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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의 복권, 왜 지금인가?

[강준영의 차이나 브리핑] 후야오방 복권과 중국 정치의 '뜨거운 감자'

‘중국 공산당의 양심’으로 불리는 ‘비운의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총서기가 공식 복권됐다.

후야오방 총서기의 서거 26주년인 올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탄생 100주년인 11월 20일을 맞이하여 정치국상무위원 7인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류윈산(劉云山) 상무위원 주재로 ‘후야오방 동지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를 열었다. 당 총서기 시진핑은 30분에 달하는 기념사를 통해 ‘위대한 개혁가 후야오방’의 업적을 찬양하고 "인민과 당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일생을 산 혁명가이며 정치가"라는 전대미문의 평가를 통해 후(胡)의 복권을 공식화했다.

‘비운의 총서기’란 말이 그가 실각 과정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후야오방은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1980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총서기 직에 오른 후 1982년에 12차 당 대회를 통해 후야오방 총서기-자오즈양(趙紫陽) 총리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더 이상 사회주의 이념에 집착하면 공산당의 미래는 물론 중국의 미래도 없다는 절박한 인식을 갖고 사회주의 이념을 초월하는 ‘사상의 해방’과 ‘생산력 우선 발전론’을 제시했다. 또한 마오저뚱(毛澤東)식 개인숭배를 경계하고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하는 정치구호를 내걸고 수십 년간 마오쩌둥식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과감한 수술을 시도했다. 후야오방은 마오의 노선을 떠나 덩샤오핑이 추진하는 개혁개방 정책의 선봉에 선 인물이 되었다. 마오주석(毛主席)에 익숙해진 당 최고지도자 명칭도 초기 공산당 체제인 총서기로 바꾸었다.

문제는, 후야오방이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병진’이라는 정책적 인식을 갖고 경제개혁 중심의 정책 전환 효과를 극대화하려던 덩샤오핑의 생각을 뛰어 넘어버렸다는 데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뒤처리를 맡았던 후야오방은 문혁의 과오를 바로잡고 당시 억울하고 조작된 사건에 의해 누명을 쓴 사건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절대 진리’를 바꿔야 한다는 진보적 사고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인민 권력’의 증대가 ‘공산당 권력의 감소’로 이해되는 기존의 관점을 ‘인민 권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공산당이 되면 희망이 없다는 인식을 갖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문혁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파시스트 독재로 규정짓고 인민 대중에 바탕을 둔 정치를 갈구했다.

당 간부는 더 이상 특수 신분이 될 수 없다면서 종신영도제를 폐지하고, 역대 정치운동의 피해자들에 대한 복권과 정치현대화를 요구하는 베이징 ‘민주의 벽(民主墻)’ 사건 참여자들에 대해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베이징, 상하이 등 중심 도시의 대학 인민대표의 자유 경선을 주창하고, 부국(富國)보다는 부민(富民)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언론에게는 당성(黨性)보다는 인민성(人民性)을 강조했으며 문화와 이념에 대한 민주, 조화, 이해, 믿음 등을 강조하면서 ‘어떤 한 사람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10억 인민을 저버릴 수 없다’는 ‘민본정치’를 추구했다. 때문에 강력한 부정부패 척결 정책도 자연스럽게 궤도에 올랐다.

이러한 후야오방의 정치적 급진정책은 기존 중국의 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비전형적’인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공산당의 양심’으로 받들어졌지만 당 권력의 수혜자들에게 후야오방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마침 85년 말 중국의 최하 단위 대표를 뽑는 기층(基層) 선거에서 과도한 정치적 요구가 나오고. 86년 말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당내에서는 이를 ‘자산계급 자유화’, 즉 과도한 서구적 정치 사조를 도입하는 '전반적 서구화(全盤西化)'의 개혁사조에 따른 서구 사조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규정하고 일종의 정풍운동인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운동(反資産階級自由化)'을 일으켰다. 1987년 초, 후야오방의 실각은, 바로 이러한 자유사조의 범람을 야기하고 비사회주의적인 정치적 요구를 묵인하면서 시위를 적극 진압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 권력의 조정자였던 덩샤오핑도 보수 세력의 타도 목표가 되면 당이 주도하는 개혁개방 정책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속히 그를 실각시키는 선택을 했다.

이렇게 애매하게 실각한 후야오방에 대해 중국 조야, 특히 당내 지식인은 물론 공산당을 비판하는 당외(黨外) 지식인들도 후야오방의 정책을 높이 사는 ‘후야오방 열기’가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 그러나 후야오방의 죽음과 함께 중국 현대정치사의 최대 오점인 천안문 사건이 촉발되었기 때문에 후야오방에 대한 언급은 ‘금기’가 되었고, 그 동안 그에 대한 재평가는 산발적이지만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 왔다.

복권이 되지 않았음에도 장쩌민(江澤民) 급에 맞춰 ‘후야오방 문선(文選)’이 발행되었고, 10년 전에는 같은 공청단 출신인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및 3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좌담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의 집은 국가중점문물로 지정됐으며, 2014년 말에는 기억해야 할 4대 기념일에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을 포함시킬 만큼 분위기가 조성돼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시진핑이 중국 정치의 역린(逆鱗)이라 할 천안문 사건과 연계되어 있는 후야오방을 공식 복권시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의 부친 시중쉰(習仲勛)이 후야오방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던 것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추구하려는 개혁과 후야오방의 개혁이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속적인 사회 정화 운동, 즉 반부패 운동의 추진에 후야오방의 유산이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중앙’이 연루된 부패 척결을 큰 무리 없이 추진해온 시진핑 지도부 입장에서 지방에 대한 반부패 운동의 전개, 그리고 최근 추진하는 은행권 등에 대한 사정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는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요하고 집권당의 공신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헌법정신과 민주법치를 강조한 후야오방의 정치이념 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후야오방을 통해 시진핑식 통치에 대한 확신을 인민에게 심어주고 개혁의 속도와 정당성을 담보하고자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후야오방이 당시 공산당의 머리 위에서 정국을 좌지우지하던 소위 '8대 원로'들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던 노력과 연결된다. 덩샤오핑도 노인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중앙고문위원회'까지 설치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진핑이 자신이 주도하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후야오방을 되살려 장쩌민, 후진타오 두 전임 총서기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읽혀진다.

마지막으로는, 당내 파벌에 대한 회유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야오방은 15세 때 공청단에 가입해 중국 혁명에 참가했다. 후진타오 역시 공청단 출신이며 현 리커창(李克强) 총리 역시 공청단 계열이다. 후진타오 시기 공청단 인맥의 핵심이었던 링지화(令計劃)가 부패문제로 낙마했지만, 이번 좌담회에 후진타오 시기 정치국원을 역임한 공청단 출신의 왕자오궈(王兆國)가 참석한 것을 보면 공청단 파벌에 대한 끌어안으려는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후야오방의 복권에 앞장선 것은 시진핑 입장에서는 일종의 모험이다. 후야오방의 개혁 정신과 청렴 이미지는 분명히 시진핑 체제에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혹시 과도한 정치 개혁에 대한 요구나 천안문 사건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경우, 이의 처리를 둘러싸고 후야오방의 개혁 이미지만 이용한 게 아니냐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과거의 민감한 정치적 유산을 현재의 정치개혁과 연결시키려는 시진핑의 모습에서 정치적 자신감을 감지하면서도, 중국 정치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관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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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영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 교수이며,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및 중국 문제 시사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중화민국 국립정치대 동아연구소에서 현대 중국정치경제학을 전공해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에 관한 100여 편의 연구 논문과 <한 권으로 이해하는 중국>, <중국의 정체성>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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