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서>
캉유웨이(康有爲)는 이름부터 특별하다. 생략된 말은 '聖人(성인)'이다. '有聖人爲', '성인의 뜻대로 행하리라', '성인 말씀을 따르리라'라는 뜻을 이름에 새겼다. 언제부터 사용했는가는 설이 분분하다. 유학을 공부했던 소년기와 서학을 학습했던 청년기 이후라고 짐작하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당대 현실의 개혁을 위해 일생을 투신하겠노라는 출사표로써 스스로 이름을 고쳐 세상에 나온 것이다.
改名(개명)의 결기에도 改革(개혁)은 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주모했던 변법은 100일 천하로 주저앉았다. 복권된 수구파들은 반역자의 목을 원했고, 홍콩과 일본, 캐나다, 영국, 인도를 전전하는 망명자의 신세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인고의 세월 동안 집필한 서적이 바로 <大同書>이다.
1902년 인도에서 완성했다. 소싯적부터 특출한 천재였다지만, 이 책만은 一筆揮之(일필휘지)가 아니었다. 초고의 바탕이 된 <人類公理(인류공리)>를 발간한 것이 1884년이다. 보태고 고치고 다듬기를 거듭해 1902년이 되어서야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장장 18년이니, 집중보다는 집념의 소산이라 해야 옳겠다.
그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양무운동, 청불 전쟁, 청일 전쟁, 무술변법 등 격동의 중국 근대사가 아른거린다. 서문서부터 "국난을 슬퍼하고, 민생에 애통하여, 대동서를 지어 100년을 기리고자 할지라"며 소회를 밝히고 있다. 100년의 대란을 예감하고, 다른 100년을 예비하는 예언서인 듯도 읽힌다.
열쇳말은 역시 '대동'이다. 문헌의 기원은 <禮記(예기)>로 거스른다. 예운(禮運) 편에서 天下爲公(천하위공)과 世界大同(세계대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제시되었다. '大道(대도)'가 실현된 사회가 '大同'이며, 대동이 구현된 시대가 大同世(대동세)이다. 고대의 대동은 군자 또는 현자가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인간의 도덕을 밝히고 공공선을 진작시킴으로써 대동 세계를 만들어야 했다.
근대의 대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도와 덕을 근간으로 한 동방형 유토피아를 지향했다. 다만 군자와 현자에게만 맡길 수가 없음이 '變法(변법)'의 요체라고 하겠다. 만인의 지혜를 개발시키는 것이 自强(자강)의 과제가 된 것이다.
캉유웨이 또한 교육을 으뜸으로 삼았다. 人本院(인본원)부터 소학원, 중학원,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교육 체계를 제시했다. 小學과 大學에 앞서 '인본'이 자리함이 인상적이다. 이성보다는 인성에 방점을 둔 것이다. 萬人(만인)의 聖人(성인)화를 도모하는 '국민 교육'의 도입이다. 그의 평등 사상은 급진적이고 파격적이었다. 남녀, 계급, 민족, 인종의 차별을 지우고, 급기야 가정도 국가도 흐릿해지는 '대동의 세계화'를 제시했다.
캉유웨이의 대동 세계는 자본이 주권을 잠식해가는 작금의 세계화가 아니었다. 도덕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였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철도, 전신, 전기가 선사해준 기회를 높이 샀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의사 소통 체계가 마련됨으로써, 전 지구적 德治(덕치)의 구현도 가능해졌다고 생각했다. 한 마을, 한 국가, 한 지역을 넘어 비로소 전 지구를 대상으로 동시에 교육하고 계몽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고쳐 말해 서방이 전해준 物流(물류)에 동방의 文流(문류)를 실어 보낸다는 역(逆)개화의 발상이었다. 중화 문명의 정수를 길어 올려, 온 누리를 길들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세가 되면 전 세계가 하나의 '公政府'(공정부) 아래 계(界)와 도(都)의 자치를 누린다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비전 또한 20세기형 천하에 방불했다 해도 오독만은 아닐 것이다.
대동교
'대동'이 중화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 이상이었듯, '대동의 근대화' 또한 중국만의 것일 리는 없었다. 대륙에 캉유웨이가 있었다면, 반도에는 박은식이 있었다. 白巖(백암)이 제창한 것이 바로 '大同敎'이다. 1909년이었다.
