 노조 위원장과 협의하지 않고 인사를 단행하는 것은 단협 위반이었다. 김경욱 씨는 그것을 물고 늘어졌다. 기 싸움을 벌인 셈이다.
김경욱 씨는 느긋했다. 급한 건 회사였다. 김경욱 씨도 노조원들이 있는 점포로 발령내면 순순히 응할 줄로 알고 정식 발령을 냈는데, 김경욱 씨가 오히려 단협위반으로 고소하겠다며 인사 발령을 거부하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인사 상무가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해서 김경욱 씨에게 반격당하는 형국이었다. 인사 상무가 김경욱 씨의 인사 발령에 대해 협의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회사는 형식적인 협의를 진행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는 협의 날짜를 최대한 늦게 잡았다가 다시 연기하는 방식으로 협의 절차를 지연시켰다. 첫 번째 협의하는 날 인사 상무는 회사의 인사 발령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 김경욱 씨는 한번 만난 걸로 협의가 끝난게 아니라고 버텼다.
"단협을 자세히 봐라. '충분히' 협의하라고 하지 않았나. 한 번 협의하고 끝나는 것은 충분한 협의가 아니다."
회사 관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언제로 다음 잡을 까요' 하길래 '한 달 후에 합시다'라고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일주일 후에 하자고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바쁘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한 달 뒤에 또다시 만났다. 회사 관계자는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어떻게 하면 좋겠냐."
김경욱 씨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김경욱 씨는 인천 계산점에 내려가는 조건으로 부천에 노조 사무실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한국까르푸 노조 사무실은 노원구 중계점에 있었다. 전임 위원장이 중계점 출신이어서 노조사무실을 중계점에 두었던 것이다. 인천에서 일하는 김경욱 씨는 노조 사무실에 거의 가 보질 못했다. 게다가 김경욱 씨는 부천 중동점에서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 노조원이 가장 많았으므로 노조 사무실은 부천에 있어야 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펄쩍 뛰었다.
* 이 기획은 현재 미디어 다음 '스토리펀딩'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