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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天生) 기자, 손광식 선배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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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天生) 기자, 손광식 선배를 보내며

[추도문] 투철한 기록정신과 참신한 실험정신

언론인 손광식 선배가 28일 별세했다. 그는 1937년 청계천 부근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로 청계초등학교, 서울중, 서울고를 거쳐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1964년 (지금은 없어진) 대한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경향신문으로 옮겨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로 일했고 (1991년 11월 창간된) 문화일보에서 편집국장, 주필, 사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경향신문에서 처음 손 선배를 만났으나 정작 그와 가까워진 것은 2001년 프레시안 창간을 계기로 해서였다.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보겠다는 필자 및 동료들의 시도에 그는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하고 상당한 액수의 투자와 함께 프레시안의 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30년간 간직해 왔던 취재노트를 바탕으로 '한국의 이너서클' '1997 비망록' 등 100회가 넘는 기사를 프레시안에 연재했다.

그는 투쟁적 지사형의 기자는 아니었으나 투철한 기록정신의 '진짜 기자'였다. 그날 그날의 기록이라는 저널리즘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관점과 방식을 통해 사회의 진실을 보여줄 방법을 고민한 '양심적 언론인'이기도 했다. 또한 고교 시절부터 연극과 소설에 심취하고 음악, 미술에도 재능을 보인 '낭만적 리버럴리스트'였다.

기자 선후배로서 손광식 선배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듯 싶다. 하지만 기자로서 손 선배의 행적은 후배 기자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손광식 선배의 언론인으로서의 행적을 전하는 것으로 그의 별세를 추모하고자 한다. 필자

1.

▲ 故 손광식 프레시안 고문
1983년 4월 경향신문에 수습기자로 입사했을 때 손 선배는 편집부국장이었다.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새까만 후배인 데다 손 선배는 경제 전문 기자, 나는 과학부의 초짜 기자인 터라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 이듬해인가 손 선배는 편집국장이 됐다.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3년 8개월만이었다. 그 기간 동안 손 선배는 한 분의 편집국장을 보좌했는데, 편집국 선배들은 손 부국장의 뛰어난 기획력 덕택에 편집국장이 장수할 수 있었다고들 말했다.

손 선배는 국장이 되고 난 후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전문 기자를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원하는 기자들을 예컨대 외교안보, 조세재정, 생태환경 등의 전문 기자를 키우려 했다. 그날 그날의 스트레이트 기사가 아니라 최소한 한 달 이상의 장기 취재를 퉁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 심층적 문제를 들여다보려 했던 것 같다. 30명 정도의 기자가 지원을 했고 나는 환경 분야를 택했다. 이때 처음으로 손 선배와 대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엄혹한 5공 시절이었다. 특히 경향신문은 전두환이 직접 회사 임원을 임명하는 사단법인 체제였던지라 '청와대 기관지'란 오명을 듣고 있던 때였다. 정치 분야에 대한 비판적 기사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짐작컨대 손 선배는 비록 비판적 정치 기사는 쓰지 못하더라도 사회, 경제 분야에 관한 심층 기사로 시대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또 전문 기자 양성을 통해 장기적으로 언론사의 실력을 키울 요량이었을 것이다.

손 국장의 실험은 오래 가지 못했다. 1년이 안 돼 국장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1주일만 더 있었으면 1년을 채우는데..."라는 손 국장의 한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이 독재정권의 억압을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진부한 기사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기사를 통해 시대의 진실에 접근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경향신문 편집국은 1985년 7월25일 학원안정법 특종기사로 편집국 간부 및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되자, 손광식 편집국장 주재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경향신문사

2.

87년 6월 민주화 이후 언론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나는 동료 기자들과 함께 '경향신문 홀로서기(獨立)' 운동을 벌였다. 청와대 기관지인 경향신문을 국민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대선 일주일을 앞두고 차장 이하 평기자 거의 전원이 회사 안에서 2박 3일간 밤샘농성을 하며 투쟁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듬해에는 노조 설립을 통해 경향신문 제자리찾기 운동을 벌였지만 역시 큰 성과는 없었다. 경향신문은 90년 봄 한화 그룹 소유의 신문이 됐다.