전후 사정이 있다. 때는 일본의 통감기였다. 병합을 완수하기 위해서 유림들의 친일화에 매진했다. 아무리 대한제국으로 꼴을 바꾸었다 한들, 반 천 년 조선의 근간은 유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완용, 신기선 등 친일 유림들의 주도하에 대동학회(大東學會, 1907년)를 조직했다. 즉 대동학회라는 似而非(사이비)의 대항마로써 대동교가 등장했던 것이다. 1909년 9월 11일, 창립 총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장소는 응당 성균관이었다.
하필 '대동교'였을까? 박은식은 황해도 출신이다. 기독교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삼도에서 교세를 빠르게 확장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뿌리가 깊지 않았고, 황해와 압록강 건너 청의 선진 문물을 앞서 접했던 곳이다. 개화적 사고도 이르게 피어났다. 박은식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통하여 기독교의 확산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대동교의 모델은 기독교에 가까웠다. 유림의 선교사화를 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림이 기득권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국민 교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1909년에 발표한 그의 논설, <儒敎求新(유교구신)>에서도 위민(爲民)주의, 구세주의, 현실주의를 내세웠던 바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改新(개신)의 영감을 얻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개신유교는 개신교와 달랐다. 전지전능 유일신을 신봉하는 '미신'은 따르지 않았다. 사후 천국이나 극락을 말하지도 않았다. 구원이나 해탈보다는 경세가 우선이었다. 박은식에게 종교란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말로써 만민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그 성인 또한 여전히 공맹이었다.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민본주의에 근거하여 유교의 근대화, 유교의 인민화를 꾀했던 것이다. 즉, 조선 유교의 국가적, 권위적 성격을 지우고, 신분이 낮고 배움이 모자란 일반 대중까지도 도덕으로 교화하여 근대적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제왕의 유교에서 인민의 유교로. 그렇다면 대동교를 1894년 짓밟힌 東學(동학)의 後生(후생)이었다 해도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의 天時(천시)도 캉유웨이에 못지않았다. 아니 더 가혹했다. 대동교 창설 이듬해 國亡(국망)을 경험한다. 그 또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민의 처지로 망명한 것이니, 반역자의 운명보다 더 처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꿈을 꾸었다. 망명지 서간도에서 집필한 서적이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1911년)이다. 식민지기 종종 등장했던 몽견(夢見)류 소설의 하나였다. 나는 그의 대표작 <韓國痛史(한국통사)>(1915년)보다도 이 글을 훨씬 아끼는 편이다. 근대적 역사학자보다는 전통적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물씬하기 때문이다. 사유가 활달하고 분방하다.
<몽배금태조>는 조선의 망국민 무치생(無恥生)이 단군이 강림한 음력 10월 3일, 꿈에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를 만나 조선의 망국과 독립을 주제로 나눈 가상의 대화를 서술한 작품이다. 무치생이 박은식의 작중 화자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헌데 만주로 건너가 꿈에서 만난 인물이 주몽도 대조영도 아니고 아골타였음이 의미심장하다.
상고사의 영웅주의로 내달리지 않았다. 금나라가 어떤 나라였던가. 흉노, 돌궐, 선비를 이어 북방을 제패한 여진족의 나라이다. 강성한 금나라는 송나라에 조공을 하지 않고 '조약'을 맺은 최초의 나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조선의 유교 전통을 극복하기 위한 알레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이 섬겼던 성리학, 즉 주자학이 발원한 송나라와 대등했던 금나라를 대타항으로 소환한 것이다. 조선에 자자했던 소중화의식과 화이론을 일거에 허무는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서사 전략이다.
그럼에도 친일의 독배를 들이킨 통상적 문명 개화론자들과는 달랐다. 서구화를 대세로 받아들인 통속적 계몽주의자도 아니었다. 박은식이 <몽배금태조>를 통해 인식하는 20세기란 동과 서, 신과 구의 문명 교체기이다. 다만 우열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계몽과 발전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살벌하고 잔혹한 강권주의에 불과함을 견지했다. 그래서 오늘의 강권주의를 극복하고 내일의 대동 세계를 위하여 '역사'를 서술했던 것이다.
그가 역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진보를 섬기는 계몽서사를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리어 계몽이란 미명하에 펼쳐지고 있는 강권의 현재가 영원하지 못할 것임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문명의 교체와 전환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현상이다. 고로 지금의 고난 또한 영영 하지는 않을 것이다. 不道(부도)하고 不法(불법)한 난세가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후사의 태비는 역시 교육이었다. 공자 이래 동방은 늘 '교육입국'이었다. 특히 하등 사회 자제의 교육을 강조했다. 다만 무치생이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은 교육을 담당할 상류층의 다수가 매국노이거나 은둔지사라는 점이다. 금태조의 답변은 명료하다. 자신만의 정결함을 지키려고 세상을 구제하지 않은 은둔지사는 그 죄가 매국노와 같다는 것이다.
