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근 박사(서울대학교 지리학과 BK교수)가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반비 펴냄)을 펴낸 것은 이 때문입니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은 멀리는 일제 강점기 농촌 풍경부터 지금 이 순간의 '메트로폴리스 서울'까지, 이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를 정치지리학의 시선으로 추적합니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은 경제 개발을 위해서 전국에서 동원된 사람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야 하는 '지배하는 자'의 욕망과, 가난에서 벗어나 성공하고 말겠다는 '지배받는 자'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빚어낸 공간입니다. 당연히 이 두 가지 욕망은 대립하고, 타협하고, 융합하면서 무수한 사건을 만들어냈죠.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은 동사무소의 출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한 서울의 확장, 그린벨트의 등장, 아파트의 등장, 아파트 분양과 중산층의 탄생, 다세대·다가구 주택의 탄생, 지방자치제, 청계천 복원, 버스 전용차로, 뉴타운, 디자인 서울 등의 사건을 통해서 바로 이 욕망들의 맨얼굴을 추적합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서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가 보통 사람의 삶을 어떻게 빚어내는지 그 생생한 사례를 보면서, 삶에 각인된 정치의 힘에 전율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 나아가 이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을 진전시킬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고민하는 여러분이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을 읽기를 권합니다. <프레시안>과 반비 출판사는 이 책을 먼저 읽은 여러분의 독후감을 매주 목요일 공개합니다. 네 번째 독후감은 소설가 정명섭 씨입니다. 그는 이 책을 읽으며 "600년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서울 시민의 욕망을 거울에 비춰봅니다.
행정 수도 이전 문제로 시끄러웠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개봉동은 다리 하나만 건너가면 경기도라 서울 시민이라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동네 주민들도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인줄 알았지만 사실은 서울 시민이라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현수막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동생에게 말했다.
"야! 이 동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서울 시민인 줄 아나보다."
개봉동이 서울시에 편입이 된 건 1963년이었고,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된 것은 1980년이었다. 그러니까 개봉동 지역은 조선 시대 내내 한양이 아니라 경기도였고,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복 이후에도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까 개봉동이 서울의 한 자락을 차지한 건 길게 잡아봐야 반세기 정도 밖에 안 된 셈이다. 그런데 600년이라는 세월에 슬쩍 묻어가려고 한 것이다.
목욕탕의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문득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런 변두리 동네까지 현수막을 걸고, 행정 수도 이전을 결사반대할 만큼 서울을 사랑하는지 궁금해졌다. 목욕을 끝낸 내가 내린 결론은 서울 시민이라는 무형의 자긍심과 집값 때문이라는 유형의 혜택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고민은 서울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좀비들이 나타나는 장편 소설 <폐쇄 구역 서울>(정명섭 지음, 네오픽션 펴냄)의 출발점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은 우리가 아는 서울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를 임동근과 김종배, 두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달해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민자치센터, 그러니까 동사무소가 사실은 일제 강점기 콜레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몸부림에서 시작되었으며, 초창기 동장은 주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서 뽑혔다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줬다.