나는 노조 활동을 이유로 89년 말 강제해직돼 2년반 동안 경향신문을 떠나 있었다. 손 선배는 90년 무렵 경향신문을 그만 두었다. 그 속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경제부 후배였던 김의태 기자에 따르면 당시 최대 정치스캔들이었던 '수서택지 특혜 분양'에 대한 비판적 칼럼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는 사태 수습을 위해 개각을 해야 했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었다. 김 기자에 따르면 "당시 경향신문 손광식 주필은 몇 차례나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6공 청와대와 정치권의 힘이 작용한 이 사건에 대해 그때 문공부장관은 손 주필에게 "그만 쓰라. 더 쓰면 신상에 해롭다"는 시그널을 보내왔지만 손 주필은 "특별공급은 관련법에 어긋나는 특혜로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며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친여 성향의 경향신문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로 '경향의 반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경향을 떠난 이후 손 선배는 문화일보 창간에 관여했다. 지금의 문화일보는 조중동 뺨치는 보수신문이지만 창간 당시의 문화일보는 중도적이며 진취적 성향의 신문이었다. 특히 새로운 시대의 언론은 정치경제보다는 문화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손 선배는 조선투위 출신의 백기범 선배(작고)와 함께 문화일보를 진보적이며 참신한 신문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사내 권력투쟁에 휘말려 사장직을 중도 퇴진해야 했다. 이로써 손 선배의 공식적 언론 활동은 끝이 났으며 이후 서울상대 동기들과 함께 '상지컨설팅'이란 벤처투자 기업을 운영했다.

3.

2000년 선후배들과 함께 프레시안 창간을 논의하면서 손광식 선배를 떠올렸다. 찾아뵙고 취지를 말씀 드리니 대찬성이었다. 적지 않은 액수의 출자와 함께 고문직을 수락했다. 게다가 30년간 간직해 왔던 취재 노트를 바탕으로 정치경제 실력자들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연재를 하시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대기자 취재 파일: 한국의 이너서클'이 프레시안 창간 한 달만인 2001년 10월 22일부터 연재가 시작됐다. 2002년 7월까지 48회에 걸쳐 연재된 이 기사들에는 언론의 공식 보도에서는 알 수 없었던 권력자들의 실태가 흥미진진하게 드러난다. 박정희의 황제 같은 모습을 전하면서 그는 "그 장면을 떠 올려 보면 암흑가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 "몇 가지 에피소드를 그림으로 엮어 보면 야쿠자나 마피아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라. 사실 권력의 내부는 그럴듯한 외양에 비해 치기가 넘치는 구석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1997년 1월 한보 부도에서 IMF 외채위기, 대선에 이르는 동안 한국 사회의 속내를 진단한 '1997 비망록'이란 기사를 10-12월 두 달간 53회에 걸쳐 집중 연재했다. 손 선배의 기사는 신영복 선생의 '동양 고전 강독', 남재희 전 장관의 '문주 40년'과 함께 프레시안 창간 초기의 주요 연재물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손 선배의 기록정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취재원들과의 대화는 물론 자신의 느낌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해 왔던 것이다. 시대의 제약, 또는 근거의 부족 등으로 당장 기사를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최초 기록자'라는 기자로서의 직업정신에 투철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천생 기자였다. 그 배경을 프레시안 수습기자 교육을 통해 알 수 있었다. 2008년까지 프레시안 수습기자들은 그에게 '기자의 길'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그는 "무릇 기자란 하루의 취재 계획, 한 달의 취재 계획, 일 년의 취재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루살이 취재에 그치지 않고 긴 안목의 관찰과 취재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2005년 무렵까지 손 선배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관심은 '법치'였다.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특정 사건이 검찰 수사와 재판 등 사법 조치들을 통해 어떻게 해결되어 가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 전문 기자인 그였지만 시대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그의 관심은 사회 전체를 향했고 늘 새로운 관점을 시도했던 것 같다.

4.