전환기의 지식인은 공덕과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 배우는 만큼(修己) 베풀어야(治人) 한다. 조선은 그 호걸의 피를 가진 열혈아가 없어서 망한 것이다. 아골타의 입을 빌어 志士(지사)와 烈士(열사)를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士氣(사기)의 진작이자, 자기다짐이기도 했을 것이다.
무치생의 꿈이 때 이르게 성취되는가 했다. 8년 후 3.1 운동이 일어났다. 박은식에게 3.1 운동은 조선 민족의 독립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패도가 왕도로 반전하는, 강권적 세계가 대동 세계로 이행하는 터닝 포인트였다. 그는 곧장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달려갔다. 비로소 大同夢(대동몽)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근거지를 확보한 것이다.
대동단, 대동회, 대동제
3.1 운동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결성된 독립 운동 단체가 하나 있다. '조선 민족 대동단'이다. 1919년 3월 말에 발기했다.
강령이 각별하다. 1항이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하는 것"임은 능히 이해될 만하다. 2항은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나아가 <일본 국민에 고함>이라는 문서도 작성했다. "동양 5억의 민생이 우의를 유지하는 것을 행복으로 하는지, 의구, 원한의 악연에 고민하는 것을 명예로 하는지, 일본 국민의 일대 각성을 필요로 한다"는 호소가 간절하다.
"조선 독립의 선포가 공존공영의 지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추호도 역사적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며, 일본을 배척하려는 것도 아니며, 근린을 끓고 원교를 부르려는 것도 아니"라며 일본을 달래고 어르고 있다. 즉 3.1 정신 또한 도무지 민족주의에 그치지 않았다. 지역의 화목과 세계의 화평을 함께 염원했다. 이러한 문명주의란 마땅히 유교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大同團'이었다.
도둑처럼 해방이 오자, 대동은 다시 솟아났다. 대동아가 붕괴한 다음날(8월 16일), 大同會(대동회)가 결성된 것이다. 불현듯은 아니었다. 일제 치하 비밀 독서 모임이었던 大同社(대동사)가 모체였다. 대동회는 명륜학원 출신 중에서도 한학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수재들이 주축이 된 청년 유림 단체였다. 캉유웨이를 읽고, 박은식을 읽었던 지하조직이 해방 공간의 정치 단체로 등장한 것이다. 유교계의 재건과 통합은 물론이요,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시무에도 적극 기여코자 했다. 은둔지사를 털어내고 사대부의 이념형을 복구한 것이다.
1946년 '민족대동회'로 확대 개편하면서 정치 결사체의 성격은 더욱 또렷해졌다. 독립 운동 세력들의 대동 단결을 꾀하며 통일 국가 수립을 추구했다. 1947년 정책 방향도 제출한다. 정부 형태로는 인민 공화국을, 토지 정책으로는 무상 분배를, 노동 정책으로는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 보장, 사회보장제도 도입을 제시했다. 아무래도 대동 사상은 사회주의에 친화적이었던 것이다. 대동회의 좌향좌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김태준도 있었다. 한때 명륜학원 강사였던 그는 동아시아의 '해방구'였던 연안에서 마오쩌둥과 더불어 망명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전설'이었다. 청년 유림들에게 그의 아우라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공간은 급속도로 닫혀갔다. 탈식민은 미-소 주도의 신식민으로 굴절되었다. 미군정은 일찌감치 민족대동회를 온건 좌파(moderate leftist)로 분류하여 동향을 감시했다. '자유민주'를 이식하려는 미군정과는 애당초 길이 달랐다. 불화는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파동부터 불거졌다.
성균관 복권을 통하여 '大學'의 재건을 꾀했던 대동회가 국대안 반대 투쟁의 최전선에 선 것이다. 분단 건국이 확실해지자 결국 상당수는 북조선을 선택했다. 남한에 잔류한 일부는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었다. 한국전쟁 발발은 최후의 일격이었다. 북과 남 모두에서 대동회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로써 좌/우는 물론이요 고/금 사이서도 분단 체제가 확립되었다.
분단 체제는 해방 공간의 인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을 막론하고 유교계의 동향은 망각되었다. 반 천 년의 정신사가 반 백 년도 못된 식민기 동안 사그리 사라질 리 없건만, 무시하고 간과했다. 그만큼 한국사 연구와 서술의 기본 틀이 편향되고 편중되었던 것이다.