또 인위적으로 서울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편입시켰다는 사실도 알게 해줬다. 덕분에 한 동안 서울 각 구청에서 직접 추곡 수매를 해야만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옛날의 서울을 상상해봤다. 그렇게 흡수한 지역과 유입된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이 추구하던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린벨트의 선정이 사실은 원활한 개발을 위한 방편이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그렇게 끌어 모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가 만들어졌고, 속전속결과 빨리 빨리가 결합되면서 와우아파트 붕괴라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시관으로 변한 서울시청에 와우아파트 붕괴의 낳은 불도저 김현욱 시장이 기공식 때 테이프를 커팅했던 가위들이 쭉 전시되어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결국 서울의 탄생은 무지막지한 개발과 흡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토대로 이뤄진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역시 북한의 침략이라는 트라우마가 낳은 강남 개발이었다. 건설 회사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국가가 앞장서서 엄청난 특혜를 줬다는 것은 정경유착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도시사, 특히 서울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가장 의문스러웠던 점은 어떻게 강남의 허허벌판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되었는지 그 과정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마법 아닌 마법이 벌어진 과정에 대해서 상세하고도 납득하기 쉽게 설명이 되었다. 두 사람이 진행하던 팟캐스트를 그대로 풀어내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비교적 읽기가 쉬웠다. 만약 보통의 서술 방식이었다면 그린벨트나 택지 분양 방식 같은 복잡한 개념의 이야기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정권 안정 차원에서 아파트의 건설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과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조성을 공약으로 내걸어야만 했다. 그 얘기는 역설적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이 민심을 가라앉힐 만한 유인책이 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고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숨바꼭질 같은 정책들은 결국 서울을 탄생시켰고, 거대하게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대통령의 선거 공약으로 항상 서울의 주택 문제가 언급되는 것도 그런 영향 때문이다. 매년 수만 명씩 유입되는 인구들로 인해 과포화 상태가 된 서울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동근의 말대로 서울의 발전과 성장은 지방, 특히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노태우 정권이 추진했던 아파트 200만 호 건설이었다. 분당과 일산 같은 신도시의 탄생을 불러왔던 그 정책은 당시에는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 집값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실현된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상은 중동 건설 붐의 하락으로 인한 건설업의 몰락을 막기 위한 정책적인 측면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흡사 국민의 성금으로 만들었다는 평화의 댐의 실상을 알게 된 것과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덤으로 200만 호 건설로 인해서 건설 경기가 과열되면서 자재와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일반 다가구 주택과 빌라의 신축이 부실하게 이뤄졌다는 점은 또 다른 빛과 그림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 시기에 증축된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부실하게 시공되었는지에 대해서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얻게 된 것이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과 규제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주택 시장과 시민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 나오는 다세대 주택 반대 데모는 그런 정책들이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서울의 과밀화 문제가 심각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고 논의를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를 빼먹었다. 왜 서울이 이렇게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다. 서울의 탄생을 보면서 사람들이 왜 그 문제를 외면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서울의 탄생은 독재자와 시민들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원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과 성찰 대신 대책과 해결 방안을 떠드는 모습들은 결국 서울을 더 거대하게 만드는 블랙홀을 형성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행정 수도나 행정 기관의 지방 이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결국 그 모든 것이 서울의 소유라는 근거 없는 이기심의 발로였다. 이런 이기심 역시 서울이 메트로폴리스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그래서 개봉동 같이 불과 반세기 전에 서울에 편입된 지역의 주민들도 600년 운운하는 현수막을 걸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서울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과 동시에 서울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건축학적, 예컨대 아파트를 주제로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의 책들은 많이 나왔다. 도시학적으로 서울을 설명하거나 규명하는 책들도 적지 않게 선을 보였다. 하지만 정치와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서울을 설명하는 책은 보지 못했다. 거기다 대화라는 비교적 쉬운 접근 방식을 통해서 최대한 복잡함을 배제했다. 나처럼 숫자와 도표에 약한 독자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역설적으로 서울의 탄생을 들려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서울의 황혼을 떠올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의 베를린에서는 모든 정규 방송이 중단된 채,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신들의 황혼'만을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 천 년을 간다고 자부했던 제3제국의 몰락에 바쳐지는 핏빛 헌사였다.
서울은 반세기 넘게 괴물처럼 성장해왔다. 사람과 땅, 돈과 욕망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면서 몸통을 불려나갔다. 그래서 불과 반세기 전에 서울에 편입되었던 지역민조차 자신들이 600년을 이어온 수도의 주민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젊은 층들의 고통 받고 있는 지금, 서울은 더 이상 빨아들일 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서울의 황혼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집값과 수도권 주민이라는 유형과 무형의 권력이 과연 천 년을 갈 수 있을지, 아니면 수십 년 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날지 말이다.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황혼을 바라봐야 한다는 아이러니는 비정상으로 가득한 서울의 탄생과 일맥상통한다.
책을 덮으면서 느낀 감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비극'이었다. 행정 수도 이전 문제가 나올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자부심 가득한 현수막을 걸 정도로 서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이런 서울 시민들의 자부심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서울 시민이라는 알량한 자부심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집값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도사리고 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서울의 탄생 역시 먼발치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비극이다.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황혼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말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