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오는 17일 열리는 세 번째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김상준 경희대 교수의 발제문 "공존 체제, '다른 백년'의 세계상: 87년 민주화 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이다. 김 교수는 냉전 종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아니라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이 이윽고 종식된 것"으로 앞으로 "세계는 각 문명과 체제와 사상의 공존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냉전의 종식은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그 양자의 대립구도, 좌-우, 그와 연동된 진보-보수, 또 유럽내전의 글로벌한 결과물인 서구-비서구의 차별적·대립적 문명관, 이 모든 게 이제 시효 만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세력은 분단체제와 냉전체제라는 시효가 지난 프레임에 갇힘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지 못했다.
그는 "'분단체제'란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체제"라면서 "분단체제를 내려놓고 공존체제를 내세울 때, '다른 백년'의 프로그램이 열린다"고 말한다. "'분단체제' '분단체제 극복' 프레임, 즉 '냉전체제'와 '냉전체제 민주화 운동'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백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상준 교수의 발제문을 4회로 걸쳐 게재한다.
'백년포럼'은 17일 오후 7시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며,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이 토론자로 참여한다. 관심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7. 공존체제의 과학: 인간 본성론의 전환
1970년대~1990년대 생물학계를 지배했던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이 있었다. 이름 하여, 인간 도덕성의 '껍데기(위장=veneer) 이론'(Veneer Theory)이라 한다. 잘못 해석된 진화론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나온 견해를 둘만 인용해 본다.
"감상주의만 벗겨낸다면, 진심어린 도움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협동이라 불렸던 것은 기회주의와 빼앗기의 혼합에 불과하고 (…) 자기 이익대로 행동할 완전한 기회만 부여된다면, 인간이 인간을 두들겨 패고, 고통을 주고, 살인하는 것을 제약하는 것은 오직 그의 편의성 밖에 없다. 그 대상이 그의 형제든, 배우자든, 부모든, 혹은 자녀들이든 말이다. '이타'라는 말을 지우고, 거기서 '위선'의 존재를 보라." (Ghiselin, The Economy of Nature and the Evolution of Sex, 1974:247)
"이타적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 이타성이란 것이 그토록 찾아보기 힘든 것만큼이나 인간 본성이다." (Robert Wright, The Moral Animal, 1994:344).
이러한 식의 견해가 19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를 얼마나 휩쓸었는지, '속물' 론의 자기비하가 얼마나 심했던지 상기해보시라. 냉소주의, 허무주의가 이런 심리를 먹고 자라고, 일베류의 난폭성이 자라는 온상이 되었다. 냉전과 대결을 주창하는 정치세력의 심리적 근거지이기도 하다.
사회과학, 그 중에서 경제학이 이 '껍데기 이론'을 가장 먼저 환영하여 도입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오직 하나의 동기, 이기심 하나로 환원시켜 설명했다. 단순한 모델이 나오니까 그럴듯해 보였다. 이것이 또 정치학, 사회학 쪽으로 확산됐다. 이름 하여 '합리적 선택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이다. 생물학의 껍데기 이론과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에서 인간행동(사회행동, 정치행동)의 이기심 단일동기론도 1970~1990년대를 풍미했다. 이 시기가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와 중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이 신자유주의 교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이 시기 서구에서, 특히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사람들이 이런 이론을 많이 배워왔다. 도덕성을 얄팍한 껍데기, 위장(僞裝)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인간 본성을 이기심 하나로 본다(=인간본성은 한마디로 악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심히 균형을 잃은, 매우 편향된 이론이었다. 창조(생산)보다 모방(수입)이 많은 한국 학계의 시계는 국제표준보다 늦게 간다. 시간 지체가 있다. 새 이론을 배워와 정착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껍데기 이론'의 영향이 아직까지도 상당히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세계 학술 시계로 보면 이 이론은 이미 깨진 지 꽤 됐다. 진화에 대한 다윈의 원래 생각(original idea: 인간의 moral sense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몸 안에 축적된 특징이라는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그에 관해 많은 자료와 참고문헌이 있지만, 이를 요령있게 압축한 아래의 인용 하나로 대신한다. 화자(話者)는 네덜란드 출신의 재미(在美) 자연과학자(동물학자)이자 에모리 대학 교수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이다. 그는 일찍이 1990년대 초반부터 당시 지배적이던 '껍데기 이론'에 대해 선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던 학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 이론(Veneer Theory)이 20세기말에 이르러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이다. 열병을 앓으면서 천천히 죽어갔던 것이 아니라, 강력한 심장마비로 순간적으로 사망했다. (…) ('껍데기 이론'을 반박하는) 새로운 데이터들이 처음에는 조금씩, 그리고 점점 더 크고 꾸준한 흐름이 되어 들이닥쳤다. 데이터는 이렇듯 잘못된 이론을 덮어버리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 인류학자들은 세계 모든 곳 사람들의 마음 안에 공정함의 감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실증해보였고, 경제학자들은 기존의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이 허용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협동과 이타의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고, 어린아이와 유인원을 대상으로 한 이타성 실험은 생후 6개월의 아기들이 어떤 인센티브가 없는 상태에서도 '나쁘다(naughty)'와 '좋다(nice)'의 차이를 알고 있음을 보고했고,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두뇌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하여 이제 2011년에 이르면, 인간이 '슈퍼협동존재(supercooperator)'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새로운 발견들이 '껍데기 이론'의 관에 못을 박았고, 상식이 180도 회전하여 새롭게 되었다. 