허나 좌편향도 우편향도 '올바르지 못한' 진술이다. 좌/우 공히 근대로 편향되었다. 그래서 기독교계와 공산주의 계열을 서사의 축으로 삼은 것이다. 분단 체제의 강화로 유교계의 몰락 또한 가팔라졌다. 북에서는 봉건의 유습으로 매장되었고, 남에서는 현실과 등을 지고 칩거함으로써 박제화되었다. 갱신과 경장으로 거듭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의로움을 실천했던 반 천년 유교사의 전통은 단절되었다.
내가 몹시 흥미롭게 여기는 현상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점에서 다시 한 번 '대동'이 호명된다는 점이다. 대학 축제가 '大同祭(대동제)'로 전환되어 갔다. 1984년 고려대학교에서 비롯하여, 1987년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즉 '6월 항쟁'에 앞서 '5월 대동'이 있었다. 大同의 이상을 大學의 담장 밖으로 밀어붙인 것이 '민주화'였다. 이 무렵 대학은 민속 전통의 장마당이었다. 농악과 가면극, 풍물과 탈춤이 신록의 캠퍼스를 온통 뒤덮었다.
당사자도 아니고, 그 시대를 연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짐작하고 추론할 뿐이다. 아무래도 5월의 광주가 기폭제였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고, 미국식 대중문화에 반성이 일었을 것이다. 반면으로 '國風(국풍) 81'과 같은 관변 주도의 전통 문화 부흥에도 반감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대동제 또한 편향이었다. 민중에 편중됨으로써 농민 공동체의 전통만을 편애했다. 정작 조선이 일구었던 고급 문명의 정수를 오늘에 되살린다는 발상에는 달하지 못했다. 중흥보다는 혁명 쪽이었다. 제3세계 프로젝트의 한계를 고스란히 반복한 것이다.
대동제의 주역이었던 1980년대 학번은 공교롭게도 한글 전용 1세대였다. 나는 박정희의 功(공)이 7이고 過(과)는 3이라고 넉넉하게 봐주는 편이다.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그나마 나라의 꼴이 갖추어졌다고 여긴다. 유신 체제는 무리수였지만, 1970년대의 제3세계에서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구조적 압력 아래서 초기 자본 축적을 위한 정치권력의 집중은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분단국의 숙명마저 지고 있었다. 민주면 무조건 추키고, 독재면 한사코 사리는 '근대적 편견'을 사절하고 반품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3의 과실 중에서도 한글 전용 정책은 치명적인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근대화'와 동떨어진 '조국 근대화'의 결정판이었다. 메이지유신을 그리도 숭상했으면서도 유독 표기법만큼은 국한문 혼용을 폐기한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다. 아마도 한글 전용을 먼저 도입한 북조선과의 민족주의 경쟁, 분단 체제가 한 몫 했을 법하다.
탓에 일천 년 한자 문명과 단절된 80년대의 열혈아들이 쏟아졌다. 그래서 그들이 정작 '대동'의 기원과 계보에 얼마나 자각적이었을지 적잖이 회의하게 된다. 대동강이 천년을 흐르고, 대동법과 대동세로써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던 문명 국가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이 얼마나 있었을까. 멀게는 율곡 이이에서 담헌 홍대용, 혜강 최한기를 거쳐 백암 박은식을 잇는 후예이자 적통이라는 '신진 사대부'의 기상은 있었을까. 피는 들끓었지만, '혼은 비정상'이었다. 올바른 역사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민주화 이후 대동제는 시나브로 시들해졌다. 겉만 남고 실은 사라졌다. 혹자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역사의 종언'에 발맞추어 뉴라이트(신진 매국노)로 전향했고, 일부는 포스트 담론으로 탈주하여 은둔지사로 돌아갔다. 대학은 다시 잦아들었고,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갈수록 대동 세계와 멀어져갔다. 급기야 민주화 30년을 목전에 두고,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대동세와 대동 세계
올해는 <신청년> 창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새파란 친구들이 조롱하고 야유했던 캉유웨이의 '대동몽'이 목하 중국에서 환생하고 있음이 의미심장하다. 청두(成都) 시가 도농 일체화와 신형 도시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표방한 구호가 바로 '대동 사회'인 것이다. 농민공의 사회 복지를 개선하고 도농 간 균형 발전을 도모하는 정책에 '대동'의 이름을 붙였다.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시진핑 시대의 국정 기조가 지속되면서 유교의 근대화, 유학(古)과 사회주의(今)의 결합이라는 '유교 좌파'의 전통이 갈수록 역력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국명으로 삼고 있는 저 나라가 '자유민주'를 복제할 가능성은 터럭만큼도 없다 해도,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은 크게 틀리지 않을 성싶다.