그의 경향신문 후배인 김의태 기자는 기자 아닌 자연인 손광식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가왕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톰 존스의 '딜라일라'는 영원한 기자 손광식의 애창곡이다.

80년대 연말 편집국 냉주파티 때, 평소 큰 소리 한번 내본 일이 없는 그가 냉주 한 순배가 돌고 자리가 왁자지껄해질 즈음 1년에 딱 한번 온 몸으로 열창을 하면 또 한해가 그 여운 속에서 저물어갔다고 언론계 후배들은 기억한다.

'딜라일라'는 시작부분이 8분 음표 3개와 2분 음표 하나로 구성된 베토벤 운명교향곡의 '운명의 동기'와 비슷해 작심하고 배운 실력이라고 했다.

경제기사는 삭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기사나 칼럼은 물 흐르듯 스무스하고 부드럽다는 평을 받았다. 이는 아마 학창시절 연극과 문학에 푹 절어 지낸 덕일 게다.

"서울고 1학년 때 '한국의 햄릿'으로 불리는 배우 김동원 선생에 필이 꽂혀 연극반에 발을 디민 게 대학까지 이어졌다". 끼가 있었던지 연극에 빠져 공부도 소홀히 해 이과 쪽은 엄두를 못내고 상과대를 지망했다고 한다.

또 국어를 가르친 황순원 선생에 자극받아 소설을 무척 많이 읽었는데 기사 쓰기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황순원으로부터 "자네는 글을 써"라는 격려를 받기도 했다. 학원문학상을 받았는가 하면 잡지 '새벗'의 소설 공모에도 입상했다. (황순원 선생의 차남 황남규가 손광식의 서울고 동기다. 편집자)

고 3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 처남이 담임선생이었는데 연극과 소설에 빠져 대학에 안 갈 거냐는 꾸중을 듣고 한동안 작심하고 공부해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 한 일도 모교에서는 전설적인 얘기다.

손광식은 그림실력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평이다. 경향신문 소공동 시절. 문세광 저격사건이 났을 때 문의 침입경로를 그리기도 했다. 또 이어령 논설위원의 에세이에 삽화를 그려 호평을 받았을 정도였다." (☞관련기사 : 구룡마을 개발과 원로 경제기자 손광식의 교훈)

알고 보니 그는 2004년 자신의 고향인 청계천에 얽힌 얘기를 <내 고향 청계천 사람들>이란 책으로 내기도 했다. 그는 참 다정다감했던 사람이었다.

5.

<한국의 이너서클> 중에 역사의 아이러니라기엔 너무도 가슴 아픈 얘기가 있다(4회 박흥주 대령의 최후). 10.26 박정희 살해사건의 주모자인 김재규의 부관이었던 박흥주 대령 얘기다. 후배들로부터 모범적 군인으로 존경받았던 그는 상관인 김재규의 명령으로 10.26에 가담했고 결국 80년 3월 6일 총살형을 당했다. 그런데 집행 현장을 참관한 유일한 국방부 출입기자 최용길(경향신문, 작고)은 그와 서울고 동기였다(손광식 선배도 동기).

최용길 기자는 친구의 총살형 입회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그만 제비뽑기에서 참관 기자가 됐다. 총살형을 할 때는 눈가리개를 하게 돼있지만 박 대령은 이를 거부하고 입회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무심한 눈길로 쳐다봤다고 한다. 최용길 기자까지도. 최용길 기자는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과는 언론인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었다. 비정한 권력 투쟁의 회오리 바람 속에 한 사람의 동창은 총살형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를 입화하고 보도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손광식 선배는 한때 자신을 '부역시대의 기자'라고 말했다. '흰 것을 희다, 검은 것은 검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시대의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원천적 한계를 자탄하는 말일 게다. 비록 부역시대의 기자였으나 그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지금 우리는 반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됐으나 시대의 진실을 전하는 데는 지극히 무력한 게 오늘 우리 언론의 모습이다. '천생 기자' 손광식 선배를 보내며 반동의 시대, 기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손광식 선배님, 평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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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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