지금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보살피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타인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자연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널리 공유되고 있다. 도덕성은 얄팍한 껍데기가 아니라, 우리들 내부로부터 나온다. 이는 우리 인간 존재의 생물적 일부이며, 다른 동물들에서도 수많은 유사형태를 통해 지지되는 견해가 되었다. 불과 수십년 사이에,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선(善)에 대한 자연적 경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상대방에게 '잘하라고(nice)' 가르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데에서, 이제는 우리가 선한 존재로 태어나며 선한 사람이 결국 성공하게 된다는 합의로 이동하게 되었다." (De Waal, The Bonobo and the Atheist, 2013:41-42)
"증발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보고, 인간의 모든 행위의 동기를 이기심(자기이해) 하나로 환원하였던 자연과학-사회과학이다. 새로운 발견들은 이렇듯 편향된 구 과학을 폐기하고, 상식에 보다 부합하고 보다 균형잡힌 신 과학으로 인도한다. 인간의 자기보존 본능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문제는 이것 하나로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다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본성 자체, 본성 일체가 악하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믿음이 현실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모든 의식적 노력과 운동을 '헛된 것' 또는 더 나아가 '사악한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와 친화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새로운 자연과학이 자기보존의 본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감과 협동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몸은 자기보존 능력을 증대하는 진화적 과정에서 형성돼왔다. 자기이해(self-interest)와 공감과 협동의 능력은 인간본성에서 공존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게는 '몸'이 (무의식적, 무반성적으로) 공감하고 협동하는 것 이상의 능력이 있음에 주목한다. 의식적 또는 반성적으로, 스스로의 자기이해를 빗금치거나, 괄호칠 수 있는 능력이다(<미지의 민주주의(증보판)>, 10장 참조). 흔히 '양심'이라 하는 것, '공정함에 대한 감각'이라 부르는 것이 여기서 나온다. 이런 능력이 교육에 꼭 비례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인간의 몸과 의식능력에 내재된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물론 '껍데기이론'이 단호히 부정했던 능력이다. 이제 달라졌다. 신(新) 과학의 윤리론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한 기초를 갖게 되었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최근 성과의 영향을 받는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문학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생물학, 심리학, 의학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대전환은 앞으로 인문-사회과학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오늘 논의했던 공존체제의 세계상에 부합하는 공존과 협동의 자연과학, 인문-사회과학이 될 것이다.
8. 세대를 넘어
이 발표의 부제인 '87 민주화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은 '백년포럼'이 원래 내게 제안했던 것이다. 운동이나 정치의 일선에 서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제넘은 제목이 아닐 수 없어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행사주최 측에서 굳이 그렇게 제목을 잡았던 뜻도 있을 것인데, 발표자로서 이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어중간한대로 부제로 삼아보았다. 어쨌거나 덕분에 지난 30년을 다시 복기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긴 유럽내전의 종식'이라는 시야에서 과거 200~300년의 세계를 돌아보고, '공존체제'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다른 백년'을 생각해 보았다. 1987년 이후 30년을 이런 시각에서 보게 된 것은 어쩌면 내가 오래 동안 일선을 떠난 국외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필자가 운동과 정치의 일선을 떠난 것은 1992년 여름이었다.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한국의 상황을 보다 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분석해왔다.
이 글은 1960, 1970, 1980년대 세대의 시각에서 출발하였다. 칼 만하임은 20대 초년에 경험한 세계가 한 세대의 '세대의식'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 30년간(1960년대~80년대)의 세대상황, 세대의식은 매우 유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30여 년의 세대의식을 상대화·문제시하고 싶었다. 그 세대의식, 세대감각을 넘어서야 1987년 이후 30년의 공과를 제대로 보고, 미래 역시 제대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셈이다. 기존의 시각을 버리고 공백 위에서 다시 보자 했다. 이 지점, 지난 30년의 반성의 공터에서 1987년 이전 30년의 세대와 1987년 이후 30년의 세대(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세대)가 만날 수 있기 바란다. 1987년 이후 세대가 겪었던 여러 문제는 1987년 민주화 주도세력의 세대의식의 한계, 세계관의 한계에서 유발된 바 크다. 신구세대가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이를 넘어설 길들을 함께 찾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구체적인 방안과 경로에 대해 필자가 여기서 구구한 말을 늘어놓는 것 역시 주제넘은 일일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제안한 '공존체제의 세계상'이 그렇듯 열어갈 새로운 정치의 밑그림 그리기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 바란다.(끝)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