중국만큼이나 대동의 계보가 면면했던 조선 또한 '자유민주'를 추구한 바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뭐래도 분단의 소산이다. 분단 건국과 분단 체제로 말미암아 이식된 것이다. 그래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애당초 토양이 달랐다. 역사의 축적이 없는 외래종이 튼튼하게 자리 잡힐 리가 없다. 그 부정교합의 주동자가 이승만이었다. 새삼 박은식과 이승만의 갈림길을 복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분수령은 역시나 1894 갑오년, 청일전쟁이었다.
소싯적 두 사람은 모두 위정척사론자였다. 그러나 노대국 청국이 신흥국 일본에 무참히 패하는 것을 보고 개화 사상을 수용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서양의 정치 사상을 공부하고 서구론자가 되어갔다. 박은식은 한역 신서를 탐독하고 번역하면서 개신유림으로 변해갔다.
대한제국기 이승만은 개신교를 받아들여 '개신교 입국론'을 정립했고, 박은식은 양명학에 입각한 '유교구신론'을 주창했다. 경술국치, 이승만과 박은식은 미국과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떠났고, 박은식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가 대종교 시교사 윤세복에게 신세를 졌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주 무대로 교육, 종교, 언론, 단체 활동을 펼치며 유력한 독립운동가로 성장했고, 박은식은 노령, 만주 및 중국 관내를 넘나들며 언론, 출판 및 단체 활동을 벌이며 독립지사로서 명성을 다져갔다. 이처럼 해양과 대륙으로 갈라졌던 두 사람이 합류하게 된 계기가 3.1 운동이다. 물과 뭍이 만나는 上海(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물렀던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두 사람은 직접 대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의 조우는 아름답지 못했다.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론에 박은식은 대노했다.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나라마저 미리 팔아먹은 것이니, 이완용보다 더한 놈이라고 성토했다. 결국 1대 임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탄핵한다. 그리고 2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 박은식이었다. 인연보다는 악연이었다.
그러나 천시는 이승만 편이었다. 역사는 임시 정부에서 탄핵받은 이승만을 복권시켰다. 미국의 입김이 결정적이었다. 식민기의 위임 통치가 해방기의 신탁 통치를 거쳐 분단기의 한미 동맹으로 결착이 난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또한 '의존적 독립국', 근대적인 속국이 되었다. 과연 동맹국의 형식을 정초한 그는 '건국의 아버지'였다. 조공국-식민지-동맹국으로 이어지는 속국의 계보를 완성한 것이다.
캉유웨이는 <대동서>에서 거란세(據亂世), 승평세(升平世), 대동세라는 삼분론을 제시했다. 난세와 치세 사이에 승평세를 놓은 것이다. 곰곰 아귀를 맞추어 본다. 아편 전쟁에서 베트남 전쟁까지를 동아시아 100년의 거란세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하면 지금은 승평세의 와중인 것일까. 작금 반도와 열도의 반동적 작태 또한 거란세의 말기 현상일 뿐이라고 낙관해도 되는 것일까. 불안과 불길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다시 백암을 펼친다.
"천도는 순환하기를 좋아하고, 만물은 반드시 올바른 곳으로 되돌아가며, 견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장구하지 않으니, 이는 모두 불변의 이치이다. 어찌 인인(仁人)과 지사(志士)가 이 어지러운 적자생존의 세태를 구하려 함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세계 대동과 인류 공존을 위하는 사상이 점차 학자들의 이론 속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天道(천도)는 순환할 것이며, 만물은 올바른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 어느 것도 장구하지는 않은 법이니, 서세동점과 우승열패의 근대 또한 불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변함없는 이치에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또 대동세와 대동 세계를 구하는 이론의 등장에도 미력하나마 일조하고 싶다는 소망도 키운다. 아무렴 박은식이 모자랐던 것이 아니다. 그가 나고 자란 세계와 세기가 모질었던 것이다.
世紀는 바뀌었고, 世界도 달라졌다. '대동몽'을 안고서 향하는 곳은 중국의 서편, 西域(서역)이다. 태평양의 亂流(난류)와는 사뭇 다른 승평세의 活氣(활기)가 일고 生氣(생기)가 도는 '다른 백년'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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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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